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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마흔이 넘고 몇이 더 되어

등록|2009.07.05 16:36 수정|2009.07.05 16:36
훌쩍 마흔이 넘고 몇이 더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삼십대의 온 기운을 몽땅 쏟아 붓던
일터를 잃고도
기죽어 살아선 안 되지
기죽어 살아선 안 되지
마음 추스르며 돌아다니다
지나가는 말로
그래 요즘 뭐 하냐
고, 묻는 사람들의 물음에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가슴 한 곳 쿵 내려앉고
궁색한 변명 찾기도 겸연쩍어져

차츰 사람 만나기 두려워
바깥 출입 금하고
아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
본 신문 또 보고
묵은 신문까지 뒤적여도
세상은 새로울 것 없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아
도, 내일 신문을 기다리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무심히 수화기 들면
아내를 찾는 전화.
쏜살 같이 달려온 아내는
두 눈 흘켜세우고
당신 놀고 있는 거
창피해 죽겠으니 전화도 받지 말라며
노는 사람이 외모라도 깨끗해야지
이발소에 가서 머리 좀 깍으라며
아내가 마루바닥에 휙 던지는
천원짜리 몇 장 구깃구깃 챙겨들고
남편은 존재만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한겨울 거센 바람에 목청을 돋구는
낮게 늘어진 전기줄 사이로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다 화성으로 떠났는지
행인 하나 없는
적막한 눈길을 밟으며 단골 이발소로 간다.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흰옷 말끔하게 차려 입고 나를 반기는
이발소 아저씨는
내가 백수가 된 줄도 모르고
요모조모 물어오고, 아저씨의 물음에
건성건성 얼버무리며
의자에 올라앉는 내 눈에, 벽 위에 걸린
마릴린 먼로의 요염한 그림 들어온다.

아내와 잠자리다운 잠자리가
언제였든가 기억을 더듬는데
우린 저런 여자와 평생 자보지도 못하고 죽겠죠
라며, 이발소 아저씨가 능숙하게
머리에 물을 뿌리고 빗과 가위를 갖다 대자
아내와의 잠자리조차 무시당하는 나에게
마릴릴 먼로와의 잠자리를 꿈꾸는
이발소 아저씨의 농을 들으며 
습관처럼 눈을 감는다.

내 눈 앞으로
어린 시절
고향 이발소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 떠오른다.

들판에서 소를 몰며
땅을 가는 농부를 배경으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고 쓰여 있던
그 액자.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까까머리 소년은 알 바 없었고
치기만만하게 세상 모두를 거머쥘 것 같던
열혈 청년에게는
그 말이 참으로 가소롭게 들렸다.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 여겼던 세상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만이라도 움켜잡으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내달릴 땐
그 액자 속의 그 구절마저
까맣게 까맣게 잊고 살다가

훌쩍 마흔이 넘고 몇이 더 되어
죽어서도 남자 마음을 어지럽히는
마릴린 먼로, 그녀 사진이 걸린 이발소에서
헝클어진 生의 머리를
썩둑 썩둑 깎이다
이렇게, 이렇게
가슴 콱, 콱 누르고
목젖을 타게 만드는
그 액자의 그림
그 액자의 구절.

이발소 의자
양쪽 팔걸이에 가로 놓인
송판 위에 앉혀
머리 빡빡 깎이던 
소년이, 훌쩍 마흔이 넘고 몇이 더 되어
이제 세대가 바뀌어도 몇 번 바뀌었을
그 액자 속의 소를 몰며
훨씬 복잡해진 세상 한 자락 어디선가
여전히 자신의 삶을 갈고 있을
그림 속의 농부를 떠올리며
이발소 문을 열 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마릴린 먼로와
푸쉬킨이
손을 내민다
백색의 겨울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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