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바람 풍겨 좋은 어느 여름날

[윤희경의 山村日記] 부채 선물

등록|2009.07.30 16:35 수정|2009.07.30 16:35

▲ 보기만해도 시원한 범부채 잎, 부챗살을 쏙 빼닮았습니다. ⓒ 윤희경




부채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란 뜻으로 오래 전부터 여름 더위를 식혀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가하고 품위가 높은 사람은 접부채와 쥘부채를, 가난한 촌부들은 둥근 부채(방구 부채)를 사용해왔습니다. 지금도 올림픽이나 국가 주요행사 때에 태극선을 한국의 이미지와 홍보용으로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 노랑 범부채의 꽃망울 ⓒ 윤희경



며칠 전에 부산에 사는 여성 독자 한 분께서 접부채 한 점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나의 글을 읽은 고마운 보답으로 부채를 선물한다며, '올 여름 내내 더위 타지 말고 건강하게 잘 보내라'는 인사말도 곁들여 잔잔한 바람을 한 아름 안겨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감명 깊은 것은 부챗살에 그려진 동양란 한 폭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한지공예와 서예를 습작중이라며 손수 만든 작품이니 보내는 마음과 정성만 받으라 합니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단순한 여백미와 붓끝 놀림이 끊이지 않고 단숨에 휙휙 스쳐간 자리마다 잔잔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부챗살 바람이 일 때마다 농사에 찌든 가슴을 시원스레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 얼룩 범부채의 꽃, 꽃잎이 6장, 범의 얼룩무늬를 그대로 닮아... ⓒ 윤희경



하루에도 몇 번씩 대나무 부채 살을 폈다 접었다 합니다. 그 때마다 한지에서 우러나는 맑고 하얀 창호지 빛깔과 난초에서 풍겨내는 고풍스런 멋과 수수한 바람기가 일어 아늑하고 시원한 청량감이 마음가득 안겨옵니다.

단순한 주제와 간결한 구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표현, 산뜻하면서도 한국의 멋을 그대로 나타내는 색감 등이 나를 떨리게 만듭니다. 아름다운 한 여인의 손끝에서 만들어낸 부챗살마다에서 느끼는 행복감, 이리 바람 호사(豪奢)를 부려도 괜찮은 건지 공연한 걱정을 자꾸만 해봅니다.

▲ 혼색 범부채 꽃 ⓒ 윤희경



부채에도 쓰임새에 따라 많은 덕을 가지고 있다 전해오고 있습니다. 바람을 일으키고 파리와 모기를 쫓아내며 음식물이나 귀중품의 덮개와 햇빛가리개, 불 피울 때 바람을 일으켜 불사르기, 깔개, 쓰레받기, 여인들의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똬리 등… 이를 부채의 팔덕선(八德扇)이라 합니다. 그러나 정성스레 만든 부채로 깔개나 쓰레받기로 사용하다니 좀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 독자가 보내온 부채 ⓒ 윤희경



날씨가 더우면 호랑이도 부채질을 하나 봅니다. 들꽃 중에도 '범 부채'라는 아름다운 야생화가 있습니다. 갈라진 가지마다에서 꽃이 피는데 꽃잎이 여섯 장입니다. 알록달록한 주홍색과 오렌지색 바탕에 짙은 반점, 꽃잎무늬가 범의 얼룩무늬 그대로이고, 잎새는 부채 모양을 쏙 빼닮았습니다. 꽃무늬와  잎새가 합쳐 범 부채가 되었답니다.

▲ 노랑 범부채 ⓒ 윤희경



옛날 범이 가시덤불에 걸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다 꽃을 깔고 문지르는 바람에 꽃이 납작해지고 꽃잎에 피가 묻어 오늘날의 얼룩무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Leopard flower(범백합)이라고도 하고, 꽃물이 나비모양을 닮아 나비 꽃, 호접화란 별명도 갖고 있습니다.

▲ 범부채 꽃밭 ⓒ 윤희경



오늘도 한낮 더위가 만만치 않습니다. 더욱이 이 곳 춘천은 32˚C, 전국에서도 가장 무더운 찜통더위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땀방울이 등짝을 타고 내려옵니다. 농사일은 아예 애시당초 글렀고 오막살이에 목침이나 베고 누워 이름 모를 독자가 보내준 부챗살의 담긴 손끝 정성과 마음속 노고를 떠올리며 후텁지근한 삼복더위를 넘어가야할까 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