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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젠씨는 '지금 사는 그대로' 살고 싶었을 뿐...일껄?

[서평] 야콥 하인이 쓴 <옌젠씨, 하차하다>

등록|2009.08.03 09:44 수정|2009.08.03 09:44

<옌젠 씨, 하차하다>(야콥 하인 지음)겉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9.7. ⓒ 문학동네


지구를 떠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우주인이 되어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무거운 우주복을 입지 않는 한. 물론 우주복을 공짜로 주고 공짜로 우주에 데려다 준다 해도 가고 싶지 않다. 그럴 일이 없다. 우주는 내 삶에서 그다지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를 아는 게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이다. 무료하리만치 자연스럽고 꾸준한 평범한 하루하루.

대학 중퇴에 마땅히 내세울 꿈도 없는 사람인데다가 친구 따라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우체국 일을 통해 하루하루를 채우는 옌젠 씨. 삶에 어떤 의미를 새겨 넣을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 옌젠 씨는 흘러가는 시간 따라 물 흐르듯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무료해 보인다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 친구 한 명 제대로 없고 사귀는 여자 친구는 더더욱 없는 사람이라고 측은히 여길 이유 역시 없다. 옌젠 씨는 옌젠 씨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옌젠 씨는 옌젠 씨 외에는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옌젠 씨 삶이 평소대로 이어지면 그만이다. 작은 계획이랄 것도 없는 옌젠씨 삶은 한 마디로 '나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이다. 그게 꿈이라면 꿈이고 살아갈 이유라면 이유이다. 정해진 것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옌젠 씨 삶은 평범 그 자체이다.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우체국 일. 정해진 구역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거의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옌젠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정규직 해고를 지양하는 새 법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십 여 년 간 별다른 꿈은 없었지만 특별한 문제도 없었던 옌젠 씨. 정규직이냐 아니냐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가던 옌젠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옌젠 씨'를 다시 봐야만 했다. 옌젠 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옌젠 씨는 다른 직종에 선뜻 뛰어들 다른 기술이며 재능이 없었다. 그다지 문제점을 느끼지도 않았다. 더 나아지려는 꿈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닐 뿐이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간 월급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간 연금으로 실업수당을 받으며 무덤덤하면서도 꾸준히 살던 평소 삶 그대로 조용하고 느긋하게 '옌젠'을 찾아가고자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게 된 일에서 그대로 자기 삶을 살아갔듯이 사람들이 우려하고 불안해하는 실업자 상황을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을 뿐이다. 옌젠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이 '실업자' 옌젠 씨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실업자였지만 스스로 '자유로운' 옌젠 씨가 되기로 한 그를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해고하던 방식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법이 바뀌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실업수당을 줄 수 없다느니, 원치 않는 방식이어도 무조건 직업 교육을 받으라느니 하는 압박이 거세졌다. '친절한' 실업자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집에 들이닥치는 일도 생겼다. 원치 않게 해고당하고 다시 원치 않는 방식으로 해고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강요당한 옌젠 씨는 결국 터뜨렸다!

"옌젠은 하차했고, 다시는 승차하지 않는다고!"

장을 보러 나갔다가 우체국 옛 상사인 뵘 씨를 만난 옌젠 씨는 그렇게 항의했다. '하차했다'고. 단기간 일할 사람이 필요하니 마침 만난 김에 얼마간 다시 일해보라는 뵘 씨에게 옌젠 씨가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당신이 누구 지시를 받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가서 전해. 말하라고. 옌젠은 하차했고, 다시는 승차하지 않는다고!"

옌젠 씨를 알아보는 건 역시나 '옌젠 씨'이겠지

옌젠 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꿈이 없어 보이고 사람들 사귀는 일에도 한 없이 무관심해 보이는 옌젠 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해고당한 뒤 조금 슬프고 또 씁쓸하다 싶을 만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옌젠 씨를 보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건 무조건 옌젠 씨에게 다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옌젠 씨가 세상을 향해 그렇게 항의하고 또 거부하게 된 상황을 이해하겠다는 뜻이었다.

옌젠 씨가 삶에서 완전히 '하차'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죽은 것도 아니고 지구를 떠난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옌젠 씨는 어이없게 해고당한 뒤로 갑자기 '승차'와 '하차'를 맘대로 조정하는 세상을 맞딱뜨리게 되었다.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해고 전이나 해고 후나 변함없는데 그가 보기에 세상은 그를 함부로 흔들어댔다. 그래서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항의했고 시위(?)도 했다.

옌젠 씨, 지금도 그렇게 산다. 아니, 많은 '옌젠 씨'가 그렇게 평범하게 산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이유로 해고당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강제하차'다. 그리고 세상은 또 자기들 맘대로 바꾼 법을 들고 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일을 주겠다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강제승차'다. 그것도 아주 잠시! 이런 식이라면 누군들 가만있을까.

문득, 어찌보면 옛 상사였던 뵘 씨 잘못은 아닌 데도 그 사람 잘못이라는듯이 옌젠 씨가 내뱉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옌젠 씨'들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옌젠 씨'는 살고 싶을 거라고. '지금 이대로' 조용하고 평범하게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덧붙이는 글 <옌젠 씨, 하차하다> 야콥 하인 지음.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09.7. 9천원
(원서) Herr Jensen steigt aus by Jakob Hein(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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