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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린 것이 그 추운 날 얼마나 힘들었을까?

[두 바퀴에 싣고 온 이야기보따리 71] 효자 정재수가 오르다 숨진 마루목재에서

등록|2009.07.30 19:51 수정|2009.07.31 10:15

효자 정재수의 무덤어릴 적, 아버지한테 들었던 이야기 속의 주인공, 효자 정재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갔습니다.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고갯마루를 몇 개나 넘었던가? 구미에서 상주시를 거쳐 충북 옥천군, 보은군, 또 다시 경북 상주시 화서면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목마다 얼마나 뜻 깊은 걸음 걸음이었는지 모릅니다.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 손현희


"어! 자기야 이 이야기는 나도 아는 얘긴데? 나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줬던 얘기거든, 그때 아버지가 나중에 책까지 사가지고 오셔서 이 이야기를 읽기도 했었어.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듣고 또 책으로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아~ 그런데 이 사람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았었구나."

"그랬구나. 옛날에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하던데, 난 기억이 안 난다. 살아 있다면 우리보다 네 살 많으니까 아마도 나중에 책에 실렸나 보다. 그나저나 우리 이번에 여기 한 번 가볼까? 꽤 뜻 깊은 일이지 싶은데."

"그래그래. 그러자! 정재수가 갔던 그 길을 따라서 한 번 가보자!"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줬던 옛날이야기 속 주인공을 찾아서

며칠 앞서 남편이 느닷없이 '효자 정재수'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어요. 다른 말은 해주지도 않고 무턱대고 찾아서 한 번 읽어보라는 거예요. 그저 가슴이 뭉클하다는 말과 함께…. 남편이 시키는 대로 검색창에서 '정재수' 이름 석 자를 치니까 백과사전에 실린 글이 가장 먼저 눈에 띄더군요.

그 글을 읽자마자 무릎을 탁 치고 말았어요. 그랬어요.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펑펑 목 놓아 울던 생각이 떠올랐답니다. 그때 병치레가 잦았던 아버지 걱정에 어린 마음에 혹시라도 아버지가 죽을까 몹시 걱정하면서,

"아빠! 아빠는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알았지?"

하면서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서럽게 울기도 했었지요. 그랬어요. 뜻밖에 알게 된 '효자 정재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잘 알고 있던 것이라 그러기도 했지만 10살 어린 나이로 추운 겨울 눈 속에서 아버지를 살리려다 숨지고 만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 책에 나오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보다 네 살 위이고 실제로 가까운 상주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저며 왔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린 이틀 동안 계획을 잡고 길을 떠납니다. 오로지 정재수가 넘어가던 고갯길을 따라 그 발자취를 밟아보고자 했던 거였어요.

10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숨진 정재수 어린이

효자 정재수 어린이상정재수 기념관 마당 앞에는 어린 효자 '정재수 어린이상'을 세웠습니다. 이 동상을 가만히 보면 어린 재수의 품에 닭 한 마리가 들려 있습니다. 설날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와 함께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다가 큰집을 코앞에 두고 마루목재를 미처 넘어가지 못한 채, 얼어서 숨지고 말았답니다. ⓒ 손현희

내가 어릴 적, 이야기로 들었을 때나 책으로 읽었을 땐, 그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10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온통 눈 밭 뿐인 고갯길을 넘어가다가 추워서 얼어 죽은 이야기는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요.

1974년 설을 하루 앞둔 1월22일이었어요.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에 살던 재수는 아버지와 함께 명절을 쇠러 큰아버지 댁이 있는 충북 옥천군 법화리로 가던 길이었어요. 차례 지낼 때 쓸 닭 한 마리를 싸들고 가는 길은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에서 고개를 넘고 또 다시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를 지나 옥천군 법화리 마루목재라는 고개를 넘어가야 하지요(모두 12km).

앞날 쌓인 눈 때문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좁은 산길을 헤치며 가는 길이 어린 재수한테는 얼마나 힘든 길이었을까? 그리고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던 아버지가 그만 큰댁을 2km 앞두고 쓰러지는 걸 보고 어린 재수가 자기 웃옷을 벗어 덮어주며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몸으로 아버지 몸을 비비며 살리려고 했지만 끝내 함께 얼어 죽고 말았답니다. 뒷날 이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알려져 그 갸륵한 마음씨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는 이야기였어요.

어린 재수가 넘던 고갯길을 거꾸로 넘어가다

팔음산 아래 첫 마을 평산리벌써 산을 몇 개를 넘어왔는데, 또 다시 용바우 고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갑니다. 날씨도 덥고 힘들지만, 이렇게 꼭대기에 올라와서 내려다보는 풍경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잊는답니다. ⓒ 손현희

우린 다음날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까지 가늠하여 재수가 오르던 고갯길을 거꾸로 넘어가기로 합니다. 구미에서 새벽에 길을 떠나 90km쯤 쉼 없이 달려왔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덥지 않아 그나마 힘이 덜 들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그곳까지 닿는 것만 해도 참으로 빠듯하였답니다. 효자고개를 지나 재수가 어릴 적 살던 마을인 소곡리(배실마을)까지 가서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있는 '효자 정재수 기념관'까지 가야했기에 자칫하면 관람시간을 놓칠 수도 있어 마음이 초조했답니다. 게다가 오는 길에 길까지 잃어서 많이 힘들어했지요.

팔음산(760m)을 끼고 돌아가는 큰곡재(용바우고개)로 올라가는 길부터는 해가 얼마나 따갑게 내리쬐는지 숨이 턱턱 막히더군요. 이 고개를 넘어가 '명티리'라는 마을에서 또 다시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까지 고개를 넘어가야 만이 어린 재수가 아버지와 함께 숨졌던 마루목재가 나온답니다. 지금은 이 고개를 '효자고개'라고 한답니다.

복우실 마을어린 재수의 큰아버지가 사는 복우실 마을, 우린 처음에 법화리가 큰집인 줄 알았다. 콩밭 매던 할머니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것이다. 우린 안타깝게도 그 마을을 거쳐 지나쳐오기만 했다. ⓒ 손현희

'복우실'이란 마을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용바우 고개를 오를 때 그렇게나 뜨겁게 내리쬐던 해는 온데 간데없고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어요. 잠깐이라도 비를 피해 가야 했지요. 복우실 마을 어느 집 앞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저녁이 될 때쯤, 퍽이나 남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마루목재를 넘어가는 길에는 새로 깔은 듯 아스팔트가 검게 깔려 있었어요. 온통 산과 들판, 그리고 몇 집 안 되어 뵈는 조용한 산골마을인 법화리 풍경도 퍽이나 고즈넉합니다.

"자기야! 저기인가 봐! 저기 알림판 같은 게 서있는데?"

"아 그런 가보다. 어서 가보자!"

정재수의 무덤을 찾은 줄 알고 기뻐 소리치는데,

"누구여? 어딜 가는겨?"

길 가 콩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펴며 우리를 보고 말을 건넵니다. 키가 자란 콩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미처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지요. 할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정재수가 가려고 했던 큰집이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글쎄 우리가 지나온 '복우실' 마을이라는 거였어요.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마을을 지나쳐 왔던 게지요.

복우실 마을을 벗어나 고갯마루에서이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저 건너 충북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랍니다. 바로 저 마을에서 효자고개는 시작됩니다. ⓒ 손현희



어린 재수와 함께 울어준 건 추운 겨울 밤하늘에 별들 뿐

이윽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효자고개'라는 걸 알리는 알림판이 보였어요. 찬찬히 그 글귀를 읽어 내려가다가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새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어린 재수가 이 고개에서 숨지게 된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인데, 그 글이 어찌나 가슴 아프고 슬프든지 한동안 말없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아야 했어요.

"눈길을 헤쳐 나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지시자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덮어드리고 꼭 껴안아 녹여드렸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하셨으며 재수군 마저 아버지를 껴안은 채 숨을 거두었으니 그의 뺨에 얼어붙은 눈물을 내려다보며 운 것은 새파랗게 질린 겨울하늘의 별들 뿐 이었습니다."

이 글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었지만(나중에 알고 보니, 김진태 선생이 쓴 글이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먹먹했어요. 어느 글에서는 재수가 죽던 그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의 주검을 봤을 때 그 둘레에 발을 동동 굴렀던 작은 발자국이 여러 개 있었던 걸 보기도 했답니다. 그 추운 겨울밤에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어두운 밤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 죽어가는 어린 재수를 본 것은 새파랗게 질린 겨울하늘의 별들 뿐 이었다는 그 글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 몰라요.

효자고개 고갯마루에서지금 이곳은 새길이 나 있어요. 훤히 뚫린 길이지만, 그 옛날 재수가 넘어가던 고갯길은 아주 좁은 오솔길이었답니다. 그것도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그런 험한 길이었지요.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어요. 가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깃든 이 마루목재(효자고개)에서 남편도 나도 말 없이 한참 동안 슬프게 울었습니다. ⓒ 손현희


"아,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어가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을까?"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온통 산과 들 뿐인데 그 캄캄한 밤에 울면서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제 옷까지 벗어서 덮어주고 어지간하면 저 혼자라도 마을로 뛰어 내려왔을 텐데 말이야. 진짜 가슴 아프다."

마루목재 고갯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법화리 쪽과는 달리, 새로 길을 내느라고 자갈만 깔려 있었어요. 그리고 저기 아래로 무덤 같은 게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효자 정재수의 무덤이었어요. 죽으면서도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자기 몸을 비벼 끌어안은 채로 숨진 재수의 아름다운 효심을 널리 알리며 기리려고 이들이 숨진 그 자리에다가 곱게 묻어주었던 거였어요. 그리고 지금은 이 고갯길을 넓혀 아름다운 마음씨를 더욱 널리 알리려는 듯했어요.

무덤 앞에서 남편도 나도 한참 동안 아무런 말없이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 고갯마루만 넘으면 마을이 나오고 또 가려고 했던 큰아버지집이 코앞에 있었는데, 그 고개를 넘지 못해서 안타깝게 숨진 어린 재수와 아버지, 우리 부부도 함께 그 추운 날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던 그 길목에 서서 어린 재수가 되어 함께 느꼈습니다. 그리고 함께 울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도 눈물과 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마을로 들어섭니다. 여기에서 다시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넘어 재수가 살던 마을인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배실마을)로 힘든 고갯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효자고개지금 한창 새길을 닦고 있는 터라, '효자고개'라고 쓴 돌판이 한쪽 곁에 따로 놓았어요. 아마도 이 길이 모두 닦이면 이 마루목재를 오르내리는 많은 이들이 10살난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숨져간 효자 정재수의 이름을 기억하겠지요? ⓒ 손현희

덧붙이는 글 마루목재에서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로 넘어가 정재수 기념관까지 간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A title=http://www.eyepoem.com/ href="http://www.eyepoem.com/" target=_blank>뒷 이야기, 자전거 길 안내와 더욱 많은 사진은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http://www.eyepoem.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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