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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가 유괴당했다!

[리뷰] 하라 료 <내가 죽인 소녀>

등록|2009.08.08 16:34 수정|2009.08.11 10:35
'유괴'라는 범죄는 잔인하다. 범행의 대상이 자기방어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인데다가, 범인의 요구대로 돈을 넘겨주더라도 유괴된 아이는 살해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유괴당한 아들, 딸이 시간이 지난후에 시체로 발견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끔찍할까.
범인이 검거되고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더라도 마찬가지다. 유괴와 감금의 기억은 어린아이의 정신세계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주기 마련이다.

그 기억은 성인이 된 후에도 악몽처럼 때때로 되살아날 것이다. 초조와 불안으로 자식이 무사하기만을 기다리는 부모에게도 커다란 상처가 된다.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유괴'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분노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라 료의 1989년 작품 <내가 죽인 소녀>도 이런 유괴를 소재로 한다. 지금이야 감식과 추적에 필요한 온갖 전자장비들이 많지만, 20년 전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소녀를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범

<내가 죽인 소녀>겉표지 ⓒ 비채


작품의 시작은 '사와자키'라는 이름의 사립 탐정이 한 가정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사와자키는 '행방불명된 가족의 문제를 상의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이 가정을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꼬여간다.

집 주인은 사와자키에게 '내 딸은 안전하냐'는 질문을 하고, '가방안에 돈이 있으니 가져가고 딸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탐정이 졸지에 유괴범 취급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집 안에 잠복해있던 경찰들이 한꺼번에 나와서 사와자키를 현행범으로 연행해간다. 사와자키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로 끌려가고, 자신의 신분과 방문경위 등을 설명하지만 경찰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실제로 사와자키가 방문한 집에서 유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유괴된 아이는 11살의 소녀인 마카베 사야카. 나이는 비록 11살이지만, 이미 음악계에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소녀다. 미국에서 교향악단과 함께 공연을 할 정도로 일본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모와 음악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소녀가 어느날 갑자기 유괴범에게 납치된 것이다.

경찰은 신고를 받은 시점부터 바쁘게 움직이지만 단서는 거의 없다. 유괴범은 이후에도 계속 협박전화를 걸지만 항상 짧게 끊기 때문에 위치파악이 쉽지 않다. 게다가 부모에게 6천만엔이라는 거액을 요구한다. '범인을 잡을 생각하지 말고, 딸의 목숨을 걱정하라'라는 말을 하면서.

한 술 더 떠서 유괴범은 6천만엔을 전달할 인물로 사와자키를 지목한다. 사와자키가 직접 차에 돈을 싣고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경찰과 사와자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찰입장에서는 용의자 또는 공범처럼 보이는 사와자키에게 돈을 전달하게 해도 괜찮을까? 아니 사와자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소녀의 유괴사건에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괴범은 반드시 잡힌다

영화 <그놈 목소리>처럼 미제사건으로 남는 경우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유괴범들이 십중팔구 검거된다. 유괴범들은 계속해서 피해자 가족과 연락해야 하기 때문에 단서를 많이 남기고, 유괴사건에는 경찰의 대응강도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사건은 피해자와 주변 인물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된다. 평온하던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내는데 유괴만큼 적당한 범죄도 없을 것이다.

<내가 죽인 소녀>도 마찬가지다. 사야카가 유괴되자 어머니는 패닉상태에 빠지고 아버지는 돈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사야카에게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해주던 외삼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딸처럼 아끼던 조카가 유괴되자 분노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연관되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대부분의 유괴는 돈을 목적으로한 범죄이지만, 원한관계 때문에 발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89년을 무대로 해서인지 사건수사에 사용되는 첨단장비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승용차에 부착할 작은 위치추적기도 없고, 휴대폰도 없다. 고작해야 걸려오는 전화를 역탐지 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경찰의 수사보다는 주변 인물들에게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충격을 받은 가족, 아버지와 등을 돌리고 사는 자식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고군분투 등.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추리소설이라면 사회추리소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내가 죽인 소녀>는 그와 거리가 멀다. 사회문제는 모두 제쳐두고 오직 사건과 인물에만 집중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와자키 시리즈' 중에서 두 번째 편이다.

덧붙이는 글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지음 / 권일영 옮김. 비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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