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MB정부, 클린턴 방북 '외면'하면 역사적 죄악

[정치 톺아보기] 9년만에 찾아온 한반도 평화 기운... 미 실용외교에서 배워야

등록|2009.08.06 11:41 수정|2009.08.06 11:41

▲ 지난 4일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

2000년 10월, 당시 기자는 한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당시 위원장 김용순)의 초청을 받아 7박8일(10월14∼21일) 동안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10월 18일 당시 아태평화위 고위관계자는 초청 단체를 대표해 기자의 숙소인 평양 양각도국제호텔 1427호로 찾아와 한 시간 남짓 '비공식 인터뷰'(의례 면담)를 갖고 남북 및 북미관계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두루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귀가 번쩍 트이게 한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

"조-미 관계도 (북-남 관계처럼) 정상화됩니다. 올브라이트도 (10월) 23일 오기로 돼 있고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

일순 기자의 귀가 번쩍 틔었다. 그가 툭 던진 말 속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확정된 방북 날짜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빅 뉴스가 두 개나 담겨 있었다.

당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클린턴을 예방해 초청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올브라이트의 방북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당시 북미 간 모든 현안을 두루 언급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뮈니케(10월 12일)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위원장께 클린턴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며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고위 관계자가 올브라이트의 확정된 방북 일정(10월 23일)을 밝힌 10월 18일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올브라이트의 방북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올브라이트가 10월 23일 방북한다는 사실은, 미국 측의 공식 발표로 국내 언론에서는 10월 20일 자 조간부터 보도되었다). 그는 한국기자에게 빅 뉴스를 준 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빅 뉴스는 거의 확정적인 클린턴의 방북 전망이었다. '인차'는 '이제' 혹은 '금방'을 뜻하는 북한 사투리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11월 방북을 의미한다. 이 고위관계자는 당시 클린턴의 방북 여건과 직결된 북-미관계 개선의 3대 현안인 핵-미사일-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잘 될 겁니다"고 말해 미국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의견 접근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선 배경에 대해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하는 거지만 미국은 '유관국가' 아닙니까. 통일을 하자면 그런 나라(유관국가)들과의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관계를 정상화하는 겁니다"고 밝혔다. '통미'(通美)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남북한이 통일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이었다. 그 5개월 전에 한반도에서 이뤄진 '일대 사변'인 남북 최고위급 상봉을 포함한 6·15 공동선언의 여파였다.

2000년 10월 벼락처럼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기운

▲ 2007년 9월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왼쪽에서 두번째)과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장관(왼족에서 첫번째)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김대중평화센터


이처럼 2000년 10월의 한반도는 벼락처럼 찾아온 평화의 기운에 들떠 있었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분단 55년 만에 남한 대통령을 맞이한 평양 역시 한국전쟁 이후 50년 만에 찾아온 평화의 기운에 들떠 있었다. 당장 이듬해 조미 국교정상화가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1월로 예상된 클린턴의 방북은 이뤄지지 않았다. 불확실한 대선 결과와 진행 중인 중동 평화협상과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 클린턴은 방북 기회를 놓쳤던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아쉬워했다. 그는 회고록 <마이 라이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북한을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내가 북한을 방문하면 미사일협상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북한과 협상을 진척시키고 싶었지만, 중동 평화협상의 성사가 임박한 상황에서 지구 정반대편에 가 있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아라파트가 협상 성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북한 방문을 단념할 것을 간청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북한 방문을 강행할 수 없었다."(<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 1332쪽)

그로부터 9년 만인 지난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비록 현직 미국 대통령의 신분은 아니지만 클린턴의 이번 방북은 2000년 불발에 그쳤던 방북계획을 9년 만에 실현시켰다는 점에서도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5일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 관영언론들은 김 위원장과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접견과 환영 만찬 등의 일정을 갖고 상호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통신은 "조미 사이의 현안문제들이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고 깊이 있게 논의됐다"며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 대한 견해일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15년 전 카터 방북 때도 한미 당국은 시큰둥한 반응

▲ 북한 당국의 사면으로 풀려난 미국 여기자 로라 링(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유나 리(왼쪽에서 세번째)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부근 밥호프 공항에 도착해 가족을 만났다. ⓒ 연합뉴스

이에 반해 미국 백악관 측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문이 개인적이고 인도적인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또 북한 측 보도와 달리 클린턴이 오바마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가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거듭되자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아예 "전직 대통령의 개인적인 방북에 대해 논평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조야의 시각은 클린턴의 방북으로 북미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낙관론과 함께 개인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한 만큼 근원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는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분위기다.

일단  한미 정부 당국자들은 클린턴의 방북이 지난 3월 이후 북한에 억류되어온 미국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한 '개인적 방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면 타당한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외교적 사안에서 정부 당국이 취할 수밖에 없는 당위론이기도 하다.

15년 전인 1994년 클린턴 행정부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할 때도 한미 정부 당국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핵시설에 대한 군사적 제재 상황까지 간 상황에서 정부와 조율되지 않은 카터의 개인적 방북에 마뜩잖아 했다. 1차 북핵위기 당시 북미 핵협상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차관보는 자신의 공저 <벼랑끝 북핵협상>(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Going Critical)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카터 방북에 대해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찬성한 반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반대했고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김일성을 직접 면담, 미국의 관계 개선 의지 등 진의를 분명히 전달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며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소식을 듣자 클린턴 대통령에 전화를 걸어 '(대북 제재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증가하고 있는 판국에 카터가 방북하는 것은 실수'라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방북이 결정되자 카터 전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카터의 선물 보따리와 클린턴의 선물 보따리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 물꼬를 튼 것이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DJ)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라는 점에서 마뜩잖아 했다. DJ는 94년 5월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NPC) 연설에 나서 '주고받는 협상'과 '일괄타결',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제안했고, 이 연설은 그해 NPC의 '베스트 스피치'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잔류의사 확인을 통해 핵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열었으며 남한에는 '조건없는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뜻밖의 선물 보따리를 갖고 왔다. 비록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 약속은 제재국면을 대화국면으로 전환시켰다.

15년 전과 비교해 이번 방북은 클린턴이 현직 대통령 시절에도 방북을 원했던 전향적 평화주의자인 데다가 정부와 사전 조율된 흔적이 역력하고, 특히 부인이 국무장관이라는 점에서 더 극적인 변화의 계기가 조성될 수 있다. 그의 방북을 두고 "북-미 간 빅딜 시작의 단초"(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라거나 "국면 전환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쌍방의 의지가 담겨 있다"(임동원)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클린턴이 오바마 정권인수팀장을 지낸 포데스타 전 비서실장을 대동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오바마 정권이 현재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포괄적 패키지'를 모색하고 있어 클린턴 방북 및 여기자 석방을 계기로 북미대화의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은 커 보인다.

미국 측의 '포괄적 패키지' 구상은 북한이 완전하고 회복 불가능한 비핵화를 실행하는 시점에서 대가를 일괄적으로 결정한다는 구상으로, 그 대가에는 광범위한 경제 지원과 북미 국교정상화도 포함된다. 따라서 여기자 석방을 위해 북한 측이 먼저 지목했던 것으로 보이는 클린턴의 방북을 미국 정부가 승인함으로써 북미 양국은 '포괄적 패키지'의 진정성을 탐색할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자세다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뮤니케 채택은 북미 수교를 시간문제로 인식시켰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약속으로 한반도에 봄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취임해 북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면서 붕괴정책을 표면화하자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북한은 NPT 탈퇴와 핵 동결 해제로 저항했고, 미국은 대북 중유공급 중단, 경수로 사업 중단으로 맞서 대립을 첨예화시켰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김정일의 여기자 사면에 대한 오바마의 선물과 클린턴의 방북 선물 보따리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공개될 것이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 시절에 제1차 북핵 위기를 직접 다룬 클린턴의 방북은 그를 승계한 오바마 정권이 북한이 끊임없이 주장한 2000년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새로운 북미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사실상 약속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정일의 공식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이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서 합의한 이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북미 간 관계 전면 개선, 한반도 전쟁종식(평화협정), 한반도 비핵화, 경제협조와 교류협력 확대 등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포괄적 패키지'가 다 들어 있다.

문제는 북한이 대화의 장에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전략을 고수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다. 오바마 정부가 제시한 '포괄적 패키지'는 이미 15년 전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제시한 '포괄적 접근방안'이나 '일괄타결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제안한 포괄적 접근방안을 반대했다. 갈루치는 위의 같은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블레어하우스(영빈관)에서 열띤 논쟁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한승주 외무장관은 대미 협의에서 합의된 '포괄적 접근' 방식을 설명했으나 유종하 유엔대사는 북한에 대한 당근, 특히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같은 큰 당근은 남북한 상호사찰에 연계시켜야 된다며 대북 강경책을 주장했으며 박관용 비서실장도 그를 지지했다. 박 실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방미가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에만 쏠려 있었다.…(중략)…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통보한 일괄타결안을 포함한 대북 포괄적 접근방식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는데 블레어하우스에서 유종하 대사 등이 내세운 강경 접근법을 설명했다."

한반도 평화의 계기를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

▲ 5일(현지시간) 커런트TV 공동 설립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서북쪽 버뱅크의 밥 호프 공항에서 여기자 가족들과 커런트 TV를 대표해서 두 기자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 왔던 클린턴 전 대통령과 행정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클린턴이 평양에 머문 동안 전직 대통령의 개인적 방북에 대해 논평하지 않겠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한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클린턴이 여기자들을 데리고 돌아오자 "클린턴 전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방북결과를 직접 설명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클린턴의 사실상의 특사 구실과 북미 최고위급 간접대화를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의 유산을 승계한 이명박 정부는 실용외교를 표방하면서도 클린턴의 방북 의미를 축소하는 데 급급한 인상이다. 이번 일로 이명박 정부가 처한 곤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법하다. 당장 미국 여기자는 풀려났는데 개성공단 직원 등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을 위해 한국 정부는 뭘 했느냐는 불만이 쏟아진다. 또 미국의 전직 대통령은 자국민을 구출해왔는데, 한국의 현직 대통령은 오히려 지난 5월 방한한 클린턴에게 방북을 제안한 전직 대통령(DJ)의 조언을 '포괄적으로 무시' 해왔다.

2000년 10월 방북 당시 평양은 평화를 원했다. 당시 익명을 요구한 북한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6·15 선언은 '민족의 행운'이다. 이 행운을 못 잡으면 민족 간에 크나큰 불행이다. 두 정상이 약속한 것을 못 지키면 그 후과를 누가 원위치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한 반작용의 여파는 감당하기에 너무 클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15년 전에 김영삼 정부가 했던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이번 북미협상처럼 '철천지 원쑤'와 '비수교국'끼리도 대화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실용외교다.

8·15가 멀지 않았다. 북미가 2000년 10월 공동 코뮈니케를 새로운 북미협상의 출발점으로 삼듯이, 이명박 정부도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9년 만에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계기를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