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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 인정 못 받아 성매매한다는 상담이 많아요"

[인터뷰] 조윤경 도봉푸른장애인독립생활센터 공동대표

등록|2009.07.16 15:43 수정|2009.07.16 15:43

▲ 조윤경 도봉푸른장애인독립생활센터 공동대표는 지난 3년간 인터넷 라디오방송을 통해 장애인에게도 "사랑과 성을 허하라"고 외쳐왔다. ⓒ 윤성희


섹스, 자위, 성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이런 단어들이 방송을 통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그것도 그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여성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목에 핏대 세우며 "말세"라고 욕할 만하다. 그들에게 이 사실까지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진행자가 바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라는 것.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편견에 맞서 과감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는 바로 <민중의 소리> 노동방송 '조윤경의 장애인 푸른 아우성' 진행자이자 도봉푸른장애인독립생활센터(도봉푸른IL) 공동대표 조윤경(35)씨다. 그는 '장애인의 성'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늘 이렇게 말한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무성 혹은 중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장애인들은 식욕과 똑같이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억압받아 왔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성을 즐길 권리가 있고 장애인 역시 마찬가집니다."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허하라

그가 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다. 그는 대부분의 장애인들과 달리 부모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공주처럼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일도 그만두고 그를 돌보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히거나 용변을 보게 할 때가 많았다. 그는 '다른 여자아이들은 치마를 들추는 장난만 해도 어른들이 야단치고 난리인데, 왜 나 같은 장애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 장애인 성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다 보니 장애인 성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성에 대해 교육받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미리 교육이나 지원을 받았으면 훨씬 편하게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죠. 당시에 제가 뇌성마비복지관 청년모임인 '어우러기'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성관련 교육을 받으면 좋겠다 싶어서 성교육 강사 구성애 선생님을 초대했죠. 강의를 들으면서 장애인 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나도 성적인 존재이고 성 정체성이 있구나'하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거죠."

- 구성애 선생님을 만난 이후에 '장애인 푸른 아우성'(장아성)을 만든 거네요.
"구 선생님이 그때 장애인 성 관련 모임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모임에 정작 장애인 당사자는 없고 장애인 부모님이나 복지사, 학교 선생님들만 있었죠. 주로 지적 장애인에게 어떻게 성교육을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의한 거죠.

구 선생님이 본인은 일반적인 성 관련 전문가이지만 장애인 성은 장애인 당사자의 감수성이 있어야겠다면서 저에게 한번 해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처음에는 단체까진 생각 못했고 작게 소통할 공간만 열어두자고 2004년에 커뮤니티를 만들었어요. 야한 얘기하는 데는 많지만 건강하게 얘기되는 곳은 없잖아요. 하다보니 목소리도 많아지고 얘기만 해서는 정리가 안되고 문제만 남는 것 같아서 상담도 하는 단체로까지 발전했죠."

실제 결혼한 장애인 여성으로서 절실히 느꼈던 문제를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장애인 성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사회에 던진 것이다. 현재 '장아성(http://cafe.daum.net/beutysex21) 온라인 회원은 2천여 명에 이르고 성과 사랑, 결혼 등에 대한 각종 상담이 연일 올라온다. 그 덕에 그에겐 '장애인 성교육 강사'라는 호칭도 따라붙는다.

- 성이나 사랑, 상담 등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나요?
"구성애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들도 읽고 사람들과 많이 얘기를 나누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섰죠. 또 스물 한 두 살 때 군대 간 친구들이 저에게 연애 상담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친구들이 집에 제일 많이 있는 저에게 연락을 했죠.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됐고, 사이버대학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기도 했죠."

- 성교육 강의를 할 때 제일 강조하는 부분이 있을 텐데요.
"주로 지적장애인을 성교육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요청이 많아요. 저는 그보다는 지적 장애인들의 권리가 무엇이냐, 그들이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냐를 중심으로 얘기하죠. 솔직히 제가 강의하고 싶은 건 인식의 변화 부분이에요. 복지 종사자나 부모님이 자녀의 성적 권리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를 만드는 게 중요한 거죠."

- 상담했던 사례를 들려준다면요.
"얼마 전 '장아성' 방송에 나왔던 사연이에요. 38세의 남성인데 장애가 심하지는 않지만 경제력도 없고 집에서도 인정을 못 받다 보니까 자기를 만나줄 여자가 없을 것 같아서 베트남 여성을 찾았다고 해요. 서로 사진 보고 마음에 들어서 가족에게 얘길 했더니 크게 반대를 하더래요. 매제는 막 욕까지 하면서요.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슨 짐을 더 지우려고 그러느냐고 했대요. 다른 형제들은 다 결혼을 했는데 그 분이 결혼하는 건 반대하는 거죠. 남성들은 '성적 욕구는 있는데 인정을 못 받으니까 그냥 성매매를 한다. 결혼을 하고 싶은데 우리나라 여자들은 안 해줄 것 같다' 이런 상담이 많아요."

- 그에 대해 어떻게 답변해주나요?
"결혼이 아닌 사랑이 목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죠. 성욕을 풀기 위해 결혼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요.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할 기회를 많이 만들면 조건은 안 보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요. 지레 짐작하는 거에요. 우리나라 여자들은 눈이 높다고….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요. 자기 자신부터 그런 편견을 깨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해요. 또 우리가 가족들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가족 말에 너무 휘둘릴 필요는 없다고도 강조해요."

장애가 '개성'이라던 아버지

그는 3년 동안 인터넷 라디오방송을 통해 장애인 성에 대한 공공연한 수다를 떨어왔다.

- 라디오방송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장아성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카페 회원들이 지방에 내려와서 모임도 하고 강의 좀 해달라는 요청들을 많이 했어요. 움직이기도 힘들고 다 갈 수도 없어서 매체를 통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에 남편이 노동방송국에 인터뷰 갔다가 소개를 받았어요."

- 벌써 3년째인데 성과가 있다면요?
"우선 저 같은 중증장애인도 방송 진행하는 걸 보고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찾아가지 않아도 장애인 성상담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도 하고, 비장애인들은 이런 문제가 있는줄 몰랐다면서 장애인 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얘기하는 분들도 있죠."

-원래 라디오 DJ가 꿈이었나요?
"어렸을 적 꿈은 연예인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걸 좋아했죠. 뇌성마비치고는 언어장애가 없던 편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아나운서 해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쩌면 사람들에겐 좀 허황되게 들리는 '연예인'이란 꿈을 윤경씨는 이루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에겐 장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개성'이라고 강조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해 그가 펴낸 <조윤경의 핑크 스튜디오>엔 이런 대목이 있다.

"네가 만약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무리에 네가 섞여 있더라도, 사람들은 다시 널 봤을 때 확실하게 널 기억할 수 있어. 그게 바로 네가 가진 장애의 장점이란다. 그 점을 잊지 말거라. 너의 장애를 너의 개성으로 승화시켜야 해."

아버지의 이 가르침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쪽방에서 사회로

-어릴 적에 유복하게 살았나 봐요.
"어머니가 아래 직원 100여 명을 거느릴 정도로 유능한 보험회사 본부장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일을 안 하고 저만 돌볼 수 있었던 거죠. 초등학교도 장애인학교 중에 제일 좋은 사립학교를 다녔죠."

-중학교 역시 사립학교를 다녔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당뇨병에 걸리셨는데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을 하다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많이 악화되셨어요. 저를 돌보느라 이미 아버지는 일을 그만둔 상태에서 어머니까지 직장에 사표를 내면서 가계가 급속도로 기울었죠. 부모님은 집을 팔았고 우리 가족은 여관에서 생활하게 됐는데 그 와중에도 저를 중학교 과정의 공립 재활원에 보내셨죠."

-초등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하면서 활발하게 보냈다고 하던데 중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초등학교는 부모님이 관심도 많고 주로 잘 사는 집 애들이 다녔어요. 사립학교여서 분위기도 무척 자유로웠죠. 그런데 중학교는 영 딴판이었어요. 주중에는 기숙을 하고 주말에는 집으로 가는 건데 데리러 오지 않는 부모님이 있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매 맞고 학대받는 애들도 있었고…. 어려서부터 부모님 밑에서 위축되는 거 없이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니 충격이 컸어요. 생지옥처럼 느껴져 결국 몇 달 만에 자퇴를 하고 말았죠."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그의 아버지는 다시 일자리를 구했지만 얼마 후 그 회사마저 문을 닫게 되고 윤경씨 가족은 여관비가 밀려 여관에서도 쫓겨난다. 잠시 시골 할머니댁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온 그의 가족. 한 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세 명은 세로로 자고 한 명은 그 발밑에서 자는 생활을 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을 텐데 책에는 참 담담하게 썼더군요.
"항상 아버지가 옆에서 보호해주셔서 그런지 집에 돈이 없고 학교에 못 간다고 해서 비참하단 생각은 안 했어요. 여관이나 단칸방에 살 때도 부모님은 늘 '좀 있으면 나간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지요. 다만 엄마가 편찮으신데 내가 병간호를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죄송한 마음만 있었죠."

-계속 집에만 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온 게 교회에 다니면서부터인가요?
"집에만 5년 정도 있었더니 운동을 잘 못해서 살이 찌더라고요. 위에 두 살 많은 오빠가 한 명 있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 저를 '사육하는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충격받은 아버지가 제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다가 교회도 다니고 검정고시도 준비하게 됐죠."

비장애인과의 결혼, 편견과 행복 사이

그는 사실 비장애인과의 결혼, 중증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으로 세상에 유명해졌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KBS <인간극장> 등 방송에도 꽤 많이 나왔다. 그래서 기자도 처음엔 그가 아닌, 그의 부부를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나온 기사 등을 검색해 보니 그는 언론 등에서 '남편은 장애여성을 뒷바라지하는 희생정신이 매우 강한 훌륭한 사람, 자신은 그에게 도움만 받는 사람'으로 비춰지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극장>에서도 그는 옷 입는 것에서부터 밥 먹는 것까지 다 남편이 해줘야 한다는 것이 강조됐다. 그의 표현대로 딱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 비장애인과의 결혼으로 방송을 많이 탔는데요. 방송에서 희생적인 남편으로 그리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처음 방송을 탄 게 성금모금 방송이었어요. 남편과 같이 산 지 얼마 안돼 첫째아이가 태어났어요. 그 후 남편이 첫째랑 저를 돌보느라 일을 나갈 수가 없었죠. 처음엔 좀 모아놨던 걸로 생활비를 하다가 겨울이 됐는데 쌀도 떨어지고 집세도 내야 되고…. 당시 살던 집이 화장실을 밖으로 돌아가야 하는 단칸방이었는데 추워지니 그것도 걱정되더군요. 그러던 차에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님 교회에 다녔는데 우리 사정을 듣고 목사님이 진행하는 성금모금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런데 방송에선 남편이 일방적으로 뭘 해주고 나는 그에 대해 미안해야만 되는 걸로 계속 분위기를 몰아가더라고요. 그건 사실이 아니고 우리 삶을 단순화시키는 거니까 '장애 때문에 미안한 적은 없다'라고 대답했죠."

-방송에 나온 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일종의 '안티'죠. 제가 애물단지처럼 그려져서 그런지 '남편이 아깝다. 헤어져라. 자기가 결혼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장애인이 방송에 나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물론 얻은 것도 많아요. 방송에 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고, 또 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장애인으로만 봤는데 지금은 한 사람, '조윤경'으로 보는 시선들이 생겨서 좋아요. 무엇보다 좋은 건 그 방송 나간 후에 경증 장애여성들이 '아, 나도 결혼할 수 있겠구나'하고 용기를 가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어요. 장애여성 부모들이 그 방송보고 비장애인만 찾는다는 폐해도 있지만…. 방송 나간 걸 책임져야 하니까 인간적으로도 많이 성숙됐죠."

-결혼식 없이 동거로 시작했던데요?
"남편을 만난 건 중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가정결연을 맺어주던 어우러기라는 단체에서였죠. 누군가 이상형이 누구냐고 묻기에 마침 지나가던 남편을 가리켜 '저 정도면 된다'고 답했던 게 소문이 나서 사귀게 됐어요. 그때 남편은 머리가 길어서 묶고 다녔는데 잘 어울리더라고요. 반항적으로 보이는 것도 좋고…. 남편이 제 얘길 듣고는 사귀게 되면 결혼까지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대요. 연애하고 얼마 후에 먼저 같이 살자고 하더군요. 그땐 먹고 살기 바빠 결혼식은 생각도 못했어요."

동거는 두사람이 스물 세 살 되던 해 시작됐다. 그리고 5년 후, 이미 두 아이를 낳은 두 사람은 내일여성센터의 배려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장애로 인해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장애보다는 나이도 어리고 정식으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들어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에 그런 케이스도 별로 없어서 힘들었죠. 또 제 장애가 산소공급이 안돼 생긴 건데 배가 불러오니 움직이는 것은 물론 숨 쉬는 것도 힘들어서 아이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뇌성마비는 유전되는 게 아니라는데 첫째 지호는 윤경씨와 마찬가지로 뇌성마비로 태어났다. 사회의 편견보다도 아이가 몸 힘들어하는 게 안쓰러웠는데 지호는 네 살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식보다는 동지를 잃은 슬픔을 느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당시 두 살이던 둘째 다영이가 벌써 열 살이 됐다.

- 다영이에게 장애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나요?
"장애보다는 개성이나 다름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해요. 얼마 전에 '발이 하는 역할'을 써오라는 숙제를 갖고 왔더라고요. 친정아버지는 축구, 걷고 뛰는 것 등만 말씀하셔서 제가 발로 뜨개질도 하고 밥도 먹을 수 있다고 했죠. '밥은 왼손, 오른손으로 먹는 사람도 있고 발로 먹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가진 능력껏 하면 된다. 발이 꼭 걷기만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다'라고 얘기하면서 장애에 대해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끔 가르쳐주죠."

그 다름이 차별이 되는 사회, 윤경씨는 최근에 그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또 다른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만나러 간 지난 6월17일, 그는 서울 도봉구청 앞에서 "어제 지하도를 건너는데 너무 가팔라서 '아침에 유서나 쓰고 나올 걸, 딸 아이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고 나올걸' 이란 생각을 했다"면서 발언을 하고 있었다. 도봉푸른IL이 주최한 '도봉구 1만 장애인 이동권 안전성확보를 위한 인식개선 캠페인' 자리였다.

장애인 성에서 사회인식 개선으로

- 도봉푸른IL을 만든 이유는?
"성만 이야기하니까 한계가 있더군요. 사회인식과 편의시설,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인권의 문제까지 다 맞물려있어서 같이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원구에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나마 노원구는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좀 갖춰져 있는데 도봉구는 굴다리문제 등 개선할 여지가 많아서 도봉구에 독립생활센터를 열게 됐어요."

-도봉푸른IL의 주요사업은 뭐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인지요?
"장애인 성문제 인식 개선과 교육, 상담 등은 특화사업으로 하고 있고요. 오늘 이동권 확보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듯이 도봉구내에서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끔 하는 동료상담이나 활동보조서비스, 주택개조 사업도 할 예정이에요. 하반기엔 같은 병을 가진 장애인이 다른 장애인을 상담하는 동료상담가 양성 프로그램을 할 계획이고요."

- 사회인식과 관련해서 차별을 경험한 사례가 있다면요?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휠체어가 먼저 타야 다른 분들도 안전한데 막 자기들 먼저 타고선 제가 타려니까 한 60대 남성이 '나중에 타지'라고 그러세요. 저 혼자라면 나중에 타겠지만 만약 언어장애가 있는 분들은 무시를 당할 수 있겠다 싶어 제가 좀 강하게 '휠체어가 우선'이라고 그랬더니 '어이구, 너 잘났다'고 하세요. '이건 정당한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분이 내리면서 '병신이…' 그러더군요. 쫓아가서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왔으면서 누군 병신이고 누군 아니냐'고 막 따졌더니 도망가듯 가시더라고요.

술 취한 분들도 제일 만만한 게 장애인이에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장애인을 약하게 만들어 놓고 약자니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이 강하죠. 어제도 편의점 앞에서 술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분이 맥주 2병을 갖고 오시면서 먹으라고 하더군요. 고맙다고 했더니 제 다리를 만지는 거예요. '하지 마시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가더군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오셨던 거죠. 제가 만약 언어장애가 있거나 바로 대응을 못하는 장애였다면 계속 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 근처 은행에 갈 때마다 "보호자랑 같이 오지 않았느냐?"면서 귀찮아하던 청원경찰이 하루는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서 지갑에 넣어달라는 그의 부탁에 "입에 밥까지 떠먹여 드려야겠네요"라는 폭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은행에 찾아가다 안돼 결국 언론사 기자에게 말해서 은행장의 사과와 재발방지 계획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 현재 장애인 관련 정책은 어떤가요?
"장애수당은 장애1급에 수급자여야만 15만 원 정도 받아요.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도 별로 없고요. 개개인에게 맞는 서비스를 해주는 게 아니라 두 세 가지의 서비스를 만들어놓고 '너는 이걸 받고 너는 이걸 받아라'라고 해요. 그 두 세 가지 중에서도 장애인들이 자신에게 맞는 걸 선택할 수 없어요. 활동보조도 '너는 장애가 이 정도이니 몇 시간 받아라'는 식이에요. 내가 필요한 시간 내가 정할 수 없는 거죠. 우리 권리를 우리가 찾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던져주는 셈이죠. 사회적 합의나 정부 정책이 약자 위주로 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장애인도 포함되는 거니까요. 저 사람은 비장애인에 비해 이걸 못해가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느냐를 중심으로 정책자나 사회인식이 바뀐다면 좋겠어요."

그는 항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한 세상을 위해"란 멘트로 라디오 방송을 끝낸다. 그런 세상이 되려면 그가 강조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그는 말한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장애인은 다 나보다 낫고 외롭지도 않을거라고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비장애인한테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그렇게 안 보면 모순이잖아요. 똑같은 감정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운명이면서 사회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잖아요. 그 통합점을 어떻게 찾아내는 게 중요하죠.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으로 보는 게 중요해요. 똑같은 사람으로…."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7월호(www.laborworld.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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