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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물고기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

[서평] 문태준 시집<가재미>

등록|2009.06.25 16:04 수정|2009.06.25 16:04
언어로 연주하는 피아노 독주곡을 듣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문태준 시인의 시집 <가재미>(문학과 지성사)를 읽는다. 그의 시는 우리의 의식을 맑게 해준다. 그의 시어는 자모음을 이어서 만든 단순한 문자조합이 아니라, 시어 자체가 눈과 귀, 코, 혀 또는 촉각이어서 사물을 만지고 구부리고 조립하여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를 읽으면 오감이 분주해진다.
            

가재미문태준 시집<가재미> ⓒ 문학과 지성사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볕처럼 살다 갔으면/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思慕-물의 안쪽(전문)

옛날 공상과학영화를 보면 인간이 작아져서 인공위성 같은 기구를 타고,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치료를 하기도 하고, 연구를 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시다. 내가 작아져 물 분자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동안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던 모험의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물의 미끈한 살 속으로 나도 들어가 물 한 모금 마시는 여인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타관 타는 몸이 마루를 찾아, 단 하나의 이유로 속초 물치항에 갔다//그러나 달포 전 다솔사 요사채, 고요한 安心寮의 마루는 잊어버려요//대팻날을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近境에서 저 푸른 마루도 많은 날 뒤척이는 流民일뿐//당신도 나도 한 척의 격랑이오니 흔들리는 마루이오니
            -마루(전문)

幽寂을 찾아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을 속초 물치항의 어느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시인 문태준에게서 발견한다. 타향살이의 고통과 새로운 안식을 찾아 떠나는 삶은 생각보다 유쾌하지는 않다. 어쩌면 인생은 끝없는 방황의 연속이며, 여행길이다. 그러기에 편하게 앉아서 쉴 여유를 함부로 주지 않는가 보다.

멀리 가서 멀리 오는/눈을 맞는다//만 섬 그득히 그득히//무 밑동처럼 하얀 눈이네/밟으면/무를 한입 크게 물은 듯/맵고 시원한/소리가 나네//나는 돌아가 惡童처럼,/둘둘 말아 사람을 세워놓고/나를 세워놓고/엉덩이 살을 베어/얼굴에/두 볼에 붙이고/모자를 얹어/나는 살쪄 웃는다//내가 눈 속으로 아주 다 들어갈 때까지          -나는 돌아가 惡童처럼(전문)

눈 오는 날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이 아득하다. 하지만 눈사람을 만들던 추억은 평생을 가는 듯하다. 한겨울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든다. 몸통을 세우고, 얼굴을 만들면서 모자를 얹고 나도 눈사람 속으로 쑥 들어간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흰 열무꽃이 파다하다/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가녀린 발을 딛고/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없었다/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전문)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풍요가 있을지라도 정신적인 극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집안에 돈이 그득하지만 기부금에 인색하고, 술값을 치를 돈은 있지만 책을 사볼 돈이 없는 사람도 많다. 나비들에게 나의 소중한 텃밭을 내어준 시인은 밭의 주인이 된 나비에게 죄스러울 뿐이다. 내가 언제 자연에게 내어준 것이 있었던가 하는 죄책감이 앞선다.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길(전문)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도 되지만, 자연과 인간의 소통을 알려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꽃향기가 길을 타고 마을로 내려오고, 오디가 익으면 아낙의 소쿠리 위에 주전부리를 담아온다. 하지만 농촌은 이제 노인들만 가득하고,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도 사라지고, 밭을 매러가던 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어린 시절 내가 걷던 그 길은 모두 사라지고, 인적이 끊어진 길은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 것이 현실이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푹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전문)

얼마 전 존엄사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더니만, 며칠 전 산소마스크를 제거하고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할머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시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도 오버랩 된다. 다리가 좋지 않아 수술을 하고 2주일 째 병원에 누워계시는 내 어머님의 모습도 그리워진다. 가재미처럼 한쪽 눈이 한쪽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 눈이 붙어버린 그녀의 모습이 나를 서글퍼지게 하는 시다. 어쩌면 이렇게 시를 잘 쓸 수 있지, 잔잔한 피아노 독주를 듣는 듯하다. 잔잔한....

향기는 어항처럼 번지네/나는 노란 소국을 窓에 올려놓고/한 마리 두 마리 바람물고기가/향기를 물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네/향기는 어항처럼 번지네/나는 더 가늘게 눈을 뜨고/손을 감추고 물고기처럼 누워/어항 속에서 바람과 놀았네/훌훌 옷을 벗어/나흘을 놀고/남도 나도 알아볼 수 없는/바람물고기가 되었네       -小菊을 두고(전문)

작은 국화 화분을 창가에 두고 바라보고 있자니, 잉어 한 마리가 되어 향기를 몰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꽃이 되고, 잉어가 되어 놀기도 하고 향기를 뿜기도 한다. 바람물고기가 되어 나도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다.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질퍽하게 건너간다//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門을 벗어나도 門 바깥에 門이 또 있다//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門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붉은 집./축축한 노을이 우리가 머물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門 바깥에 또 門이(전문)

참으로 대단한 은유다. 문 밖에 또 다른 문이 있다. 끝없이 계속되는 삶의 연속성과 영원한 업보를 보는 것 같다.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보여야 함에도 끝없이 계속되는 문들. 답답하지만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난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나고 싶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산까치의 뽀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나는 이 모든 찰라에서 비석을 세워준다   -찰라 속으로 들어가다(전문)

불교대학인 동국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과정을 배우면서 불교방송PD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 문태준의 종교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은 작품이다.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찰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도 찰라의 영상을 시어로 화폭에 가득 담고 싶다.

시인 문태준은 1970년 경북 김천 출신으로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문창과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 국문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며,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을 출간했다. '시힘'동인으로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한 이 시대 최고의 청년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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