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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협? 회사는 모두 자르고 싶겠죠"

[현장] 쌍용차 사태는 끝났지만 갈등은 계속된다

등록|2009.08.10 20:59 수정|2009.08.10 20:59
"합의안(에 나온 인력운영 비율)은 숫자일 뿐이다. 내일부터 인원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해야 하는데, 실무협의할 사람들이 대부분 유치장에 있다. 어떻게 협의하겠냐." (쌍용차 조합원 A씨)

"회사는 (애초 구조조정안대로) 2646명 다 자르고 싶어 한다. 인사발령하면서 다른 팀으로 보낼 게 뻔하다. 예를 들어 조립공장에서 몇 년 동안 볼트를 조이던 사람한테 도장공장에서 페인트 뿌리는 일을 시킬 것이다.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조합원 B씨)

쌍용차 노사가 대타협을 이룬지 4일째가 되는 10일 오후,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앞에는 노동자 20여 명이 모여있었다. 이날 법원에서는 쌍용차 파업의 '주동자' 42명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열렸다.

'단순 가담자'인 조합원들은 연행된 지도부가 포승줄에 묶여 법원에 들어올 때마다 일어나 "몸은 어떠세요?" "형님, 힘내십시오" 등의 격려를 보냈다. 연행된 지도부들은 밝은 표정으로 "예, 괜찮습니다" "네가 고생이 많다"고 답한 뒤 사라졌다.

'동지'들이 법정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조합원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들은 이날 종일 법원 마당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 10일 오후 평택역 앞 거리에 "쌍용자동차 노사 모두 고생하셨습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 권박효원


"야, 너네 아빠는 죽었다며?"...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싸움

지난 6일 쌍용차 노조와 사측은 '희망퇴직 52 : 무급휴직 48'이라는 인력운영안에 합의했다. 또한 형사상 책임을 최대한 선처하도록 노력하고 민사상 책임은 회생계획 인가가 이뤄지는 경우 취하하기로 했다.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과 김경한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5일 "자진해서 6일까지 공장을 나서는 사람에 대해서는 최대한 선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타협 다음날인 7일 경찰은 쌍용차 노조와 민주노총을 상대로 5억48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내고, 8일 한상균 노조지부장 등 4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평택공장 '외부세력' 사무실에서 이념서적 70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는 등 사태는 공안 사건으로까지 번져갈 조짐이다.

대타협 다음날부터 조업 준비에 들어간 쌍용차 사측은 아직 농성에 참여했던 조합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정상조업'이라는 리본이 있어야 평택공장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한 조합원은 "공장 청소를 하는 파업 노조원은 없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공장 안에 못 들어간다, 뭘 좀 알고 써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법원에서 만난 조합원들은 "회사와 경찰이 협상 전에는 최대한 선처하겠다고 하더니 돌변했다, 아예 노조의 싹을 자르려 한다"고 입을 모았다. 큰 희생 끝에 노조가 양보를 했는데도, 사측이 노조 무력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회사가 '52 : 48'이라는 합의안을 이행할 뜻이 없다"면서 불신을 나타냈다. 조합원 A씨는 "시간을 줘서 구체적인 인원에 대한 협의를 해야 하는데, 내일(11일) 실무협의 해야 할 사람들이 다 연행됐다"고 말했다.

정리해고 대상이 아닌 이른바 '산 자'인데도 파업 농성에 참여했던 조합원 B씨 역시 '정상조업' 리본을 받지 못한 채 신분이 불안정한 상태다. 그는 "파업에 동참한 '산 자' 동료들은 이미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도 곧 인사위에 회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그만두면 회사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라면서 일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조합원들은 희망퇴직과 무급휴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음이 '반반'이라고 했다. '회사에 정이 떨어졌다, 더 다니기가 싫다'는 마음과 '누구 좋으라고 그만두냐, 끝까지 남겠다'는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있었다.

공장을 나오고 처음 맞는 월요일, 이들은 벌써 해고의 심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조합원 C씨는 "다들 공장에 들어가 있는데 나는 딸들 유치원이나 학교 보내고, 내가 쉬니까 아내는 돈 벌러 가고, 이게 뭔가 싶었다"면서 "쓸모없는 놈이 된 기분이고 미칠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너네 아빠는 죽었다' 하면서 싸움도 한다더라"고 전했다.

생산설비 지킨 까닭? "우리가 공장의 주인이다"

77일 점거농성 끝의 자유도 잠깐. 아직까지 조합원들은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먹밥에 길들여진 위장과 대장은 '집밥'을 견디지 못한다. 조합원 D씨는 제대로 된 밥을 먹다가 설사까지 했다고 했다.

신체적 후유증보다 심각한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다. B씨는 "어젯밤에는 사측 용역에게 맞고 칼에 찔리는 꿈을 꾸다가 두 번이나 깼다"고 했다. 이날 법원에 모여있던 조합원들은 대부분 인터뷰도 거절했다. 이야기해봤자 화만 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언론에 대해서도 불신이 컸다.

조합원들은 특히 자신들을 '폭도'로 묘사한 보도를 보면서 분노했다. 농성장에 생수와 라면이 쌓여있었다는 기사에 대해 "500~600명이 먹으면 금방 소진되는 양이다, 대의원·조합원 할 것 없이 다들 에어컨 냉각 과정에서 나오는 물로 식수 만들어 먹고 하루에 주먹밥 1~2개 먹으면서 버텼다"고 반박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농성장 상황이 열악했던 만큼, 그 와중에도 생산설비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B씨는 "단전조치 당일(2일) 누구랄 것 없이 비상발전기를 돌려 도료가 굳는 것을 막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모였다"고 전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체감온도가 40℃까지 올라가는 농성장에서 기계가 과열될까봐 선풍기로 열을 식혔다고 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조합원들이 아무 불평도 없더라, 우리가 공장의 주인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버텼는데도 해고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상처는 깊다. 공통적으로 협상 결렬 이후의 며칠을 '가장 힘든 시절'로 기억했다. 특히 타결 당일 마지막 보고대회는 울음바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끝까지 남자"면서 울고, "이제 할만큼 했다"면서 울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서로 부둥켜안으면서 울었다고 했다.

B씨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은 아니었다, 다들 만감이 교차했다"고 전했다. 그는 사실 끝까지 남고 싶었다고 한다. 마지막 며칠 동안 농성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밉거나 싫다는 게 아니다, 70일 넘게 함께 있었던 것도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조합원들, 공장에 돌아갈 수 있나

과연 회사가 협상을 성실히 이행할지 현실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미련은 더 컸다. 이들은 '패배'의 원인이 물리적인 힘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당성에서 밀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B씨는 "우리는 볼트 조이는 노동자라서 싸움의 아마추어이고 경찰특공대는 테러를 진압하는 프로다, 그래서 졌다"고 강조했다. A씨는 "조금씩 피 말리는 고사작전 때문에 많이 무너졌다"면서 "이후 법적인 해고무효 투쟁까지 1년 반에서 3년까지도 생각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쌍용차 사측은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인 7일부터 공장 시설물을 점검하고 조업 준비에 들어갔으며, 예상보다 시설상태가 양호해 오는 12일부터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날 평택 시내에는 "극적 대타협, 쌍용차 가족 수고하셨습니다", "쌍용자동차 노사 모두 고생하셨습니다"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러나 77일의 점거농성 가운데 생산설비를 '양호'하게 유지했던 파업 조합원들의 미래는 여전히 캄캄하다. 조업 정상화를 이틀 앞둔 가운데, 쌍용차 노사의 상생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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