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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는 왜 일사부재의의 원칙이 없을까?

2009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민주주의'

등록|2009.08.03 12:22 수정|2009.08.03 14:49
영국은 '의회민주주의', 미국은 '대통령·의회 민주주의'

"의회에서 법안을 부결시키는 것은 쉽지만, 통과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독자적 정책결정자로서의 미국 의회의 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의 말이다. 미국 의회의 독자성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여전하다.

지난달 31일 미국 하원 에너지통상위원회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주요 공약인 의료보험 개혁안을 찬성 31 대 반대 28로 통과시켰다. 당시 공화당 소속 상임위원들은 모두 반대표를 던졌고, 균형예산을 중시하는 민주당 내 이른바 '블루독' 의원 다섯 명도 당론과는 다르게 반대표를 던졌다. '하원의 관련 상임위(세출위원회, 교육․노동위원회, 에너지통상위원회) 통과'라는 한걸음을 힘겹게 내딛은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을 향한 발걸음은 상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별도 스케줄에 의해 진행된다.

미국 의회는 영국 의회를 모체로 하여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의원내각제 국가로서 여왕이 존재하는 영국과 달리, 대통령제 국가의 의회로서 그 구성 및 권한은 상이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미국 의회는 입법·사법·행정 등 엄격한 3권분립의 대통령제 권력구조에서도 정책결정의 주체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국회사무처 의사국, 「미국의회 의사규칙」, 2007. 1.). 이와 같은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를 영국의 사학자 폴 존슨(Paul Johnson)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국의 헌정을 의회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미국의 헌정은 대통령·의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민주주의'

폴 존슨의 표현을 빌어 2009년 7월 대한민국 국회를 평가해 보자.

국회의장의 말마따나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이념법안도 민생법안도 아닌' 미디어법 등임에도 불구하고 의장은 해당 법안을 직권상정한다. 의장의 사회권은 부의장에게 넘겨진다. 혼란스런 본회의장에서 법안표결절차는 강행된다. 사회를 보던 이윤성 부의장은 '찬성을 눌러야 되는 것이냐'며 독백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던진다.

졸속 마련된 수정법률안은 전자투표시스템에 입력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거대여당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수정안의 내용조차 모르는 채 그저 '찬성' 버튼을 누른다. 로그기록에 의하면 어떤 이들은 '찬성'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 법률안에 대한 찬반토론은 다수의 힘에 의해 생략되어진다. 대리투표는 물론이요, 국회법이 정한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위반하여 재투표가 이루어진다. 

7월 22일 참담한 대한민국 국회의 현실이다.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며 국회입법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독립된 헌법기관이자 입법기관으로서의 국회의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행정부와 '견제와 균형'을 추구해야 할 의회의 모습 대신 행정부의 거수기, 이른바 '통법부 의회'만 존재한다. 입법부의 존재의미가 퇴색된, 바야흐로 '대통령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일사부재의의 원칙은 소수집단의 의사방해를 막기 위한 원칙

▲ 미디어법 강행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22일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한 강기정 민주당 의원이 이윤성 부의장 앞으로 다가가 거세게 항의하자 경위들이 이 부의장을 필사적으로 에워싸 보호하고 있다. ⓒ 남소연


방송법 등의 강행처리의 유효성에 대한 판단은 국회를 떠나 사법부인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민주당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 및 대리투표 등을 이유로 표결이 있은 다음날인 23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 및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국회사무처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CCTV 영상 등 자료제출을 거부하고, 헌재는 지난달 31일 오후 민주당의 증거보전신청을 사실상 인용하여 국회의장 및 사무총장에게 CCTV 영상 등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특히 방송법 처리과정에서 재투표의 유효성과 관련해 논란이 뜨겁다. 재투표 무효의 주된 이유인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이란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발의 또는 제출하지 못한다(국회법 제92조)는 원칙을 말한다. 이 원칙은 의사절차의 능률성과 소수집단의 의도적인 의사방해를 막기 위해서도 도입된 원칙이다(허영, 한국헌법론 852면). 이번 사태에서는 소수집단의 의도적인 의사방해를 막기 위한 제도가 도리어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우리 국회는 소수의 의사방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일사부재의의 원칙 이외에도 여러가지 제도를 두고 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국회공무원인 보좌관들의 본청 출입까지도 막는 경호권과 질서유지권, 발언횟수 및 시간의 제한, 교섭단체별 발언자수 제한 등 여러 가지 수단들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에는 왜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이 없을까?

▲ 김종률의원실/이정희 의원실 공동주최로 27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문가가 본 미디어법 강행처리의 법적 효력' 토론회에 초청된 국회사무처의 이종후 의사국장이 불참해 자리가 비어 있다. ⓒ 남소연


박경신 교수(고려대, 미국법)에 의하면 미국이나 프랑스 등에서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이 없다고 한다. 미국과 프랑스에는 왜 없을까? 박 교수는 그 이유로 '당내 민주화의 정도'를 언급했다. 당시 토론문 중 일부를 보자.

"미국, 프랑스 모두 같은 안건을 같은 회기에 다시 올릴 수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당내민주화의 정도라는 점에서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사부재의 조항은 국회의원의 독립성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2009.7.27. 민주당 등 야4당․민변 공동주최토론회 「전문가가 본 미디어법 강행처리의 법적 효력」)

'당내 민주화의 정도'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필자는 이전 글 "DJ는 왜 5시간 19분 동안 국회 연설했나"에서 필리버스터(Filibuster, 의사진행방해)에 대해 글을 적었다. 미국 의회에 일사부재의의 원칙이 없는 것은 필리버스터 등 의회 규칙이나 문화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필리버스터는 타협을 통한 의안 통과를 간접적으로 강제하는 장치

먼저 필리버스터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미국 상원에서 허용되는 필리버스터는 상원에서 원내 소수당 측이 표결할 경우 통과가 예상되는 법률안이나 수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의사진행 지연전술의 하나다.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방법은 무제한토론을 허용하고 있는 상원규칙을 활용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형태의 원내전략이 이용되기도 한다(국회사무처 의사국, 『미국의회 의사절차』(2004), 453면).

이와 같은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로 인해 하원에서는 주요 안건이나 논란이 많은 안건을 통과시키려면 단순과반수의 지지만 확보하면 되지만, 상원에서 안건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키려면 의사진행방해, 이른바 필리버스터를 막기 위해 적어도 60표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필리버스터는 타협을 통한 의안 통과를 간접적으로 강제하는 장치인 셈이다. 필리버스터 옹호론자인 미국의 Byrd 의원의 말이다(1993.11.10. National Journal's CongressDaily).

"미국의 상원이 현재와 같은 특유의 상부 기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 요인들 중 하나는 오래 연설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소수의 권리 보호가 국가에 매우 유익할 때가 되었다. 세계사에 있어서 많은 위대한 주장들은 처음에는 단지 소수에 의하여 지지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중에는 그들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가 그 구성원이 장시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공의 장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들의 자유는 보장될 것이다."

소수당 원내총무 Dole 의원 역시 "상원에서 소수의 권리는 고귀한 것이다. 소수의 권리는 소수당의 이익뿐만 아니라 개개의 주를 포함하는 경제적, 지역적 소수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1994.9.20. 워싱턴포스트)"라며 Byrd 의원의 말에 동의했다.

'대통령․의회민주주의' 미국 의회는 타협을 중시

미국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통한 소수당의 의사진행방해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원의 경우는 어떨까? 미 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규칙에 의해 진행된다. 하원의 의사규칙은 원내다수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임에 반하여, 상원 의사규칙은 개별의원이나 원내소수파에게 상당한 의사운영상의 권한을 부여하여 신중하게 의안을 처리하고 심지어 의안의 처리를 지연․방해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국회사무처 의사국, 『미국의회 의사절차』(2004), 453면).

하원 규칙은 좀 더 엄격해서 「의사진행지연전술」을 쓰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미국 하원은 복잡한 입법 절차를 갖고 있는데, 입법이 시급하거나 중요한 법안의 경우 다양한 절차를 통해 신속하게 입법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국회입법조사처,「미국하원의 신속입법 처리절차」, 2009.2.22.).

그러나 의장의 권한이 매우 강력하고 당파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하원에서도 상임위 심사를 거치지 않은 법안을 의장이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수 있는 절차는 없다(국회입법조사처, 「국회의장 직권상정 해외사례」, 2009.2.8.). 또한 상하원 모두 강제적 당론이 없으므로 의원들이 법안의 내용조차 모르는 채 그저 '찬성' 버튼을 여러 번 누르는 일은 더욱 상상할 수조차 없다.

또한 의회 의사규칙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여러 가지 의사절차 상의 수단을 통하여 가끔 지연전술을 쓰기도 한다. 의사진행의 효율 외에 사회적 혼란을 예방하는 '타협'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타협의 문화'를 중시하는 미국 의회의 특성은 미국 의회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정치에서 옳은 답이란 없다. 욕심과 야망이 공개적으로 지식과 지혜를 겨루는 곳에서 집단간의 타협의 물결만이 있을 뿐이며, 이러한 타협에 의해 일련의 공공정책이 산출된다."(1987년 5월 20일, 미국의회기록 S6798)

이처럼 '타협'을 중시하는 미국 의회에서는 소수당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장치가 있다. 따라서 동일한 의안에 대해 한 회기에서의 중복 처리를 막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회의장의 영향력은 존경과 설득 등에서 얻어지는 것

▲ 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3월 2일 밤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이를 꽉문 채 의사봉을 두드리며 안건을 상정하고 있다. ⓒ 권우성


김형오 국회의장의 말대로 미디어법은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이념법안도 민생법안도 아니다. 하지만 김 의장은 미디어법 직권상정 강행처리에 따른 정치적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 의장은 지난달 26일 "누가 사회를 봤든 최종 책임은 국회의장에게 있다"며 "당일 처리된 미디어 관련법과 금융지주회사법은 의장의 결단으로 본회의 표결에 부친 것으로, 직권상정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의장에게 있으며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입법부 수장으로서의 김 의장은 이번 사안을 어떻게 수습하고 있나?

국회 입법조사관 출신의 서강대 서복경 교수는 지난달 27일 국회 토론회에서 "입법부 내부의 합의에 기초해 국회 리더십 수준에서 대안을 마련하는 것만이 입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고, 대한민국 입법부의 장래를 위해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며 국회 내에서의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하지만 김형오 의장의 해결법은 결국 '정치의 사법화'다. 김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입법부의 사안을 사법부에서 판단하는 것이 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언론관련법 처리에 대해 국회의장이 조사해서 발표하면 여야 정치권이 안 받아들일 것 아니냐"며 "국회가 직접 조사할 수도 있지만, 조사를 공정하고 엄정하게 하기 위해서 사법당국에서 넘겨 조사하도록 할 것"이라며  말했다. 결국 김 의장은 입법부의 권위를 회복할 영향력마저도 없음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타협'의 문화가 실종된 '대통령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회의장의 영향력의 현실이다. 알다시피 김 의장은 지난 3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장으로서 윤리특위에 회부된 '불명예'기록을 안고 있다. 땅에 떨어진 국회의장의 '영향력'을 회복할 길은 없을까?

미국의 전 다수당 대표였던 미첼 상원의원이 1994년 3월 불출마 선언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의 발언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존경과 합리적인 설득 그리고 상원의원 개개인의 정치적 관심 등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상원의원들에게 나누어줄 선물이 가득 든 가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원의 기강을 잡을 매커니즘이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에서 언급한 미국 의회기록 및 의원들의 발언은 국회사무처 의사국에서 발간한 『미국의회 의사절차』에서 주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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