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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뒷산에서는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칠십 평생 쌓아둔 울화를 '비명'으로 풀어내는 엄마

등록|2009.06.25 14:47 수정|2009.06.25 14:47

▲ 숭인동 달동네 판자집에서 가난한 신혼을 시작한 부모님 ⓒ 김혜원


"야아아아아~"
"야아아아아~"

간밤의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인 새벽 네 시 무렵. 꿈인지 생시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뜹니다. '꿈을 꾼 건가?' 잠시 조용해진 주변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역시나 예의 그 비명이 멀리서 들려옵니다.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열 번 정도 이어지더니 이내 잠잠해집니다. 누군가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는 모양인데, 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자유겠지만 덕분에 달콤하게 자던 잠을 깬 저는 억울한 마음에 쉽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얼마간을 그렇게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었을까 남편이 저를 흔들어 깨웁니다.

"일어나. 나 출근해야지. 어머니가 아침 차리고 계시는데 아직도 안 일어나고 뭐해. 당신 어디 아픈 거야?"

"응? 엄마가? 엄마 괜찮으시데?"

무거운 머리를 들고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보니 정말 엄마가 아침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지난 몇 달을 몸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차려다 드리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던 엄마가 국을 데우고 밥을 차리고 계신 겁니다.

"엄마. 이젠 괜찮으신 거예요? 안색도 많이 좋아지셨네."

"그래. 오늘 아침엔 몸이 좀 낫는 것 같아서 부엌에 나와 봤어. 몇 달을 누워있다 보니 음식하는 것도 다 잊은 것 같아서 오늘은 너 대신 국을 좀 끓여 봤다."

'나 한사람 참고 견디면 온 가족이 행복하다'던 엄마

▲ 아버지의 성공 뒤엔 늘 숨어있는 엄마의 노력이 있었다 ⓒ 김혜원


엄마는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당신의 70평생 대부분을 시부모 봉양과 남편 뒷바라지, 자식들 뒤치다꺼리로 보내신 분입니다. 갓 시집온 이십 대 새댁 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 속에서 열 식구도 넘는 가족들의 끼니를 챙겨야 했고 간신히 가난을 벗어나나 했던 삼십 대엔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룰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마흔은 백반집 아줌마로 시작됩니다. 남편의 사업부도로 살길이 막막해진 엄마가 살던 집을 개조해 식당을 차렸던 것이죠. 새벽 다섯 시 새벽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밤 열두 시 마지막 술 손님이 남기고 간 안주 그릇을 치울 때까지 엄마는 기름에 전 앞치마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네 아이들을 공부시켰고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시부모를 봉양했던 엄마. 그리고 엄마 나이 오십. 편안한 중년을 맞는가 했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는 다시 치매에 걸리신 시부모님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성질 불 같고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과 함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맏며느리 시집살이 40년을 겪어내며 엄마가 배운 것은 한 가지. "나 한사람 참고 견디면 온 가족이 행복하다"였습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억울해도 억울하다 표현하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고, 미워도 밉다고 말하지 않는 엄마.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무시해도 참아내던 그런 엄마를 보면서 도대체 왜 저렇게 참고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너무도 답답해 왜 그러고 사느냐며 짜증을 부릴라치면 "내가 참아야 너희들이 편안하지. 나 하나 참아서 자식들이 편안하고 집안이 조용하면 된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엄마. 그래서 전 어느 날부터 엄마는 늘 그 모든 것을 참아내고 그렇게 참아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 말이죠.

육십 중반. 치매를 앓던 시부모님을 하늘나라 보내드리고, 친정아버지까지 보내드린 엄마는 잠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쉼'의 시간을 갖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오래지 않아 깨지고 맙니다. 아버지에게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엄마는 또다시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행주치마의 끈을 꼭 죄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그렇게 살았듯 또 다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이죠.

엄마의 병명은 다름 아닌 '화병'

▲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는 엄마 ⓒ 김혜원



지난해 칠순을 맞으신 엄마. 다른 할머니들 같았으면 할아버지와 다정히 손잡고 산책이나 다니고 자식들이 해다 드리는 음식이나 드시며 부양을 받으실 나이지만 엄마는 그런 호사를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 남편 때문에 허리를 조이고 있는 행주치마 끈을 풀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씩씩하고 강했던 엄마가 올해 들어서면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를 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아버지 때문에라도 내가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아버지를 너희들에게 맡기게 되면 안 되는데… 큰일 났다. 이렇다 나 죽으면 아버진 어쩌냐?"

감기 증세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엄마는 어떤 약을 써도 어떤 주사를 맞아도 병세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개인병원부터 종합병원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받았지만 검사결과는 늘 '정상'. 의사조차도 엄마의 병이 왜 그리 오래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니 그 절망감과 답답함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우리는 엄마의 병명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의 병명은 다름 아닌 '화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눌려왔고 억제되어 왔던 '화'가 더 이상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서 실제로 몸이 아픈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춥고 떨리면서 땀이 나기도 하고 온몸이 쑤시거나 음식을 삼켜도 소화시키지 못하는 등. 암의 초기 증상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암검사 결과가 아주 깨끗하신 걸로 봐서 어머니는 '우울증'과  '화병'이 틀림없어요. 왜 이렇게 참고만 사셨어요?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참으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어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십니다.

"내가 참아야 다들 편하니까요. 시집와서 오십 년을 그러고 살았어요. 속에서 이렇게 불 같은 것이 올라와도 꿀꺽 삼키고 꿀꺽 삼키고 그랬지요. 지금은 목안에 뭐 불 같은 것이 자꾸만 터져나가는 것 같아요. 난 그게 암인 줄 알았지."

"너무 참아서 병이 되신 거예요. 보통 나이 드셔서 이렇게 폭발하게 되면 지난 시절에 참았던 것까지 함께 터져 나오기 때문에 더 위험하지요. 한 번 폭발을 하게 되면 통제가 쉽지 않거든요. 눈물이 나면 목이 터져라 실컷 우시구요. 가슴속에 담아두지 말고 소리라도 실컷 질러보세요. 그게 꼭 필요해도. 그런 과정을 정화라고 하는데 정화를 거치지 않으면 약을 써도 쉽게 나아지지 않거든요. 종교를 가져보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구요."

아침밥을 먹고 나서 엄마에게 살며시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혹시 새벽에… 그 소리?"

"그래, 내가 질렀다. 네 시에 산에 올라가니 아무도 없더라. 그래서 사방을 한번 살펴보고 냅다 고함을 질렀지. 처음엔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소리가 나오지 않더니 몇 번 질러보니 어찌나 시원하던지. 의사 말이 맞더라."

엄마는 그날부터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비명을 지르고 계십니다. 지난 세월 당신을 얽매고 있었던 억압을 풀어내는 비명. 억울함을 호소하는 비명. 답답함을 풀어내는 비명. 참고 있던 울분을 토해내는 가슴 아픈 비명은 그런 엄마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딸의 가슴에도 아프게 메아리칩니다.

혹시나 비명을 듣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야야야야~"를 "하나~", "두울~"로 바꾸셨다는 엄마. 혹시 첫 새벽 고덕동 어느 산 근처를 지나시다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사람을 보신다면 애처로운 인생을 사신 한 할머니의 외침이라 생각하시고 조용히 지나쳐 주세요. 그분이 바로 제 엄마이며 당신들의 어머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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