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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비밀대표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서평]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

등록|2009.07.14 08:59 수정|2009.07.14 08:59

▲ ⓒ 후마니타스


나는 강산에라는 가수를 좋아한다. 물론 많은 가수들이 분단된 우리를 노래했지만 그의 노래 속에는 분단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실향민 아버지의 한을 노래한 '라구요'라는 노래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선'이다.

"파란 하늘 펼쳐있고 광활한 대지 위에/ 거기에 우리 산이 있고 거기에 강이 있고/ 거기에다 벽을 만들고 두꺼운 선을 그었다/ 거기에는 바다 있고 거기에 숲이 있고/ 거기에 우리 들판 있고 거기에 사막있고/  거기에다 벽을 만들고 두꺼운 선을 그었다/ 맘속에 무겁고 새까맣게 의미없는 선을 그었다"

선은 휴전선을 의미한다. 우리의 외형을 규정한 분단이 어느새 우리 맘 속에 들어앉았음을 안타까움으로 노래하고 있다. 강산에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는 내게 우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완료형으로 끝나지 못한 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냉전은 막을 내렸지만 분단의 한반도에는 냉전의 그늘이 여전하다. 냉전은 대결이다. 대결은 대립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파열음으로 우리를 괴롭혀 왔다. 어느새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냉전의 구조는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파열음에 적응되도록 만들었다. 세계적 탈냉전이 만들어내는 평화의 화음보다는 냉전의 파열음이 익숙해져 버렸다.

분단이 만들어낸 아픔과 역설을 담은 <냉전의 추억>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분단역사를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이라는 한 권의 책 속에 담았다. 한반도 냉전 역사에 대해 김 소장은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시니컬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 이 성명의 산파역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북한 호칭문제에 대해 "우리가 북한 괴뢰니 하고 북한에서는 남조선 괴뢰니 하는 용어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시각, 성북 전매소 판매계 직원 이병진씨는 담뱃가게에서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다 흥에 겨워 "잘한다. 이제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누가 잡아가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시민의 신고로 체포돼 반공법 4조 1항 위반으로 구속됐다. 한반도 분단의 희생양은 그렇게 어이없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이야기다.

남북한이 총을 겨누고 북한이 간첩을 내려 보내는 긴박한 분단의 상황은 얼마나 공허한 것일까. 박철언 전 장관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북측의 한시해 대표와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은 그 공허함을 고스란히 담았다.

박철언 전 장관은 "예전에 북측이 심심찮게 공작선을 내려보내 우리 군사기지를 정찰하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서로 신뢰가 깨지니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한시해 대표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남측에서는 U-2기다 SR-71이다, 첩보위성이다 해서 평양 시내를 손금 보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군대라는 것이 이따금 작전도 해야 하고, 임무를 수행하면 훈장도 줘야 군의 사기가 올라갑니다. 우리야 고작 요원들이 사진 몇 장 찍어 가지고 오는 겁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라요." 남북의 비밀대표는 서로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단다.

이 책은 이처럼 분단이 만들어낸 아픔과 역설을 담았다. 만남·대결·교류·협상·협력의 다섯 가지 색깔의 분단 이야기를 쉽게 풀어냈다. 마치 더운 여름날 밤 6·25전쟁을 겪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전쟁 얘기를 듣던 것처럼 우리의 분단역사를 너무나 쉽게 담았다.

"냉전을 추억하며 평화의 미래를 그려본다"

강원도 '촌놈'인 김 소장은 학자로, 기업체 직원으로, 관료로 분단을 입체적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렵지 않다. 현학적이지도,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조잡하지도 않다. 쉽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분단 역사를 책 한 권 속에 재구성해 참 쉽게 우리 시대 한반도의 냉전문제를 깊이 생각게 한다.

그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파 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냉전을 추억하며 평화의 미래를 그려본다"며 "오해를 넘어서면 공존이 가능하듯, 냉전의 추억을 딛고 평화의 미래를 상상해 보자"고 말했다.

장마가 오락가락한다. 이 비가 그치면 열대야가 올 것이고 지친 우리가 기다려온 휴가가 기다리고 있다. 휴가지 텐트 속에서, 그럴듯한 펜션에 누워서 차가운 수박을 베어물면서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냉전의 추억>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에 현재를 규정한 냉전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장용훈 기자는 <연합뉴스> 민족뉴스부 차장입니다.

<냉전의 추억> -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 김연철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29일 /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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