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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찾았다, 나무전봇대

[인천 골목길마실 49] 넝쿨풀과 한몸이 되는 골목길 터줏대감

등록|2009.06.27 16:35 수정|2009.06.27 16:35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열려고 나가는 길에, 옛 인천여고 옆자리인 인천 중구 전동 골목길로 접어들어 봅니다. 고즈넉한 골목동네 안쪽에서는 꽃이 피고 새가 울고 할매와 할배가 느린 걸음으로 마실을 하거나 해바라기를 합니다. 아침부터 이삿짐을 나르느라 바쁜 사람들이 있고, 오토바이를 싱싱 몰며 무언가를 나르는 일꾼이 있으며, 큼직한 자가용을 골목 안쪽까지 밀어대며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갓지게 공원마실을 가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잠깐 바라보다가는, 막다른 골목이라 동네사람 아니고는 들어가지 않는 골목 안쪽으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갑니다. 막다른 데에다가 길도 좁아 자가용은커녕 오토바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으로 접어드니 어여쁜 수국이 꽃송이를 뽐내고 있고, 그 옆을 따라 붉은벽돌 담벼락에 담쟁이가 조그맣게 하얀 꽃을 피우고 있기도 합니다.

저 앞으로 제법 우람하다 싶을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기에 지붕 낮은 골목집과 아우르며 사진 한 장에 담아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골목나무 사진을 찍다가 낯선, 아니 낯익은 나무 기둥 하나가 내 사진에 함께 들어와 있음을 느낍니다. '뭐지?'하면서 두 눈에 힘을 주고 오른손은 눈 위에 대고 바라봅니다. '나무전봇대잖아! 예서 가까운 곳에 있네!'

▲ 골목집 뒤편으로 보이는 우람한 나무들을 찍으려 하다가 얼핏 제 사진에 스며들어온 나무전봇대입니다. ⓒ 최종규


이곳에도 나무전봇대가 있을 줄이야.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골목집 예쁘장하고 아기자기한 꽃그릇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나무전봇대 우뚝 서 있는 그곳을 멀리 바라보면서 막다른 골목 끝으로 걸어갑니다.

멈칫. '전동간, 二二좌四좌二호'라는 펜글씨가 적힌 나무 전봇대 기둥에는 넝쿨풀이 줄기를 감아올리고 있습니다. 나무전봇대 왼편으로는 헌 통에 고추포기 몇이 자라면서 하얀 고추꽃을 피우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시멘트를 발라 자그맣게 꽃밭을 이루어 놓은 가운데 여러 가지 풀꽃이 자라고 있습니다.

'너 참 반갑구나?' 하고 인사를 해도 되려나. 틀림없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나무전봇대일 텐데. 그래, 높임말로 인사를 하자. '나무전봇대님, 잘 계셨어요? 오늘 처음 뵙네요. 앞으로 틈틈이 찾아올게요. 앞으로도 튼튼히 이 자리를 지켜 주셔요!'

▲ ‘전동간, 二二좌四좌二호’라는 펜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전봇대 번호가 아닌가 싶습니다. ⓒ 최종규


인천골목길 마실을 하면서 여섯 번째로 찾아낸 나무전봇대입니다. 아니, 찾아냈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 이 나무전봇대들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 오고 있으니까요. 제가 그동안 몰랐고, 알아보지 못했던 나무전봇대님들을 여섯 번째로 '알아보았다'고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앞으로 일곱 번째 나무전봇대를 새로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하고,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나무전봇대도 새삼스레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막다른 골목 끝으로 사뿐사뿐 마실을 이어간다면, 또다시 알아보고 반가워하고 기뻐할 수 있겠지요.

다행스레, 이곳, 중구 전동 골목길 안쪽은 인천시에서 드물게 '도시정화'를 꾀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 나무전봇대님들은 앞날이 가물가물하지만, 이곳 나무전봇대님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골목 안쪽을 빛내어 주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때에는 넝쿨풀이 나무전봇대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을는지 어떠할는지 기다려집니다.

▲ 수국꽃 어여쁘게 피어난 골목집 앞에서 오래도록 꽃구경을 했습니다. ⓒ 최종규


▲ 아직 봉우리가 더 터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퍽 곱습니다. ⓒ 최종규


▲ 막다른 골목으로 깊이 마실을 다니는 사람이 없기에, 이 골목꽃은 더 소담스러운지 모릅니다. ⓒ 최종규


▲ 예전에 나무전봇대가 있던 자리는 하나같이 밑둥만 남긴 채 잘려 나갔습니다. 잘려 나간 나무전봇대를 떠올리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최종규


▲ 인천에 깃든 골목길 안쪽 나무전봇대를 보면, 언제나 둘레에 꽃그릇이 있기 마련이고, 꽃그릇마다 어여쁘게 꽃을 피우거나 소담스레 열매를 맺곤 합니다. ⓒ 최종규


▲ 나무전봇대를 만나기란 몹시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나무전봇대를 아주 뜻밖인 곳에서 뜻밖인 날에 만날 때면, 입을 맞추기도 하고 껴안기도 합니다. 나라나 지역 정부에서는 나무전봇대를 ‘문화재’로 여기지 않으나, 제 마음에는 문화재보다 훨씬 거룩하고 아름답고 살가운, 어릴 적 말뚝박기 놀이를 하던 동무요, 우리 골목동네 터줏대감입니다. ⓒ 최종규


▲ 나무전봇대 왼편과 오른편으로는 온갖 푸성귀와 풀이 자라고 있어, 한껏 잘 어울립니다. ⓒ 최종규


▲ 전기를 쓰는 집이 많지 않았을 때에는 이 나무전봇대로도 넉넉했을 테지요. 이제는 이 나무전봇대로는 어림도 없을 테지만. ⓒ 최종규


▲ 자동차 말고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해 보셔요. 또는 두 다리로 신나게 걸어 보셔요. 그러면, 여느 때에는 늘 놓치거나 못 보거나 잊었던 온갖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 붉은벽돌 담벼락에 피어난 조그마한 꽃한테도 방긋 웃음인사 한 번을. ⓒ 최종규


▲ 골목집하고 곱게 어울리는 나무전봇대를 만난 하루를 즐겁고 뿌듯하게 마무리합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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