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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한자말 덜기 (74) 이용

[우리 말에 마음쓰기 667] '달걀판을 이용해'와 '달걀판으로' 사이

등록|2009.06.12 10:47 수정|2009.06.12 10:47
- 달걀판을 이용하다

.. 독일 베를린 '장난감 없는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달걀판을 이용해 성을 쌓고 있다 ..  〈한겨레〉 2004.5.31.35쪽

사람들은 으레 '계란판(鷄卵-)'이라고 말합니다. '계란 한 판'이라고들 하지, '달걀 한 판'이라고는 잘 안 합니다. '달걀'이라는 낱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한지, 이 낱말이 내키지 않아서 그러한지 궁금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쓸 말은 '달걀'이 아닌 '닭알'입니다. 메추리알, 오리알, 거위알, 새알, 타조알, 펭귄알처럼 말 그대로 '-알'이라고 붙여야 올바른데, 어찌어찌 소리값이 '달걀'로 굳어졌습니다. 북녘과 연변에서는 '닭알'이라고만 말합니다.

어찌 되었든, 남녘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한테는 '달걀'이 표준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은 '달걀'입니다. 달걀을 한자로 옮겨 적어 '계란'이 됩니다. 말 그대로 '닭(鷄) + 알(卵)'이라 하여 '계란'으로 적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씀이를 깊이 헤아리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그나마 남녘나라에서는 〈한겨레〉 같은 신문에서 이렇게 '달걀판'이라고 적는 말씀씀이를 찾아봅니다. 다른 신문에서는, 또 학교에서는, 또 저잣거리에서는, 또 책에서는 온통 '계란'일 뿐입니다. 제가 못 보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만, 이제까지 그 어느 밥집과 술집에서도 '달걀말이'를 안 팔았다고 느낍니다. '달걀국' 또한 안 팔고 있다고 느낍니다. 모두들 '계란말이'에 '계란탕'만 팔 뿐입니다. '달걀찜' 또한 안 하고 '계란찜'만을 합니다.

그나저나, 신문 〈한겨레〉는 2004년뿐 아니라 2009년에도 '달걀판' 같은 낱말을 쓸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2014년이 되고 2019년이 되어도 '달걀판'을 살뜰히 지키는 글매무새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이용(利用)
 │  (1) 대상을 필요에 따라 이롭게 씀
 │   - 폐품 이용 / 자원의 효율적 이용 / 지하철을 이용하다 /
 │     바람을 이용하여 풍차를 돌린다 / 천연 세제를 만드는 데에 이용된다
 │  (2)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씀
 │   - 이용 가치가 높은 사람 / 거꾸로 자기편이 나에게 이용을 당했다고 /
 │     남의 약점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다 /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다
 │
 ├ 달걀판을 이용해 성을 쌓고 있다
 │→ 달걀판을 써서 성을 쌓고 있다
 │→ 달걀판으로 성을 쌓고 있다
 └ …

어디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데, 무슨무슨 서비스를 받으면 끝에 어김없이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소리가 나오곤 합니다.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든지 "아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같은 소리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는 우리 말이고, '感謝합니다'는 일본한자말임을 느끼는 분 또한 거의 못 보았습니다. 일본사람은 '感謝の辯'이라고까지 쓰는데,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이 일본글을 '감사의 변'이라고 적는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 '고마움말'이나 '고맙다는 말'이라고 옮겨내는 가슴이 참으로 드뭅니다.

 ┌ 폐품 이용 → 폐품 쓰기
 ├ 자원의 효율적 이용 → 자원을 알뜰히 쓰기 / 자원을 알차게 쓰기
 └ 지하철을 이용하다 → 지하철을 타다

좀더 돌아볼 줄 모르고, 한 번 더 살필 줄 모르며, 다시금 곱씹지 못한다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말을 살피지 못합니다. 우리 말을 살피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생각을 곱씹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이냥저냥 흘러가는 삶으로 놓아 버립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맴돌이만 하는 삶입니다.

 ┌ 바람을 이용하여 → 바람을 써서 / 바람으로
 ├ 만드는 데에 이용된다 → 만드는 데에 쓰인다
 └ 이용 가치가 높은 사람 → 쓸 곳이 많은 사람 / 부려먹을 값어치가 높은 사람

싱그러운 삶일 때 싱그러운 생각이고, 싱그러운 생각일 때 싱그러운 말입니다. 틀에 박힌 삶일 때 틀에 박힌 생각이며, 틀에 박힌 생각이기에 틀에 박힌 말에서 맴돕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매무새를 어떻게 가다듬어야 하는가를 돌아보는 마음결이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매무새조차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며 목소리만 높이고 맙니다. 우리 매무새를 옳게 다스리면서 우리 생각밭을 가꾸고 마음바탕을 갈고닦으며 넋과 얼을 북돋우면 좋을 테지만, 언제나처럼 돈과 이름과 힘이 가장 앞에 서고야 맙니다.

 ┌ 나에게 이용을 당했다고 → 나에게 부려먹혔다고 / 나한테 뜯어먹혔다고
 ├ 남의 약점을 이용해 → 남한테 아픈 곳을 찔러 / 남이 아픈 데를 건드려
 └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다 → 출세하는 수단으로 쓰다 / 이름팔기에 쓰다

살아가는 그대로 말이요, 살아가는 그대로 생각이며, 살아가는 그대로 사랑입니다. 억지로 꾸민다고 해 보아야 한동안입니다. 번드르르하게 갖다 붙인다고 해 보아야 한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산다고 더 낫게 말하고 글쓰는 길을 구태여 찾느냐는 소리도 듣습니다만, 우리가 오래 못 사는 목숨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더 알차게 가꾸고 여미면서 살아 있는 기쁨을 키우며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마디를 가다듬으면서도 아름다워지고, 글줄을 추스르면서도 아름다워집니다. 말 한 마디로는 천 냥 빚만 갚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로도 내 사랑을 한결 따스하게 보듬으면서 내 믿음을 좀더 튼튼하게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내 사랑을 싣는 말 한 마디로 내 삶부터 차근차근 고쳐나가며, 내 믿음을 담는 글 한 줄로 내가 뿌리내린 동네부터 가만가만 살찌웁니다.

말이나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밑바탕입니다. 밑바탕을 업수이 바라보면 우리 삶은 업수이 자라나고, 밑바탕을 알뜰살뜰 손질하면 우리 삶은 알뜰살뜰 힘이 납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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