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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 '조봉암 바람'이 분다

두 진보정당, 29일 토론회 개최... 여야 의원 공동성명 발표 예정

등록|2009.07.29 20:22 수정|2009.07.29 20:22

▲ 죽산 조봉암 선생 ⓒ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됐다.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한 지 5개월 만에 취해진 신속한 조치였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박노자) 혹은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한 현실적 이상주의자'(박명림)라는 평가를 받았던 한 진보정치인은 이렇게 사라졌다. 훗날 역사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사법살인'이라고 불렀다.

조봉암은 이런 인상적인 유언을 남겼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을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대통령주의자라는 얘기 들을 정도로 다른 세력에 신뢰 못 받아"

오는 31일은 조봉암이 사법살인으로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서거 50주년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조봉암의 사상과 노선을 재조명하는 행사가 잇달아 열렸다. 

29일에는 민주노동당(새세상연구소)과 진보신당(미래상상연구소)이 각각 '21세기 진보정치와 죽산 조봉암의 재조명'과 '죽산 조봉암과 21세기 진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민주노동당 주최 토론회에서 유재일 교수(대전대 정치학과)는 "죽산은 의회주의에 기반한 정당정치를 통해 진보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진보주의자"라며 "특히 분배와 복지만 강조한 게 아니라 성장문제로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죽산이 다른 진보주의와 다른 점은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고, 열린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북한에도 포용적이었지만 미국의 현실적 영향력을 인정할 줄 알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날 토론회에서는 일방적인 추모 분위기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으로 조봉암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봉암과 진보당>(1995년)을 펴낸 박태균 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 현대사)는 "지금 시대가 조봉암을 다시 조명하도록 한다"고 말한 뒤 "긍정적 활동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박 교수는 "죽산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족주의의 사상을 가진 중간파주의"라며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차이점이라면 죽산이 민족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점"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어느 누구도 초지일관 자기사상을 지킨 사람은 없다"며 "죽산도 식민지 시절 공산주의자였다가 시대가 바뀌자 그의 사상도 변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그 유연성 때문에 위기 극복이 가능했다"며 "다만 그의 변화가 원칙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시기에 맞게 자기 사상과 노선을 변화시켜 나갔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박 교수는 "부정적 부분도 적지 않다"고 운을 뗀 뒤, "대동단결을 외치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다른 진보진영에서 죽산을 대통령주의자라고 얘기할 정도로 다른 세력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지금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소통을 하기 위해선 진정성이 중요하다"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탁월한 좌파 현실정치인으로 성장했나에 주목해야"

▲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에서 주최한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토론회. ⓒ 진보신당


진보정당 주최 토론회에서는 진보정당사를 연구하거나 <죽산 조봉암 전집> 발간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발제자와 토론자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발제를 맡은 조현연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은 "한국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조봉암만큼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조봉암은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키웠고 정당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당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조 의장은 자발적 당원이 수천 명이 넘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조봉암은 기존 정당의 가장 큰 문제점이 대중과의 유리라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당이 대중조직과 결합하지 못한 것은 중대함 결함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조 의장은 '좋은 정당 없이 좋은 정치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민주적 책임성을 거부한 질 나쁜 정치의 지속이야말로 한국정치의 비극적 현실이며 위기의 실체라는 점에서 변화의 출발은 정당정치의 지형을 바꾸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석준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21세기 진보의 재구성에 나선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조봉암이 어떻게 탁월한 좌파 현실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라며 "조봉암이 항상 대중정치의 차원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며 실천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남한사회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조금이라도 대중정치 공간이 열리면 여기에서 대중을 만나고 대중으로부터 심판받으며 그를 통해 단련되고자 했다. 제헌의회 선거에 뛰어들고,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 게 다 그런 투신의 감행이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라는 혹독한 시험장에서 대중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봉암이 단순히 상황의 지대를 찾아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좋은 정치 리더십'으로 제련하기 위해 분투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의 재구성 과정에서 조봉암으로부터 배워야 할 핵심 덕목이 아닌가 한다."

특히 장 실장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국제정치에 대한 조봉암의 안목에 근거한 것"이라며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당시 반둥회의(1955년)를 통해 구심점을 얻은 비동맹운동의 시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는데 반둥정신으로부터 한반도의 평화적 재편 가능성을 예감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장 실장은 "이 점에서 진보당 강령이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도 등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실험에 주목한 데 눈길이 간다"며 "이것은 생전의 여운형이 인도의 네루에게 주목했던 것과 잇닿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장 실장은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이나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나 모두 이렇게 국제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에 바탕한 것"이라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톱니바퀴에 압살 되지 않을 자유의 공간을 탐색하려는 이 안목은 이승만·김일성과 비교되는 대목일 뿐만 아니라 김구나 박헌영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 시작에 앞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조봉암은 독립성을 견지하고 현실성을 추구한 최초의 좌파 현실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노 대표는 "조선공산당의 소련 편향을 거부하고 박헌영과 결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독립성, 우든 좌든 극단과는 끊임없는 긴장을 추구한 점은 오늘날에도 의미있게 다가온다"며 "민족주의를 추구했지만 민족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80년대 이후 다시 시작된 진보정치운동이 50년대 조봉암이 이룬 성과를 뛰어넘지 못했다"며 "단순히 (사법살인의) 피해자 조봉암을 넘어서 그가 추구한 정신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야, 보수·진보 넘어 '조봉암 명예회복' 성명 발표

한편, 30일에는 여야 국회의원 127명과 사회 원로 18명이 모여 조봉암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날 성명서 발표를 주도하고 있는 원혜영(민주당)·박상은(한나라당) 의원 측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지 50주기를 맞이해 죽산 선생과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법원의 신속한 재심 개시결정을 청원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여야 의원 127명은 물론이고, 이만섭·김원기 전 국회의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 남재희 전 장관, 백낙청·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등이 참석한다.

지난 1991년 DJ·YS·JP 등 여야 의원 86명이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과 '사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여야 대립으로 인해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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