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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제4회

세상 속으로(2)

등록|2009.06.08 19:52 수정|2009.06.08 19:52
 바다가 끝나는 곳과 하늘이 시작되는 곳, 사람들은 그 어름을 수평선이라 했다. 한 번은 선자 누나가 학교에 가져갈 그림 숙제 하는 것을 넘겨다보았는데 누나는 섬이며 돛단배며 갈매기 따위의 구색을 갖춘 바다 그림을 대충 그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검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더니 도화지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로줄을 길게 그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경계가 애매하던 파란색 바탕은 순식간에 하늘과 바다로 분할되었다.

"요것이 뭣인지 아냐? 수평선이여."

누나는 나를 흘끔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넘에는 뭣이 있는디?"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평소 궁금한 것을 물어봤으나 누나 역시 신통한 대답을 해주진 못 했다.

"뭣이 있기는…암것도 없제."

누나는 수평선이 바다와 하늘을 나누는 경계선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너머에 다른 무엇이 있기는커녕 '그 너머'라는 공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맑은 날, 꽁무니로 구름 똥을 누면서 남쪽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파리똥만큼 작아졌다가 사라진 곳은 틀림없이 그 수평선 너머의 어디일 것이며, 돛을 세 개씩이나 세우고 고기잡이 나간 배가 가물가물 종적을 감추곤 하는 곳도 수평선 너머의 어떤 세상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정말로 수평선이 목수가 나무에 대고 퉁기는 먹줄 같은 경계선에 불과하다면, 아침이면 바알간 빛무리를 펼치며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햇덩이는, 밤사이에 어디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고 한단 말인가?   

"꼭 가 봐야제. 커서…"

나는 여덟 살이라는 내 주제를 모르지 않았으므로 수평선 그 너머로의 행차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더 크지 않고도 내가 가볼만한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학교였다.

"학교 입학식잉께 깨깟이 하고 가야제."
"야."

나는 어머니가 건네준 왕소금 한 종지를 평평한 담돌 위에 쏟아놓고 낫자루 꽁무니로 눌러 부쉈다. 왼손에 물바가지를 들고 오른손 검지로 소금가루를 찍어 묻혀 이를 닦았다. 국민학교의 학생이 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지만 아침마다 소금으로 양치질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었다.

'호로로로…푸우!'

나는 입을 헹군 양칫물을 바다 쪽을 향해 있는 힘껏 내뿜었다. 그 바람에 수평선에 붉은 치맛자락을 잡힌 채 주춤거리던 햇덩이가 휙, 매무새를 여미고 하늘로 동실 떠올랐다.

"입학식 끝나면 구판장에 가서 잡깃장 맨들 백로지 서너 장 사온나."

어머니가 오십 환짜리 지폐 한 장을 주었다. 물들인 무명 바지저고리가 국민학교 입학식에 입고 갈 나의 예복이었다. 바지 괴춤을 여며 헝겊 허리띠로 질끈 동이고서 아껴 두었던 새 고무신을 신었다. 돌멩이로 한참을 문질렀는데도 발등에 때가 덜 벗겨진 탓으로 옥빛 고무신을 신고 보니 그야말로 까마귀 발 모양이었다.

사립 밖 골목에서 덕보를 만났고 우물가에서 송남이와 희철이를 만났다.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자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제법 큰 무리가 되었다. 모두 나의 봉선국민학교 동기동창이 될 친구들이다. 입학생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더 먹은 사촌형 선철이도 있었는데 몸이 아파서 학교를 그만 두었다가 다시 입학하는 것이라 했다. 게다가 전쟁 이후의 베이비붐으로 취학할 아이들은 넘쳐나는데 그들을 수용할 교사(校舍)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학생모집을 한 해 쉬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1962학년도의 봉선국민학교 입학식에는 그 전 해에 교실이 없어서 취학을 못했던 아이들까지 몰려서, 작은 섬마을 학교로는 파격적인, 무려 여든네 명이나 1학년이 되겠다고 몰려들었다. 

"앞으로 나란히!"

운동장에 제멋대로 무리 지어서 재잘거리던 우리들은 젊은 선생님의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학교 운동회 때 누나나 형들이 하는 모양을 봐두었기 때문에 어설프게나마 두 손을 앞 사람의 뒤꼭지를 향해 올렸다. 

"느그들은 시방부터 봉선국민학교 1학년 학생이 된 것이여. 그랑께 옷차림도 항시 단정히 하고…이놈들 봐라, 배꼽을 내놓고 댕기면 어짤 것이여!"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저마다 옷깃을 여몄다. 배꼽이 보이면 안 된다고 했으나 내 저고리는 단추가 세 개 밖에 없어서 맨 아래단추를 잠갔는데도 앞으로나란히를 하면 배꼽이 자꾸만 삐져나왔다.  

"쩌어그 저놈 봐라. 코가 나와도 참었다가 나중에 딴 디다가 풀어야제, 던적시럽게 소매로 문대뿔면 못 쓰제."

이번에는 선생님의 그 말을 신호로 삼아서 운동장에 모인 입학생 대부분이 후루룩 코를 마셨다. 소매로 문지르지 말라 했으니 마시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든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일시에 들이마시는 콧소리가 하도 크게 울려서 스스로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다.

"인자부터 학교에서 인사를 할 때는 어치케 해야 되는지 그 인사말을 갈쳐 줄 것잉께 따러서 한 번  해보자 이. 재건합시다!"
"……"

몇몇이 '재건…' 어쩌고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촌놈들, 선생님이 하는 말을 큰 소리로 따러 해보랑께. '재건합시다!'"
"재건합시다."
"더 크게. 시이작!"
"재건합시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합창을 했다. 나는 학교건물 유리창에 부딪쳤다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되돌아오는 그 '재건합시다'의 공명(共鳴)에 쭈르르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콧물 들이켜는 소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아마 그 때 나는 내가 드디어 혼자가 아니라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내 작은 소리가 여든 개쯤 모이면 어머 어마하게 큰 소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급생들은 헝겊을 제비꼬리처럼 오려서 거기다 '재건'이라는 글자를 쓴 다음 가슴에 달고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만나면 군인들처럼 손을 번쩍 올려서 '재건!' 하면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도 입학식이 끝나고 집에 가면 그것부터 만들어서 가슴에 차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박정희와 아유브칸이 악수하는 사진이 박혀 있던 우리 집 아랫목의 벽에 붙어 있던 그 화보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 집 안방에는 그런 것이 안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아마도 마을 이장한테만 나눠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진 아래에 씌어있던 글자들을 입에 담아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아유브칸…' 운운했다가 아버지로부터 된통 지청구를 들었던 것이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이장을 그만두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가늠하기 어려운 나이였지만 내가 만일 헝겊에다 '재건'이라고 써서 가슴에 달고 다닌다면 혹시 아버지가 좋아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몃 들었다.

"자, 지금 나눠준 것이 뭐냐면 교과서 주문서예요.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무슨 책을 살 것인지 그 교과서 이름 옆에다가 동그라미를 쳐달라고 해서 가져와야 해요."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진행했던 남자 선생님이 우리가 쓰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언어를 구사했던 데 반하여, 새로이 담임이 되었다는 그 여자 선생님은 아주 먼 곳에서 왔는지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투 자체가 '우리나라 말'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교과서 주문서를 내일까지 가져오는 거예요. 알았어요?"
선생님이 물었다.
"야."

우리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야, 이 촌놈들아. '야'가 뭐야, '예'라고 해야지. 다시 한 번 해봐요. 알았어요?"
"…예."

우리는 주눅 든 소리로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옷깃을 단정히 여며라, 코를 훌쩍거리지 마라, 떠들지 마라, 손톱을 깎아라…나는 앞으로 이어져 나갈 봉선국민학교에서의 6년 세월이 참 많이 고달플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일상의 대화에서 '야'를 억누르고 그 자리에 '예'를 놓아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우리가 그 동안 생각이며 행동을 거침없이 밖으로 뻗대며 굴러다녔던 모양이 'ㅑ'였다면, 학교에서는 옷깃도 콧물도 말씨도 행동도 바깥으로 돌출하는 것 일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그것들을 모두 안으로 여며 'ㅕ'를 만들라 했다. 그뿐인가. 거기다 다시는 돌이키지 못 하도록 말뚝처럼 'ㅣ'를 하나 더 박아서 아예 'ㅖ'라는 사슬 안에 우리를 가둬버리려 한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장면 정권 때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평생 'ㅑ[野]인'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입학식 날, 국민학교가 있는 용출리 구판장에서 백로지 석 장을 사왔다. 종이 이름이 백로(白露)라면 하얀 이슬 빛이어야 할 진대, 차라리 그것은 누리끼리한 콧물 색깔에 더 가까운 갱지였다.

"끄트머리를 똑바로 맞추랑께!"
"똑바로 맞췄는디 거그서 잡어댕깅께 요놈이 또 틀어져부렀제."
"헌 번 맞췄으면 꽉 잡고 있어야제, 빙신 같이."
"뭣이여? 빙신? 내 공책도 아닌디 자꾸 잔소리를 하고 그래, 씨. 나, 안 해! "
"알었어, 알었어. 백로지 남으면 너 공책도 한 권 맨들어 주께."
"참말로? 거짓말만 해봐."

나는 그 백로지 전지를 토방마루에 펴놓고 동생 선길이를 달래가며 모서리와 가장자리를 둘이서 맞잡고 접어나가기 시작했다. 십육등분으로 접고 나서 겹치는 부문을 잘라야 했다. 나는 아버지의 지게등받이에 꽂혀 있던 낫을 뽑아서 숫돌에 한참을 간 다음에 고놈으로 종이를 잘랐다. 더러 회색 숫돌 가루나 벌건 놋가루가 가장자리에 묻어나긴 했으나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이제 공책을 매는 일이 남았다. 송곳이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못 하나를 갖다가 대고 장도리로 내려쳐 구멍을 뚫었다. 역시 구멍 언저리에 놋물이 배였다. 구멍 네 개를 뚫은 다음, 비료포대를 뜯어 보관해 두었던 노끈을 두 군데로 나눠 질끈 묶었다.

"히야야, 공책이 새 놈으로 생게부렀어야, 히히히."

비록 가장자리의 절단면이 매끄럽지는 못 했지만 새로운 공책 한 권이 생겼다. 백로지 공책의 첫 장을 넘겼다. 상큼한 종이냄새에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고 가서 내 인생의 학습의 첫 기록을 남기자면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다 연필을 깎았다. 그리고 자(尺) 따위가 없었으므로 누나의 수틀을 대고 줄을 쳐나가기 시작했다. 가로로, 세로로…이제 그 공책을 학교에 가지고 가서, 수틀을 닮은 그 공간 안에다 글자를 하나씩 채우면 될 것이었다.

"히히히, 나는 봉선국민학교 1학년 1반 이선호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들뜬 마음으로 천장을 응시하던 나는 벌떡 일어나 새로 만든 백로지 공책을 뒤집어서는 맨 뒷면을 앞에 놓고 배를 깔고 엎드렸다. 학교에 가면 거의 한 달이 넘도록 ㄱ, ㄴ, ㄷ, ㄹ…혹은 ㅏ, ㅑ, ㅓ, ㅕ…같은 재미없는 것들만 배운다 했다. 이미 어지간한 글자들을 다 익혀버린 나로서는 양에 차지 않는 노릇이었다. 나는 연필에 침을 흥건히 묻힌 다음 공책의 맨 뒷면에다 글씨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여성의 매력은 정상적인 멘스에서!!!'

초가집 방안에 도배를 할 때면 일단 신문지로 먼저 초배를 하고난 다음에 그 위에 벽지를 바르는데, 워낙 가난했던지라 벽의 윗부분이나 천장 귀퉁이 등의 취약지구는 벽지가 모자라서 초배 상태로 드러나 있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여섯 식구가 커다란 이불 하나에 비잉 둘러가며 해바라기 씨처럼 촘촘히 박혀서 당기고 밀치고 하면서 잠을 잤다. 그런데, 하필 내가 누웠을 때 정면으로 바라보이던 풍경이 바로 초배지로 사용된 신문지의 광고란이었다. 광고 활자는 아주 컸기 때문에 가물거리는 등잔불빛에 의지해서도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천장과 벽면이 꺾이는 경계쯤에 인쇄된 글자들을 더듬더듬 읽으면서 잠이 들곤 했다.

-여․성․의․매․력․은․정․상․적․인․멘․스․에․서!!!

아마 생리불순 치료약의 선전 문구였던 모양이다. 그 즈음은 마침 박정희니 아유브칸이니를 중얼거리고 다니다가 아버지로부터 된통 야단을 맞은 뒤끝이라, 나는 새로이 그 광고카피에 푹 빠져 있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여자'라는 말 말고 '여성'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신나는 발견이었고,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매력' 이라는 말 역시 시골 주민들의 언어생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단히 매력적인 말로 나를 끌어당겼다. 뿐만 아니라 그 나이에 '정상적'이라는 어휘를 구사한다는 것은 다른 아이들 같으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 광고문구의 하이라이트는 '멘스'였다. 그 말이야말로 나 같은 천재적인 아이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품격 넘치고도 고상한 말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 문장을 공책 뒷면에 적어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학교에 가면서도 쉼 없이 흥얼거렸다. 드디어 나는 나만 아는 그 고상한 말을 선생님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좋았어. 한 번 시험을 해보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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