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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서거 50주기에 여우비가 내리다

[현장] 보수-진보 200여 명 참석해 '재심 통한 명예회복' 촉구

등록|2009.07.31 17:02 수정|2009.07.31 17:02

▲ 죽산 조봉암의 유족들이 서거 50주기 추도식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8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당시 <한국일보> 기사)

1959년 7월 31일, 죽산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법살'(法殺)됐지만, 언론은 침묵했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각 언론사에 '조봉암 사형집행 사실은 민심을 자극하고 북을 이롭게 하니 일절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한국일보>만이 사형집행 이후 위에 적힌 1단 6행의 단신 기사를 내보내 '현실주의자 진보정치인'의 죽음을 알렸을 뿐이다.

200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거 50년 추도식 열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지난 29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조봉암의 사형 직전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7월 31일 아침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던 조봉암은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서대문 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은 뒤 담담히 형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조봉암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흘렀다. '민주파 정부'라는 노무현 정부에서 '재심의하라'는 권고가 이루어졌지만, 그는 아직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여야 의원 128명이 어제(30일) '법원의 신속한 재심 개시 결정'을 청구했지만, '보수파 정부'인 이명박 정부에서 그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룰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가운데 조봉암이 안장돼 있는 서울 망우리 묘소에서는 장녀 호정씨와 장남 규호씨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5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50주기'치고는 소박하고 차분한 행사였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와 조승수 의원, 박찬종 전 의원, 최규엽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장 등 정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과 신경림 시인, 평론가 구중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강대인 대화아카데미 원장 등 200여 명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보수와 진보 인사가 두루 참여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조봉암이 '1950년대 정치인'이어서인지 백발 인사들이 많았다. 젊은 세대들이 그를 기억하기에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조봉암 연구>를 썼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이날 추도사에서 "지금 세대에게 죽산은 잊힌 분"이라며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죽산은 잊힌 인물이 된 것은 아이러니"라고 아쉬움을 진하게 나타냈다.

신경림 시인, 50년 만에 다시 추도시 낭독

추도식은 곽정근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조봉암 약력 보고로 시작됐다. 곽 사무총장은 "오늘은 조봉암 선생이 완전 명예회복한 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통일되지 못하고 두 나라로 나뉘어 있으면 6․25와 같은 무력사태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의 조봉암 육성이 소개됐다. 약 3분짜리 이 육성은 광복 8주년 행사에서 연설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지론인 '평화통일론'이 잘 나타나 있다.

이어 경기도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장남 규호씨가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건넸다.

"언론에서 부친의 명예회복과 관련된 기사가 나와서 기쁘고 참 기분이 좋다. (그동안)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었으나 마음 속 괴로운 심정이 복받쳐 얘기를 못했다. (그래도) 이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 (부친과 관련해) 마음 써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죽산 조봉암 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기 고려대 명예교수는 "선생은 넉넉지 못한 집에서 태어나 높은 학문을 연마하지 못했지만 평생 민족사랑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며 "이후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은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1946년 조선공산당과 결별한 뒤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면서 농지개혁과 민권법안 처리를 주도했다"며 "특히 무력이 아닌 평화를 통해서도 잘살 수 있다고 한 것은 세계적인 가치로 평가받을 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특별한 자리가 마련됐다. 신경림 시인이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추도시를 낭독한 것이다. 그의 추도시 낭독이 특별한 이유는 50년 전 조봉암의 사형집행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젊은 여자가 혼자 상여 뒤를 따르고 있다'로 시작하는 '그날'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로 귀를 열자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활짝 마음을 열자는.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른 사람들이
귀를 열고 마음을 열 때
세상은 아름다워진다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자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쁨도 이웃과 함께 하자는.
가진 것이 다르고
누리는 것이 다른 이웃들이
눈을 마주 보며 웃을 때
나라가 빛나는 나라가 된다고.

아름다운 세상 빛나는 나라를
어둠과 죽음으로 덮는 사람들에 의해
당신이 가진 지 반백년,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들과도 길동무가 되자는.
말을 나누고 아픔과 슬픔을 나누자고. (후략)'

▲ 망우리 묘역에 잠든 죽산 조봉암. 이승만 정권의 보도통제로 인해 그의 사형집행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김학준 "헌법에도 죽산의 노선이 살아 있다"

첫 번째 추도사에 나선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조봉암과 같은 인천 출신이다. 김 회장의 추도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조봉암이 해방 직후 '조심스럽고 겸손한 행보'를 했다는 부분이다. 그는 7년간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한 뒤 나와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검거됐지만 해방과 함께 출감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많은 인사들은 건국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선생은 겸손한 행보를 밟았다. 출감한 뒤 건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자괴감에서 자기 업적을 내세우지 않고 고향 인천에서 민전(민족주의민족전선)운동에만 참여할 정도로 겸손한 분이었다."

김 회장은 "죽산의 농지개혁과 평화통일론 등은 시대를 앞서간 노선이었다"고 평가한 뒤, 특히 "헌법에 평화통일 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은 죽산이 없어도 헌법에 죽산의 노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앞서가는 사람이 매를 맞는다'고 했다. 우리말로는 '선두주자의 벌금'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죽산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앞서서 제시하다가, 앞선 시대를 두려워하는 세력에 의해 살해됐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의 상징이었다."

두 번째 추도사는 지난 1995년 <조봉암 연구>를 펴낸 박태균 교수가 진행했다. 박 교수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는데 죽산은 잊히고,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인해 실업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현실이 죽산을 불러내고 있는 것은 '역설'"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염두에 둔 듯 "용삼참사, 쌍용자동차사태, 남북경색 등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생긴 일"이라며 "그로 인해 죽산이 필요하게 됐다"고 죽산 재조명 열기의 배경을 진단했다.

이어 박 교수는 "죽산은 임기응변적으로 현실에 맞게 자신의 사상과 노선을 잘 변화해 나갔다"며 "이상주의적이면서 현실적인 이것이야말로 죽산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죽산을 추모하는 행사가 많은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모습으로 죽산을 보려 할 때 후세대들이 죽산을 더 잘 기억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김삼웅 "후배 법조인들이 죽산 명예회복시키는 것이 사법부 오욕 씻는 첩경"

이날 추도식에 참석한 이부영 전 의장은 기자와 만나 조봉암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을 "한반도의 난센스"라고 꼬집었다.

"냉전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명예회복을 안 시키고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 제헌국회 의원, 국회 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 등을 지냈다. 특히 대한민국 자본주의 기초를 놓은 농지개혁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법살인했다. 한반도의 난센스다. 또 여야 의원과 우파 인사까지 포함된 사회원로그룹이 재심을 청구했는데 대법원이 모른 체하고 있는 것도 한반도의 난센스다."

이 전 의장은 "법이라는 게 제일 늦게 변한다지만 지금은 너무한다"며 "사법부가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발을 맞추어야 한다"고 신속한 재심을 촉구했다.

특히 이 전 의장은 "서중석 교수의 책에 나온 얘기지만 죽산은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자로서 50년을 앞서간 사람"이라며 "50년이 지난 지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나올 때가 됐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김삼웅 전 관장은 "고루 잘사는 사회와 평화통일이 죽산이 추구하는 두 가지 가치인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이것을 역행하고 있다"며 "그나마 정치권과 사회원로들이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김 전 관장은 "사법부가 죽산을 사형으로 몰고 간 죄업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후배 법조인들이 죽산을 명예회복시켜 사법부의 오욕을 씻는 것이 첩경"이라며 재심을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추도식이 끝난 뒤 묘소 주변에 둘러 앉아 유족들이 마련해온 도시락으로 음복을 했다. 그런데 낮 12시 30분이 넘으면서 갑자기 여우비(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수, 진보를 떠나 모여서 자신의 서거 50주기를 추모하는 사람들을 보고 죽산 선생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인가? 아니면 50년이 지나도록 명예회복이 안 된 지금의 현실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가?"

▲ 조봉암 서거 50주기 추도식에 참여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과 죽산 선생의 장녀 호정씨,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왼쪽부터).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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