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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하면 '나쁨'?

'교과서 대여제', 졸속 추진에 학교만 곤혹스러워

등록|2009.07.31 15:05 수정|2009.07.31 15:05
학교에 갔다가 2학기 학습준비물 신청하려고 1학년 교과서를 집에 가져왔습니다. 다른 학년은 방학 전에 교과서를 나눠주었지만, 1, 2학년은 새교육과정에 따라 만드느라 늦어져 얼마 전에야 학교로 왔습니다.

2학년인 아이가 먼저 뒤적이다가 놀랍니다.

"엄마, 이름 쓰는 데가 없어."
"어, 없어? 안에 찾아봐."

▲ 2학기 교과서에는 개인이름 쓰는 란이 없어진 대신 교과서물려주기 기록표가 새로 생겼습니다. 맨 오른쪽에 교과서 상태에 따라 매우 좋음, 좋음, 나쁨을 표기해야 합니다. 그 동안은 아래처럼 교과서 맨 뒤에 이름쓰는 칸이 있었습니다. ⓒ 신은희


늘 책 뒤쪽에 있던 이름쓰는 곳이 없어진 이유는 교과부에서 올해부터 시범운영하는 교과서대여제 때문입니다.

뜻은 좋은 교과서 대여제
              
교과서대여제 추진계획안
□ 초중학교에서의 교과서 소유개념 전환(교과서 대여제)
◦ 앞으로의 교과서 소유개념
   - 초중학교에서는 원칙적으로 교과서는 교육청(학교) 소유로서, 학생들은 해당 학년동안 학교로부터 빌려 쓴 후 반납

□ 기대효과
◦ 예산 절감은 물론, 검약 생활 교육 강화 및 저탄소 녹색성장에 기여
◦ 교과서 질 제고를 위한 가격상승 부담 절감
                                                                                - 교과부 교과서 기획과(5월 18일)

교과부는 앞으로 교과서를 참고서가 필요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좋게 만들어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려면 무상지급할 예산이 부족하고 환경문제도 고려하여 교육청 소유로 외국처럼 몇 년씩 쓰고 돌려받겠다고 합니다.

▲ 교과부에서는 올해 2학기부터 바로 교과서대여제를 추진하여 2012년에 완성하겠다고 합니다. 교육과정이 바뀌는 중이라 실제 계획과는 차질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는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 신은희


좋습니다. 최근 책의 질이 점점 좋아지는데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솔직히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환경 차원에서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지금 바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공부시키지 말라는 건가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책과 공책을 따로 썼습니다. 지금 교과서는 학습 내용만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책에다 쓰게 되어있습니다. 보조 교과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활용을 하자면 아이들에게 빈 칸에 손대지 말고 공책에 그걸 따로 쓰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면 교사가 복사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 1-2 쓰기 교과서입니다. 이처럼 현재 교과서들은 모든 교과서가 학생들이 직접 책에 학습내용을 쓰게 되어있습니다. ⓒ 신은희


게다가 올해 처음 적용된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만든 교과서 뒤에 달린 부록의 양이 전에는 수학에 주사위나 숫자카드 정도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1, 2 학년 모든 교과서에 학습자료가 있습니다.

▲ 1학년 2학기 교과서 뒤에 붙어있는 부록입니다. 적게는 4장부터 11장이나 됩니다. 이 부록을 떼내고 나면 부피도 줄어들고 재활용은 불가능합니다. ⓒ 신은희


초등학교 교육 내용이 주로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보고 활동하는 내용이 많은데 교사와 학부모 부담을 줄이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교과서 뒤에 부록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부록 종류도 다양해져서 편지지, 인형극, 말판, 상장, 쪽지, 붙임딱지(스티커)로 다양해졌습니다. 이건 올해 떼어서 쓰고 나면 다음 해부터는 절대 쓸 수가 없습니다.

내년에 쓸 4학년 국어교과서는 반 정도가 부록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20% 재활용하라니 20% 학생들은 구경만 하라는 건가요? 2012년에는 50%로 늘린다니 반 수는 놀리라는 건가요? 대체 이 정책을 만든 분들이 초등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훑어보기나 한 건지 궁금합니다.

▲ 부록에 달린 편지지 자료 ⓒ 신은희


아이들은 많은데 검사도 못하게 한다고?

교과서는 수업시간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교육환경은 보조교사 한 명 없이 한 교사가 3-40명의 학습활동을 두루두루 지도해야 합니다. 40분마다 수업내용이 달라지는데 이걸 시간 안에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책을 걷어 하교후에 수학 채점도 하고 글쓰기 수정할 것도 표시해주고 다음 날 다시 돌려줍니다.

이제 대여제 때문에 학생들 이름 한 번씩 찾는 것도 손이 몇 번 가고 책에 직접 써주지도 말아야 할 상황입니다. 도장 찍고 사인하는 건 당연히 해서도 안되구요. 수업내용은 날로 어려워지는데 교사가 다인수 학급에서 유일한 확인 방법까지 빼앗겨야 하는 건가요?

열심히 공부하면 "나쁨"?

교과서를 성전처럼 여기고 전국에서 똑같은 교과서를 쓰는 마당에 교과서 대여제만 하는게 대수냐는 문제제기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과부가 이건 교사연수, 학부모 연수를 통해 해결하겠다니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교과서 체제라도 바꿔놓고 나서 대여제를 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으면 교사나 아이들이나 괜히 죄책감에 시달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쓰고 나면 다시는 못쓰는 줄 아는 5줄 이름칸 위에 이름을 쓰고 교과서 상태는 "나쁨"이라고 해야 합니다. 전국 모든 아이들이 교과서를 나쁘게 썼다는 죄책감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교사는 20% 골라 내라니 불가능인줄 알면서 걷어놓을 수는 없고 서류에만 걷었다고 해야 하나요?

자꾸 실적을 강요하면 학교마다 서류는 재활용이라 하고 몰래 책을 사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많은 학교들이 현재 교과서로 재활용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예산절감과 환경문제를 고민한 교과부라면 막무가내 실시보다 오히려 교과서 내부 문제를 개선하는 데로 눈을 돌렸어야 합니다.

환경오염 코팅표지부터 바꿔야

2006년부터인가 교과서 겉표지가 번들번들한 코팅 종이로 되고 속종이도 너무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교과서가 무거워지고 책을 걷어놔도 미끄러져서 현장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올해 나온 교과서는 연필만 아니라 볼펜으로도 이름이 안 써지는 재질입니다.
교과서마다 달린 부록도 형태를 달리해 교사에게 제공해서 수업시간에 필요한 만큼 활용하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책이 무거워질 필요도 없습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닐붙임딱지같은 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실험본 검토과정에서 문제제기했지만 이런 건 오히려 바뀌지 않았습니다.

▲ 부록에 달린 붙임딱지인데 종이가 아니라 비닐로 되어있습니다. 1학년 책에만 이런 비닐종이가 7장이나 있습니다. 이런 건 재활용도 불가능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화학성분이라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줍니다. ⓒ 신은희


그래도 아이들이 직접 써야 하는 부분은 교과서틀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이니 쉽지 않습니다. 교사들은 수업효용을 높이려면 교과서 대여 이전에 교과서 재질을 재활용종이로 쓴다거나 해서 가격을 낮추는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일제고사에 160억 낭비하느니 아이들에게 책이라도 편하게 주면 어떠냐 합니다. 게다가 지금 미래형교육과정 때문에 만든 교과서들이 폐지가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많습니다. 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교육 현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세심하게 정책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현장상황을 고려하고 세심한 준비단계를 거쳐서 제대로 실시해야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적주의와 탁상행정에 현장교사들과 학생들만 엉뚱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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