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이여, 영국식 안장은 그만 버리시죠
[분석] MBC <선덕여왕>, 고증에도 신경 좀 써주세요
▲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 MBC
2009년, 다시 사극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 KBS1 <불멸의 이순신>(2004)과 MBC <주몽>(2006)은 그저 단순한 사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더 깊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고증'이라는 근본을 훼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요. 이는 사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시각과 청각을 극도로 자극하려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 중 가장 자극적인 전투장면의 경우, 고증을 망각하는 연출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물론 퓨전, 판타지라는 또 다른 이름을 덧붙여 변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극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교육적 가치가 있고 국민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심사숙고해 만들어야 합니다.
▲ 영국식 안장과 신라시대 안장. 이제 더 이상 사극에서 영국식 안장은 사라져야 합니다. 수십 억원을 들여 세트장 짓지 말고, 작지만 우리의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고증이 필요한 때입니다. 왼쪽 하단의 사진은 영국식 말안장이고, 말 위에 있는 것이 신라시대 안장입니다. ⓒ 최형국
현재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MBC <선덕여왕>을 비롯한 전통사극에서는 아직도 일반적인 승마방식을 답습하여 영국식 안장과 고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극에서 아마도 가장 역동적인 모습은 주인공 비롯한 군사들이 말을 타고 힘차게 달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극 역사 50년'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아직도 영국식 말안장을 사용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국식 안장은 일반적인 승마를 위해 기승자(말을 타는 사람)가 편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시대 안장은 곧 전투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현재 사용하는 안장과는 형태에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기승자가 급격하게 방향을 틀 경우 낙마를 방지하기 위해 안장 앞쪽과 뒤쪽에 판을 대어 보호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신라시대가 배경인 <선덕여왕>에서도 여전히 영국식 말안장을 사용하고 있더군요. 주인공들이 입는 화려한 옷이나 왕관 복원에 쓰는 돈의 1/10이라도 말안장에 투자한다면 우리나라 사극에서 영국식 안장은 사라질 것입니다.
비오는 날 불화살은 누가 봐도 아닙니다
앞서 말한 장비문제뿐만 아니라, 전투장면에서도 종종 시청자들의 눈을 희롱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선덕여왕>에선 불화살을 쏘는 장면이 종종 등장했습니다. 지난 9일 방송된 6회분에선 토벌을 나온 신라군들이 소나기가 내리는 상황에서 불화살을 하늘에 쏘는 장면이 방송됐습니다. 심지어 그 불화살이 빗속을 뚫고 날아와 집을 불태우는, 조금 어이없는 상황도 연출됐습니다. 비 오는 날, 불화살이라니요... 만약 소나기 내리는 날 불화살을 쏘는 지휘관이 있다면 전투 후에 군사들의 탄원으로 지휘권을 박탈당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황당한 연출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한 건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불화살 말고도 다른 전투장면에서도 이런 황당한 상황이 계속 나오는데요. 적이 고작 몇 걸음 앞에 비무장으로 서 있는데 활을 쏜다든지, 열을 갖춰 싸워야할 전투상황에서 전부 뒤엉켜 싸운다든지 하는 연출은 맞지 않습니다.
▲ 비오는 날 불화살은 그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오와 열을 갖춰 싸우는 것이 오히려 전쟁장면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훈련된 군사들이 싸우는 전쟁은 말 그대로 과학적인 전투방식을 따릅니다. ⓒ MBC
사극에서 고증의 중심축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올곧게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주인공격인 미실의 경우 그 존재가 상당히 애매합니다. 미실이 최고 권력의 품에 안겼던 세월은 진흥왕을 시작으로 진지왕에서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달합니다. 엄청난 시간이지요.
진흥왕의 재위기간이 540년에서 576년까지 36년이고 진지왕은 576년에서 579년까지 3년, 진평왕은 579년에서 632년까지 53년이나 됩니다. 이를 모두 합치면 92년이란 엄청난 시간이 나오지요.
그럼 선덕여왕과 힘 대결을 하고 있는 미실의 나이는 도대체 몇 살일까요? 물론 진흥왕의 재위 후반에 미실이 등장했다할 지라도 선덕여왕과 대립구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드라마엔 미실의 대를 잇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드라마에서는 어린 선덕여왕을 중국의 모래사막에서도 당당히 살아나온 여걸로 표현하는 엄청난 상상력을 보였는데, 역사고증에도 힘을 좀 더 써줬으면 합니다.
섬세한 역사적 고증이 역사바로잡기의 핵심
역사 고증에선 '왜?' 그리고 '실제로 그 시대에 가능했을까?'라는 부분이 충족돼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들만 실제 역사자료에 맞춰 고증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역사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고증을 할 때는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사극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응답자의 약 70%가 '사극을 통해 역사 학습이 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수치만 봐도 사극이 역사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미실. ⓒ MBC
물론,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극의 재미를 더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추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극을 준비하고 있는 기획자들이라면 가장 먼저 역사의 큰 흐름을 고증하고 그 다음으로 각 분야별로 세부적인 고증 작업을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 부분은 전쟁사 고증, 의복은 복식사 고증, 음식에서는 음식사 고증 등의 전문가 그룹과 함께 고증을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처럼 세심한 고증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간다면 처음 몇 작품은 힘들겠지만, 10년 정도 후엔 어느 시대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고증에 상상력을 더한다면 재미는 물론이고 역사적 개연성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근 사극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배꼽을 잡고 웃을 만한 것들입니다. 가령 칼을 손에 들고 말을 탔다가 활을 쏘려고 한다면 그 칼은 어디에 둬야 할까요? 또 칼집에서 칼을 뽑는다면 칼집은 어디에 둬야 할까요? 아마도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칼집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고 다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될지도 모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상황에서 불화살을 날리는 어이없는 군 지휘관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고증, 특히 몸의 역사에 해당하는 무예사나 전쟁사의 경우 더욱 치밀한 고증이 필요합니다. 시청률을 이유로 온 국민에게 잘못된 역사 내용을 각인시키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그러한 부분을 보다 섬세한 시각으로 고증에 맞게 그려낸다면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 할 때 올곧게 넘어 설 수 있는 힘을 주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합니다.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 이며, 저서로는 <친절한 조선사>, <조선무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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