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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이기는 납량여행, 공동 묘지 순례

[중국 산동성 여행 ④] 공자님의 고향 곡부에서

등록|2009.07.21 13:37 수정|2009.07.21 13:37

▲ 공자님과 그 후손들의 가족묘역인 공림 입구 ⓒ 김혜원


공부(孔府)에서 북쪽으로 약 1.5km거리에 위치한 공림은 총 면적이 약 30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가족묘지이며 13만 개의 크고 작은 묘와 3600여 개의 묘비, 40여 개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공묘(孔廟), 공부와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공부 후문에서 택시를 타고 공림 입구에 이르니 지성림(至成門)이라는 입구 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걸어 갈 수도 있지만 워낙 방대한 규모의 묘지군이라 자칫 길을 잃을 우려도 있어 초행자라면 공림 내를 운행하는 20위안짜리 관람용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지요.

공림의 첫 문인 지성문(至成門)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두 번째 문인 이림문(二林門)까지 이르는 길은 수령이 오래된 측백나무가 길게 심어져 있는데 길 우측에는 공자가 세상을 떠 날 당시 나이를 상징하는 73그루가, 좌측에는 공자의 제자를 의미하는 72그루가 심어져 있습니다.

다소 불경하지만 제 눈에는 공자님과 그의 제자들이 길 양옆에 도열해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보였답니다.

이림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공씨가문 후손들의 묘지순례투어가 시작됩니다. 더운 여름날 공동묘지 순례라니 납량특집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좋은 코스가 없겠죠.

▲ 30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공림 묘역 ⓒ 김혜원


공림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가족묘지 군인 것은 분명하지만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한때는 황제의 일가와 맞먹을 정도의 호사를 누리고 살았던 공씨 가문 후손의 무덤들이 우리나라 산과 들에 버려진 무연고자들의 무덤들처럼 벌초도 하지 않은 채 고목들 사이에서 쑥대밭을 이루며 방치되고 있는 때문이지요.

비석조차 세우지 못한 무덤이 허다하고 떼를 입히지 못해 봉문마저 무너져 붉은 흙더미가 되어 버린 무덤도 쉽게 눈에 띕니다. 무덤을 뚫고 자라난 나무들이 비석을 대신한 곳도 적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매장을 법으로 금지하는 중국의 장묘 문화 안에서는 그나마 매장의 형태만을 유지하게 허용하는 것도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랍니다. 

환경이 이렇다보니 한 여름 화창한 대낮에도 월하의 공동묘지 못지않은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어디선가 봉두난발을 한 귀신들이 튀어나올 듯 더위를 잊기에는 그만이었답니다.  

공자 사후 공자의 제자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100여 종의 나무 10여만 그루가 우거져 무덤이라기보다는 수목원에 가깝게 보이는 공림. 정글처럼 우거진 수림과 무덤들을 지나니 푸른 현판이 걸린 아담한 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묘비조차 없는 다른 무덤과는 달리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에 황금색 글씨가 쓰여진 현판까지 달고 있는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 공씨가문의 며느리였던 건륭황제의 딸 위씨의 묘지 ⓒ 김혜원


이 묘는 공림에 있는 13만 개의 묘 중 유일한 여성의 묘로 공씨가문 72대 손인 공헌배의 아내이며 건륭황제의 딸인 우씨의 묘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 건륭황제의 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지만 공씨가문의 남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가족묘역에 그녀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공씨가문과 건륭황제의 특별한 관계와 건륭황제에 대한 예우를 생각해서 내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고 하네요.

공주의 묘지를 지난 셔틀버스는 마침내 공자님 무덤 입구 대문에 해당하는 수수교(洙水橋)앞에 우리를 내려놓습니다. 이제부터는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서 공자님의 무덤까지 가야합니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수수교를 건너니 전설의 동물이라는 두 마리의 조천후(朝天吼)와 문관무관의 형상을 한 거대한 석물이 무덤의 안위를 지키고 있어 드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 합니다.  

붉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공자묘역의 작은 문에 들어서니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묘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집필하였으며 맹자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죠.

자사의 묘 뒤 우측으로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의 묘가 있습니다. 공리(孔鯉)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아쉽게도 특별한 업적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 공자묘 앞을 지키고 있는 석물들 ⓒ 김혜원


아들 공리의 묘 곁에 공자의 묘가 있는데 아들의 손을 잡고 손자를 안고 있는 형태로 묘지의 위치에서도 부자, 조손간의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 보니 정말 할아버지로서의 공자, 아버지로서의 공자의 따뜻한 모습이 상상되겠지요.

공자묘의 좌측엔 공자 사후 3년 시묘살이를 했던 대부분의 제자들과는 달리 6년간이나 스승의 묘를 떠나지 않고 시묘살이를 했다는 자공을 기리는 자공여막처도 있어 공자를 향한 제자들의 한없는 존경을 실감케 합니다.

공자묘의 비석은 모두 2개로 각각 원나라 때와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이라는데 공묘나 공부에서 본 화려한 건축물들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나마도 문화혁명 시기에 성난 홍위병들이 몰려와 마구 부숴놓은 터라 시멘트로 여기저기 이어 붙인 상처가 눈에 띄어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사후 25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이 선택한 땅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는 물론 제자와 일가 후손들까지 거느리며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후학들의 참배를 받고 있으니 한 때의 오욕이 있었던들 행복한 분임이 틀림없겠지요.

▲ 공자의 묘비.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 왕(王)자를 길게 늘여 써 간(干)자처럼 보이게 한 것은 공자를 왕으로 칭한 것에 대해 황제의 노여움을 살것이 두려워서 였다는 후문. ⓒ 김혜원


공자님의 무수한 업적이며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남존여비,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여성들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삶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수천 년간 봉건적 관습과 유교사상에 얽매어 희생적 삶을 강요당해야 했던 여성들의 한을 알기나 할까요?

하지만 공자님이 돌아가신 후 2500여 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공자님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공자가문 최초로 여성 후손도 족보에 등재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뉴스가 바로 그것이지요.

지난해 미국의 유명 다큐멘터리 제작사는 공림에 자신의 묘역을 얻어내기 위해 종중과 정부를 상대로 다각적인 노력을 한 공씨 가문의 여성을 조명했습니다. 그녀는 어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묘역을 얻어내는데 성공했고 그녀와 함께 했던 푸른 눈의 리포터도 그녀와 함께 감격을 나누었습니다.   

공씨가문 후손이라는 가이드 아저씨에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며 당황한 듯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겠지요.

재차 확인을 하니 그녀 이후 공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고 털어 놓습니다. 여성 후손이라도 가문을 빛냈거나 업적이 뚜렷한 경우 공림에 묻힐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반가운 것은 현 곡부시의 고위 공무원이라는 공씨 가문의 한 여성 역시 생존해 있지만 자신이 사후에 묻히게 될 공림의 묘역 한 자리를 종중으로부터 얻어냈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가이드 아저씨의 표정은 뭔가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는 듯  찜찜해 보였지만 공림을 함께 돌아보았던 두 명의 중국인 여성과 저는 환호성을 질렀답니다.

"찌아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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