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위험물시설 '안전거리'
소방방재청 26일 '위험물시설 안전거리 적정성 연구' 발표
▲ 사천유치원 앞 주유소 논란이 사천시의 공원조성 계획과 주유소 고시 제정 발표로 수그러들고 있다. 하지만 소방방재청이 추진하는 '위험물 시설 안전거리 기준 적정성 연구'가 새로운 불씨가 될 전망이다. ⓒ 하병주
위험물 시설이 사회적 약자 보호 시설과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두는 것이 적당할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한 소방방재청 연구용역 과제가 발표될 예정인 가운데, 기초자치단체 스스로 안전장치 차원의 '주유소 설립기준'을 마련하는 곳이 늘고 있다. 연구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제도 전반에 미칠 파장이 클 전망이어서 연구 발표회에 관심이 쏠린다.
위험물시설로부터 안전 장치 없는 유치원은 '낙동강 오리알'
주유소와 유치원, 이들의 관계가 상당히 어정쩡하다는 것은 앞선 보도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관련기사: 유치원 코앞에 주유소 들어와도 OK? )
이를 간단히 되짚어 본다면, 위험물안전관리법에서는 주유소를 '위험물 시설'로 분류하고는 있지만 다른 위험물시설에 비해 위험도가 낮다고 판단, 여러 보호시설과 안전거리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반면 영유아보육법과 주택법(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서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경로당, 의료시설, 어린이놀이터 등이 주유소와 25미터 또는 50미터 이상 떨어지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주택법이 대규모 공동택지 개발을 통한 공동주택조성에만 적용되고, 영유아보육법에서는 어린이집이나 놀이방 시설만 보호하고 있어, 같은 영유아들이 생활하는 일반지역의 유치원은 사실상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는 게 유치원 쪽 반응이다.
▲ 논란 끝에 '사업철회'가 결정된 사천유치원 앞 주유소 공사 현장. ⓒ 하병주
심지어 주유소 외 위험물시설로부터 안전거리를 둘 것을 규정하고 있는 위험물안전관리법에서도 ▲초중등교육법과 고등교육법에 따른 학교 ▲의료법에 따른 각종 병원 ▲공연법과 영화진흥법에 따른 공연장과 영화관 ▲아동복지법과 노인복지법에 따른 아동복지시설과 노인복지시설 ▲영유아보육법에 따른 보육시설 등 많은 시설을 나열하고 있지만 유아교육법에 따른 유치원은 빠져 있다.
이 점은 이전에도 문제로 지적된 적이 있었지만, 올해 초 경남 사천의 한 공립유치원 앞에 주유소가 들어서려 하자 유치원과 그곳 학부모들이 반발하며 더욱 알려진 내용이다.
'주유소와 유치원' 나아가 '위험시설과 유치원'의 관계가 이렇듯 애매모호한 가운데,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소방방재청은 지난해 초 '위험물시설의 안전거리 기준 적정성 연구'라는 주제로 연구용역 과제를 전문기관에 의뢰했다. 여기에는 연구과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전거리 기준을 일원화 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연구과제 결과물이 오는 26일 최종 발표된다. 서울교육문화회관 본관3층 소금홀에서 오전 10시부터 진행되는 이 연구과제발표회는 소방방재청에서 위임을 받은 '차세대핵심소방안전기술개발사업단'이 주관한다.
이날 발표될 과제는 '위험물시설의 안전거리 기준 적정성 연구' 외에 여섯 가지가 더 있지만 "심사위원들만 참석하는 자리"라면서 "일반인의 참석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또 연구 발표자료 공개 요청에도 "연구과제 심사 후 공개하겠다"며 조심스런 입장을 취했다.
'위험물시설의 안전거리 기준 적정성 연구' 그 결과는?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위험물시설과 여러 보호시설 사이에 적용하는 '안전거리'를 축소 또는 완화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외국에는 주유소와 안전거리를 두지 않는다" "위험물안전관리법에도 없는 것이 보육법과 주택법에 들어 있다"는 얘기가 연구기관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소방방재청이 지난해 이 연구과제를 의뢰하며 밝힌 연구목적이 "위험물안전관리법/주택법/영유아보육법상 안전거리 기준의 적정성을 재검토하여 합리적인 안전거리기준을 도출하기 위함"이었다 하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안전거리'라는 것이 이것의 '축소 또는 완화' 쪽 방향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 사천유치원 앞에 나붙은 주유소 설립 반대 펼침막(지난3월). ⓒ 하병주
그러나 연구과제발표회를 주관하는 해당 사업단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주유소는 위험물시설 중 일부이며, 전반적으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어느 정도까지 위험지역으로 봐야 하는지를 공학적으로 접근해 판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험물시설 또는 주유소와 보호시설 사이의 안전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결국 이 물음에 관한 답이 조만간 나올 전망이다. 그러나 이는 '공학적' 답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사천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주유소 설치 관련 민원이 심심찮게 생기는 것만 보더라도 '법'과 시민의 '정서' 사이에 큰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유소의 안전거리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 한 가지 더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2006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주유 중 엔진 정지' 의무이다. 당시 위험물안전관리법을 고쳐 주유 중 엔진정지를 의무화한 것은 에너지 절감의 뜻도 있지만 '유증기에 의한 이상 폭발' 현상에 대비하기 위함이 더 컸다는 게 소방청의 설명이다.
사천소방서의 경우 오랜 계도기간을 거쳐 오는 9월 1일부터 실질적인 단속에 들어갈 방침이다. 주유 중 엔진정지를 어길 경우 해당 주유소에는 1회 50만 원, 2회 100만 원, 3회 이상 200만 원의 과태료를 매긴다.
결국 위험물안전관리법에서는 주유 중 엔진정지를 의무화할 만큼 주유소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 주유중 엔진 정지를 의무화한 위험물안전관리법은 주유소가 상당한 위험물 시설임을 대변한다. ⓒ 하병주
반면 다른 위험물시설과 달리 주유소 설립 위치나 기준에 관해 조건을 까다롭게 달지 않고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위험물안전관리법상 보호시설과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고, 학교보건법상 환경위생정화구역 안 심의대상에서도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석유및석유대체연료사업법에서 자치단체별로 주유소 설립 기준을 따로 만들 수 있도록 여유를 줬다.
'나름의 안전망' 주유소 설립 기준 '고시' 만드는 기초자치단체들
이에 따라 '주유소 설립 기준'을 '고시' 형태로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 자치단체가 더러 있다. 지난 5월 1일 이전까지는 광역자치단체별로 고시를 두었으나, 법 개정에 따라 지금은 기초자치단체별로 고시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 개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인지, 주유소 관련 고시를 운용하는 기초자치단체가 아직은 적은 편이다.
법 개정 이전에는 16개 광역단체 가운데 절반인 8개 단체가 주유소 고시를 운용했다면, 지금은 서울 9곳, 인천 7곳, 대전 3곳, 부산 10곳, 광주 4곳, 경북 11곳의 기초단체가 주유소 고시를 운용 중이거나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단,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서 여전히 도에서 주유소 고시를 운용하고 있다.
종합하면 법 개정 이후 '주유소 설립 기준'을 '고시' 형태로 보완하고 있는 지자체는 대폭 줄어든 셈이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관련 고시를 준비하는 지자체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천시도 이런 지자체 중 하나다. 현재 주유소 고시를 두고 있는 기초단체를 살펴보면 한 결 같이 이전 소속 광역단체에서 고시를 운용했던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경남의 경우 2001년 7월에 주유소 고시를 폐지한 탓에 지금까지 한 곳의 기초단체도 주유소 고시를 만들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사천시는 '유치원 앞 주유소' 논란을 거치면서 관련법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인식했고, 유치원 학부모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시장이 직접 "주유소 고시 제정을 검토하겠다"는 답을 시의회에서 밝혔던 것이다.
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다른 자치단체 고시를 검토하고 있고, 지식경제부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면서 "조만간 고시(안)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23일 밝혔다.
▲ 농촌의 한 가정집 담장을 경계로 주유소가 들어서려 하자 마을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주유소 설립 기준이 너무 완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하병주
그러나 사천시를 비롯해 전국에서 주유소 관련 고시를 준비하거나 이미 그 고시를 운용하고 있는 기초단체들의 노력도, 앞서 언급한 소방방재청의 '위험물시설의 안전거리 기준 적정성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연구결과에 따라 관련 법률을 정비한다는 것은 '연구과제 제안요구서'에도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방방재청 관계자도 직접 증언하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여주는 '잣대'
'주유소와 유치원' 또는 '위험물시설과 사회적 약자 보호시설'. 이들 사이에 있어야 할 '안전거리'는 '사회정의와 안전망 확보'란 가치와 정비례해 늘어나고, '규제 완화와 재산권 확대'란 가치와 반비례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어느 길을 택하려는 것일까.
'유치원 앞 주유소' 논란은, 어찌 보면 '좁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 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해 줄 소중한 '잣대'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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