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충의정신 현장을 가다
민족 기상 드높인 숭고한 정신 기려…충남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지 탐방
의인은 공익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에 따라 의사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구한 사람을 지칭한다.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는 25세 때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전승기념 축하식장을 폭파하는 거사를 성공시켜 민족 해방 의지와 기상을 드높였다.
이로 인해 윤 의사는 그해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아 12월19일 일제에 의해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을 터.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찾았다. 그의 숭고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돌아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이에 사진으로 소개한다.
이 거사의 성공으로 일본 이카와바다 상해 거류 일본인 민단장과 시라카와 사령관이 죽고 수뇌급 수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 의사는 대한 독립 의지와 대한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다.
그해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금택형무소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의 나이에 순국하셨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유물 56전이 전시되고 있으며, 25세의 짧은 생애를 알리는 충의정신 학습장이 되고 있다.
"물통형 폭탄은 의거에 사용되었고, 도시락 모형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윤 의사가 1930년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야학 등 농촌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을 펼치던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는 25세 때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전승기념 축하식장을 폭파하는 거사를 성공시켜 민족 해방 의지와 기상을 드높였다.
이로 인해 윤 의사는 그해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아 12월19일 일제에 의해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을 터.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찾았다. 그의 숭고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돌아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이에 사진으로 소개한다.
▲ 윤봉길 의사와 선서문. ⓒ 임현철
▲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당. ⓒ 임현철
▲ 윤봉길 의사 사당 입구. ⓒ 임현철
▲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폭탄 투하 장면. ⓒ 임현철
이 거사의 성공으로 일본 이카와바다 상해 거류 일본인 민단장과 시라카와 사령관이 죽고 수뇌급 수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 의사는 대한 독립 의지와 대한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다.
▲ 1932년 4월 49일 폭탄 투하 후 즉시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 ⓒ 임현철
그해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금택형무소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의 나이에 순국하셨다.
▲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과 기념 사진을 찍을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 임현철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유물 56전이 전시되고 있으며, 25세의 짧은 생애를 알리는 충의정신 학습장이 되고 있다.
▲ 윤봉길 의사의 뜻을 이어 가고 있는 고향 후학들. ⓒ 임현철
▲ 윤봉길 의사 사당에 떨어진 무궁화. 무궁화가 가장 어울리는 장소 중 하나라는 생각이다. ⓒ 임현철
▲ 상해 임시 정부와 윤봉길 의사가 준비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 ⓒ 임현철
"물통형 폭탄은 의거에 사용되었고, 도시락 모형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 되었다"고 한다.
▲ 윤봉길 의사가 자란 저한당. ⓒ 임현철
이곳은 윤 의사가 1930년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야학 등 농촌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을 펼치던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덧붙이는 글
다음과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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