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마오쩌둥과 흐루시초프의 잘못된 만남

[데일리차이나] 네 번의 만남, 만날수록 멀어지는 악연

등록|2009.07.31 21:32 수정|2009.07.31 21:32

마오쩌둥과 흐루시초프의 만남서로 비판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 김대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피천득의 <인연>처럼 애틋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만날수록 엉키고 꼬여만 가는 악연 또한 세상에는 존재한다.

소련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S. Khrushchyov)와 마오쩌둥(毛澤東)의 만남이 그런 경우다. 그들은 네 번 만나는데 마지막 세 번은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망 이후 권력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1954년 9월 29일 신중국 성립 후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직접 중국을 방문했다. 10월 13일까지 이뤄진 마오쩌둥과의 첫 번째 만남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대외관계에서 긴밀한 공조를 다짐하는 동시에 소련은 중국에 대한 경제, 군사, 과학기술 방면의 대대적인 원조를 약속하며 밀월관계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1957년 11월 2일,마오쩌둥이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이뤄진 두 번째 만남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수정주의자와 교조주의자의 길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던 마오쩌둥은 그 간극을 힘겹게 봉합하며 11월 14일 러시아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12개 사회주의국가 대표와 64개국 공산당원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흐루시초프 라는 연꽃은 비록 아름답지만 그래도 푸른 잎들이 그 꽃을 받들어주어야 하고 마오쩌둥이라는 연꽃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더 더욱 푸른 잎들이 그 꽃을 감싸주어야 한다.(你赫鲁晓夫这朵荷花虽好, 也要绿叶扶持。我毛泽东这朵荷花不好,更要绿叶扶持)"

이 말은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더욱 연대해야 하며 또 중국은 경험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소련의 지원이 더 더욱 절실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수정주의 노선을 걷는 소련이지만 여전히 소련을 사회주의의 '큰 형님(老大哥)'으로 모실 테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경제적 실리 앞에 자존심을 굽힌 마오쩌둥이었지만 그의 인내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 번 째 만남인 1958년 7월 31일 중국을 방문한 흐르시초프가 1958년 8월 23일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전으로 고조된 양안(兩岸) 긴장국면과 취약한 중국 해군력을 감안하여 중-소 연합함대 구상을 제의하자 마오쩌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정간섭이자 소련의 대국 이기주의라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스탈린 격화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서방과의 화해를 생각하고 있던 흐루시초프와 계급투쟁과 대약진운동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의 가속화를 주장하던 마오쩌둥, 두 사람의 견해차는 너무 확연해져 있었던 것이다.

1959년 9월 15일 흐루시초프가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직후인 9월 30일 마오쩌둥과의 네 번째 마지막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두 개의 중국을 인정하는 듯 한 흐루시초프에 대해 마오쩌둥은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부르조아화된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고 10월 3일 소련으로 돌아가는 길에 흐루시초프는 마오쩌둥에 대해 '싸움닭(好鬪的公鷄)', '낡은 장화(舊套鞋)', '싸우지 않아도 사이가 나쁜 사이(不戰不和)' 라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1950년대 중국과 소련 최고 지도자의 네 번의 만남, 그것은 밀월관계에서 갈라섬으로 갈라섬에서 분쟁으로 그리고 확실한 결별의 단계로 이어졌고 그 묘한 악연은 1960년의 소련 기술자 중국 철수와 1969년 3월의 무력분쟁으로 이어지며 양국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