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조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무왕 35년(634년)조에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기사는 바로 이 궁남지를 두고 한 말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이고 있다.
신라 왕궁의 대표적인 정원이랄 수 있는 안압지보다도 40여년 먼저 만들어진 정원이다.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궁남지 바로 동쪽에 있는 화지산의 망해정이 푸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워
신선경을 방불케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는 전한다.
"백제의 정원 기술은 삼국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에 큰 영향을 끼쳤고
612년 무왕 13년 백제인 노자공(路子工) 지기마려(芝耆摩呂)가
일본에 수미산 모형과 오교를 만들었다는
일본 서기의 기록과 같이 일본 정원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부여군이 만든 제1회 부여백제정원축제 안내 팜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분히 아전인수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부여 궁남지가 경주 안압지보다 더 앞선 정원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만
더 높은 정원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궁남지는 궁의 남쪽의 못이라는 그 이름부터가 멋이 없다.
40여년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안압지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마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켜 한껏 묘미를 살린 안압지가
그저 둥글게 조성한 궁남지를 모델로 했다는 것도 객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지금의 궁남지가 백제 시대의 궁남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옛날에는 훨씬 컸으나 지금은 많이 메워지고 일부만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5년에 정비 사업을 했고 가운데 섬의 정자는 1971년에 세운 것이다.
그 자리 때문에 사적 제 135로 지정되었다.
신문에 정원축제를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한마디로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부여군이 궁남지 주위의 땅에다가 거대한 연밭을 조성했다.
수많은 연못을 조성하고 그 못마다 다른 연을 심어서 거대한 연꽃 전시장을 만들어 놨다.
부여군은 정원을 조성했다고 말 할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정원이 아니라 연꽃 전시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연밭들이 궁남지와 어울리는 풍경도 아니었다.
오히려 궁남지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해치는 연밭일 뿐이었다.
연밭에서의 실망은 궁남지에 가서는 분노가 되었다.
부여군이 멋이라고는 없는 살풍경한 서양식 분수를
궁남지 여기 저기에다 만들어 놓고
하늘을 향해 치졸한 물줄기를 쏘아올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양식 정원의 장치랄 수 있는 분수가 궁남지에 설치되다니..
그것도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더욱 가관은 시민들에게 위락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는지
그 못에다 수 십척의 카누를 띄워놓고 못 가에는 선착장도 만들어 놨다.
분수 물보라에 옷 젖어 가면서 카누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니...
거기다가 궁남지 바로 옆에는 서양식 빛의 거리, 루미나리에를 만들어놨다.
우리나라 정원 문화의 원점이랄 수 있는 궁남지를 부여 시민들의 유원지로 만들어 놨다.
어디 뱃놀이 할 데가 없어서 궁남지에서 뱃놀이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부여라면 백마강에서의 뱃놀이가 제 격이지 궁남지에서 카누 놀이라니...
이 지경이 되도록 문화재청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다.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 귀중한 문화 유적을 훼손해놓다니...
화려한 빛의 거리, 루미나리에를 배경으로 궁남지에서 카누 놀이를 즐기는 오늘날의 부여 사람들
우리의 미의식이 백제 시대 수준보다 못하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것이 서양과 동양,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고 우긴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조화와 꼴불견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 의식 수준에 꽃밭을 거닐면서도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정원축제라해서 가봤더니 세계 유명 정원은 사진 몇 점을 야외에 전시해두고
중국과 일본 정원 미니어처를 전시해둔 게 고작이었다. 정원 축제에 도자기 체험이니
나무 블럭 놀이니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쇄원이나 창덕궁 후원, 안압지, 부용동 유적지... 등
우리나라 정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자료도 없었다.
먹거리 장터만 요란했다. 정원 축제 또한 풍류를 즐겼던 정원 문화는 간 곳이 없고
시끌벅적하고 천박한 동네 잔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제의 아름다움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는 않다'는 儉以不褸 華以不侈인데
오늘날의 궁남지는 내 눈에는 사치스러우면서도 누추해 보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무왕 35년(634년)조에 3월에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기사는 바로 이 궁남지를 두고 한 말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이고 있다.
신라 왕궁의 대표적인 정원이랄 수 있는 안압지보다도 40여년 먼저 만들어진 정원이다.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궁남지 바로 동쪽에 있는 화지산의 망해정이 푸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워
신선경을 방불케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는 전한다.
"백제의 정원 기술은 삼국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에 큰 영향을 끼쳤고
612년 무왕 13년 백제인 노자공(路子工) 지기마려(芝耆摩呂)가
일본에 수미산 모형과 오교를 만들었다는
일본 서기의 기록과 같이 일본 정원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부여군이 만든 제1회 부여백제정원축제 안내 팜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다분히 아전인수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부여 궁남지가 경주 안압지보다 더 앞선 정원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만
더 높은 정원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궁남지는 궁의 남쪽의 못이라는 그 이름부터가 멋이 없다.
40여년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안압지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마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켜 한껏 묘미를 살린 안압지가
그저 둥글게 조성한 궁남지를 모델로 했다는 것도 객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지금의 궁남지가 백제 시대의 궁남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옛날에는 훨씬 컸으나 지금은 많이 메워지고 일부만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5년에 정비 사업을 했고 가운데 섬의 정자는 1971년에 세운 것이다.
그 자리 때문에 사적 제 135로 지정되었다.
신문에 정원축제를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한마디로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부여군이 궁남지 주위의 땅에다가 거대한 연밭을 조성했다.
수많은 연못을 조성하고 그 못마다 다른 연을 심어서 거대한 연꽃 전시장을 만들어 놨다.
부여군은 정원을 조성했다고 말 할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정원이 아니라 연꽃 전시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연밭들이 궁남지와 어울리는 풍경도 아니었다.
오히려 궁남지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해치는 연밭일 뿐이었다.
연밭에서의 실망은 궁남지에 가서는 분노가 되었다.
부여군이 멋이라고는 없는 살풍경한 서양식 분수를
궁남지 여기 저기에다 만들어 놓고
하늘을 향해 치졸한 물줄기를 쏘아올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양식 정원의 장치랄 수 있는 분수가 궁남지에 설치되다니..
그것도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더욱 가관은 시민들에게 위락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는지
그 못에다 수 십척의 카누를 띄워놓고 못 가에는 선착장도 만들어 놨다.
분수 물보라에 옷 젖어 가면서 카누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니...
거기다가 궁남지 바로 옆에는 서양식 빛의 거리, 루미나리에를 만들어놨다.
우리나라 정원 문화의 원점이랄 수 있는 궁남지를 부여 시민들의 유원지로 만들어 놨다.
어디 뱃놀이 할 데가 없어서 궁남지에서 뱃놀이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부여라면 백마강에서의 뱃놀이가 제 격이지 궁남지에서 카누 놀이라니...
이 지경이 되도록 문화재청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다.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 귀중한 문화 유적을 훼손해놓다니...
화려한 빛의 거리, 루미나리에를 배경으로 궁남지에서 카누 놀이를 즐기는 오늘날의 부여 사람들
우리의 미의식이 백제 시대 수준보다 못하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것이 서양과 동양,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고 우긴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조화와 꼴불견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 의식 수준에 꽃밭을 거닐면서도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정원축제라해서 가봤더니 세계 유명 정원은 사진 몇 점을 야외에 전시해두고
중국과 일본 정원 미니어처를 전시해둔 게 고작이었다. 정원 축제에 도자기 체험이니
나무 블럭 놀이니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쇄원이나 창덕궁 후원, 안압지, 부용동 유적지... 등
우리나라 정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자료도 없었다.
먹거리 장터만 요란했다. 정원 축제 또한 풍류를 즐겼던 정원 문화는 간 곳이 없고
시끌벅적하고 천박한 동네 잔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제의 아름다움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는 않다'는 儉以不褸 華以不侈인데
오늘날의 궁남지는 내 눈에는 사치스러우면서도 누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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