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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나 건드리면 "팍" 터져요

[윤희경의 山村日記] 장맛비 속에 봉선화 연정

등록|2009.07.17 10:34 수정|2009.07.18 09:20

▲ 노랑 봉선화, 씨가 '팍' 터지는 순간이 봉선화가 배를 갈라 솔직함을 고백하는 순간이다. ⓒ 윤희경


험난한 세상을 살다보면 하잘 것 없는 일로 누명을 뒤집어쓰거나 오해를 받아 곤혹스런 일을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치욕적인 지경에 도달하면 의심이 걷잡을 없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그리스로마신화, 옛날올림포스신이 사는 궁전에 황금사과를 관리하는 요정이 있었다. 요정은 파티 때 신의 수대로 황금사과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파티에 황금사과를 준비했는데 장난기 많은 신이 황금사과 하나를 숨겼다. 화가 난 제우스는 요정을 의심해 누명을 씌우고 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야단을 쳤다. 요정은 "저는 솔직해요, 제 배를 갈라보세요." 했지만 믿지 않고 그녀를 벌판으로 내쫓아버렸다. 요정은 울부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죽어 한 송이 '봉선화'로 피어났다고 한다는데….

▲ 진분홍 봉선화, 독충류들이 가장 싫어하는 냄새를 풍긴다. ⓒ 윤희경


봉선화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몸을 갈라 터져버린다. '팍'하고 터지는 순간이 봉선화가 솔직함을 하소연하는 순간이다. 누구라도 몸을 건드리거나 손을 갖다 대면 금세 팍 터져버린다. 따라서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touch me not)'이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다. 장대비 속에서도 봉숭아가 피어나 만지면 터질 것만 같다. 땅 심에 따라 빨강, 주황, 보라, 흰색 등 다양한 빛깔로 꽃물을 터뜨린다. 꽃은 겨드랑이에서 2-3개씩 6월부터 줄기차게 피어난다. 번식력이 강해 아무데서나 피어나기 때문에 잡초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 연분홍 봉선화 ⓒ 윤희경


집주변 꽃들이 다 그렇듯 씨를 따로 받아 뿌리지 않고 꽃들이 지고나면 가을에 잡초들과 함께 뽑아 '휙' 아무데나 집어던져버린다. 그러다 봄이 되면 언제 버렸나싶게 예서제서 줄기차게 고개를 내밀고 피어난다.

예부터 어머니들은 장독대 주변에 봉선화를 즐겨 심었다. 고추장이 봉선화 때깔을 닮아 빨갛게 익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독대 앞에서 피어날 때 가장 화사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장독대 옆에 꽃망울이 붉게 물든 집을 지나칠 때면 그 집 고추장맛을 보지 않아도 입맛을 돋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잔잔한 연분홍, 누님의 미소를 닮은 모습이다. ⓒ 윤희경


봉선화는 특이한 냄새를 풍긴다. 양서류나 파충류는 고약한 냄새를 싫어해 그 근처를 얼씬거리지 못한다. '금사화(禁蛇花)'란 '뱀이 무서워 싫어한다'는 뜻이다. 시골 앞마당이나 울밑, 봉당, 장독대, 화장실, 퇴비장 옆에 봉선화들이 많은 까닭은 독충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릴 적 봉선화 꽃물 한 번 쯤 물들여 본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게도 시리고 서러운 이야기 하나 있다. 엄마와 누나는 봉숭아 꽃물을 퍽이나 좋아했다. 해마다 여름방학 때쯤이면 봉숭아를 짓이겨 백반에 섞어 잎에 싸 둘둘 말아 손톱에 물을 들이곤 했다. 그리곤 어린애처럼 좋아라고 했다.

▲ 보라색 봉선화, 귀족냄새가 풍겨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다. ⓒ 윤희경


이제까지 살며 연분홍 꽃물이 곱게 물든, 좀 갸름하고 가냘파보였던 엄마와 누나의 손처럼 아름다운 손톱 끝을 본 적이 없다. 여름이 다가도록 손톱 끝 꽃물을 매만지며 '첫눈이 내리는 날까지 물이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꽃신이 소원을 들어준다.'며 하얀 손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 내 어린 손끝에도 봉숭아물을 들여 주며 '어쩜, 네 손은 이리도 못생겼단 말이냐, 넌 예쁜 색시 만나긴 다 틀린가 보다.'라 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건만 못생겼다던 그 한마디가 아직도 어제처럼 환청 되어 귓밥을 맴돈다. 

"아저씨, 나 건드리면 톡 터져요." 해보지만 봉선화가 바라는 진심은 반대다.  봉선화는 살짝 건드려야 '팍'하고 종자를 번식하기 때문이다. '건드리지 말라고?' '아휴, 저 내숭, 난 네 맘 다 알아.'하고 꿀밤을 한대 먹여 본다. 아직 씨가 터지자면 한참 더 있어야겠기에 그냥 심심해 장난을 한 번 쳐봤을 뿐이다.

▲ 흰색 봉선화, 무더운 여름을 시리게 저려오는 애상적인 모습이다. ⓒ 윤희경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다. 또 며칠 더 내리겠다는 예보다. 이젠 방구석에서만 어정거리기에도 짜증스럽고 답답하다. 봉숭아 꽃물이나 물들여 볼까하다 그만 멈칫거린다. 나이가 얼마인 데 주책이다 싶어서다. 그리고 내 손톱 끝에다 꽃물을 들이기엔 너무 찌들어버렸다.

봉선화(鳳仙花), 봉황을 닮았다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활짝 핀 꽃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모습이 '鳳'자와 비슷하게 닮은꼴이다. 그러나 봉자와는 전혀 다른 주부습진, 설사, 해독작용에 효험이 크다 하니 한 번 시험해 볼일이다.

장대비가 또 쏟아지고 있다. 누가 어정칠월이라 했던가. 농부에겐 좀 한가한 시간이다. 오랜만에 봉선화와 대화를 나누며 '울밑에선 봉선화'나 웅얼거려 볼까, 아니면 '톡하면 터질 것만 같은 그대'를 되 뇌이며 첫사랑이나 떠 올려 볼까하는데... 별안간 천둥소리 요란하게 오막살이를 뒤흔들며 앞산을 넘어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윤희경 산촌일기'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상류를 방문하면 시골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윤희경 기자(011-9158-8658)는 지난 4월에 산촌일기 포토에세이 '그리운 것들은 山 밑에 있다.'를 펴낸 바 있습니다. 유명서점과 인터넷 판매중이며, 지은이와의 직접 연락해도 배송이 가능합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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