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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베갯자국

등록|2009.06.26 09:38 수정|2009.06.26 09:38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교회 갈 준비를 하느라 거울을 보니 얼굴에 베갯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곧 없어지겠지 하고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랐는데 그 때까지도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까.

제 일은 아침 일찍 어디로 출근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얼굴 상태가 어떤지 별 신경을 안 쓰지만 교회에 가는 날은 사정이 다릅니다. 자칫하면 뺨에 한 줄기 내지 두 줄기 베갯자국을 새긴 채 그대로 나다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한 시간 정도만 지나면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 큰 우세를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없어지질 않으니 당황할 밖에요. 하긴 작년 어느 날도 베개에 눌린 얼굴을 하고 교회에 갔더니 누군가가 " 지금은 그래도 괜찮지. 더 나이 들어봐. 반나절 지나도 원래대로 안 돌아올걸"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이 1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그만큼 얼굴 탄력이 더 떨어졌나 봅니다. 남 앞에 드러나는 곳이다 보니 온신경이 얼굴로 뻗치지만 얼굴이 그 모양인 날은 사실 팔다리에도 마치 문신을 하려고 본을 떠놓은 것처럼 이부자리에 눌린 자국이 어지럽습니다.

아침 첫 뉴스를 위해 새벽에 방송국에 나가는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베갯자국 에피소드'가 있다는 소리는 더러 들었지만 요즘 제게 그 일이 노상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서글픈 흔적들은 복병처럼 수시로 나타나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처음 자리를 양보받던 날,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는 통에 팔을 뻗어 읽던 책을 멀리하니 오히려 초점이 맞던 순간, 스스로도 더이상 흰머리를 새치라고 우기기에는 염치가 없어지는 때, '아니 내가 벌써!' 하는 충격과 함께 저마다 늙어감의 징후와 '외로운 독대'를 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어느날 '나이'가 '연세'로 불리는 것에 스산함을 느꼈다는데 그 정도는 애교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40살도 되기 전에 돋보기를 쓴 데다 흰머리 염색을 시작한 지도 벌써 7년째입니다. 제 아무리 가꾸어도 속일 수 없다는 목과 손의 주름살도 나이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더니 유난히 목이 길고 가늘어 주름이 더 많이 잡히는 데다 땅덩이 넓은 나라에 살다보니 정원일을 하지 않을 재간이 없어 손도 농가 아낙네의 것처럼 마디가 굵고 거칩니다. 웃기도 잘하고 찡그리기도 잘하는 탓에 이마와 입가의 표정주름도 심란합니다.

굳이 감출 것도 없지만 묻지도 않은 것을 발설하는 이유는 제 나름으로는 나이들어감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세월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 '발악'을 하는 부류는 애초 못될 뿐더러 누구보다도 저항없이 수굿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아침마다 '베갯자국의 공포'에 시달릴 때면 '주여, 언제까지이니까!' 하는 앓는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별 수 없이 수시로 얼굴에 '줄을 긋고' 간간이 젊은 시절을 되돌아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을 들라면 좋은 나이였을 때 한번쯤 짧은 치마를 입어보았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굵은 종아리가 드러나는 게 싫어서 주로 바지를 입고 다닌 것이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후회스럽다고 했더니 옆에서 또 누군가가 거들고 나섭니다. '지금이 바로 적기'라고. 왜냐면 아무도 안 보니까 그렇답니다.

외출하려던 어느 중년 부인이 거울 앞에서 이옷 저옷을 입어보며 어떤 게 어울리는지 옆에 있던 아들한테 물었다지요. 아들 대답이 " 아무거나 입으세요, 어차피 아무도 안 봐요" 였다는데 제게도 같은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물론 제 나이는 '아주 늙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지요. 하지만 늙어서 서러운 게 아니라 안 예뻐서 서러운 나이라는 것에 서글픔의 초점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더 늙으면 '인물의 평준화'가 와서 건강에만 신경을 쓰고 살면 되지만 중년을 통과하고 있을 때는 아무리 가꾸어도 봐줄 사람이 없다는 비애감에 가슴이 쓰라린 법이지요.

요즘 저는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거울 앞으로 달려가는 새 버릇이 생겼습니다. 간밤에 또 베갯자국이 생겼나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외출이 있는 날은 염려가 되어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납니다. 숫제 노이로제 증상입니다.

이러다 세월이 많이많이 흘러 얼굴에 주름이 왕창 잡히면 베갯자국이고 뭐고 구분이 안 될 때가 올 테지요. 그 때는 어쩌면 '공포의 베갯자국'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자유칼럼그룹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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