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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농구, 97년 '리야드의 기적'을 다시 한번

등록|2009.08.13 11:13 수정|2009.08.13 11:13
한국농구는 벼랑끝에 과연 기사회생할수 있을까. 12일 중국 텐진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 결선리그 E조에서 이란에서 82-66으로 완패한 한국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며 토너먼트에서 또 다른 중동의 강호 레바논을 만나게 되어 우승 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레바논은 지난 2007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4강전에서 한국에 고배를 안겼던 팀. 당시 한국을 상대로 32점을 몰아넣었던 레바논의 에이스 파디 엘 카디브가 건재하고, 미국출신 귀화 선수들이 즐비하여 이란 못지 않은 강호로 꼽힌다.

설사 레바논을 이긴다 할지라도 4강에서는 아시아 최강 중국과 만날 것이 유력시되어 한국의 우승은 이래저래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한국의 역대 아시아선수권 대회 최저 성적은 지난 2005년 카타르 도하 대회에서 기록했던 4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이란전 완패는 한국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공수에 걸쳐 높이와 스피드, 골밑과 외곽슛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이란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전력으로서는 도저히 우승이 힘들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한국농구는 지금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기를 극복하고 정상까지 올랐던 경험이 있다. 한국농구의 아시아선수권 도전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는 97년 '사우디 리야드의 기적'을 되새겨봐야 할 이유다.

올해로 25회째를 맞이하는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대회(ABC)에서 한국이 우승의 감격을 맛본 것은 단 두 번(1969, 1997)뿐이다. '만리장성' 중국이 14회로 가장 독보적인 최다우승 기록을 보유한 가운데, 60~70년대 아시아농구의 강자를 호령한 필리핀이 5회로 2위, 한국과 일본이 각 2회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지난 2007년 우승팀인 이란은 중동팀으로서는 유일하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바 있다.

한국은 아시아선수권에서 준우승만 무려 11회나 기록하며 '2인자 징크스'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중 9번을 결승에서 중국의 벽에 막혀 분루를 흘렸다. 국제무대에서 한국농구의 화두가 언제나 '만리장성' 타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국농구가 마지막으로 아시아 정상에 오른 것은 1997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19회 대회였다. 당시 한국은 프로화 원년을 맞이하여 소위 '농구대잔치 세대'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정광석 감독과 김동광 코치가 지휘봉을 잡고, 강동희, 이상민, 전희철, 정재근, 문경은, 우지원, 김승기, 이은호 등이 주축을 이뤘다.

공교롭게도 당시 대표팀은 역대 '최약체'로 꼽혔다. 지금도 아시아 정상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당시 대표팀을 둘러싼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판스타였던 허재가 음주파문과 개인 사정 등 이런저런 문제로 대표팀에 합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골밑을 책임지던 현주엽은 출국 전 연습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졌고, 서장훈도 중이염에 걸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주축 선수들을 모두 잃어버린데다 베스트 멤버에 2M 이상의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꼬꼬마 라인업'으로 아시아의 장신팀들에 맞서야 했던 한국의 전망은 극히 어두웠다. 국내·해외 언론에서 모두 한국의 우승 가능성에 거의 기대를 걸지 않는 분위기였다.

예선전을 3전 전승으로 마친 한국은, 8강 첫 경기에서 높이의 한계를 드러내며 숙적 일본에 덜미를 잡혀 위기를 맞이했다. 아시아선수권에서 최초로 예선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대표팀을 엄습했다. 국내에서는 벌써부터 대표팀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치 이란전에 패배한 직후, 2009년의 대표팀이 처했던 상황과 흡사했다.

하지만 대표팀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정광석 감독과 김동광 코치는 '다시 시작하자'며 주눅든 선수들을 다독였고, 심기일전한 대표팀은  이란과 대만을 잇달아 제압하고 준결승에 올랐다.

예선 일본전 패배로 한국은 예상보다 빨리 최강 중국을 만나게 되었다. 중국은 당시 아시아 최고의 빅맨으로 성장중이던 왕즈즈를 중심으로 대회 6연패에 도전하던 절대강자였다. 그러나 예선부터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어느덧 독기를 품은 태극전사들은, 중국의 장신벽에 주눅들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맞섰다.

전희철(198cm. 현 서울 SK 코치)은 이 대회가 배출해낸 최고의 히어로였다. 원래 파워포워드였지만 현주엽과 서장훈의 공백으로 졸지에 대표팀 최장신이 된 전희철은, 대회 내내 센터 역할을 맡아 210cm가 훌쩍 넘는 거구의 아시아 센터들에 맞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흔히 국내 무대에서 몸싸움을 기피한다는 편견을 무색케하듯, 전희철은 대회 내내 과감한 몸싸움과 투지를 불사르며 한국의 골밑을 굳건히 지켰다. 전희철과 호흡을 맞춰 골밑을 지킨 또 다른 단신 빅맨인 정재근(192cm. 전 KCC)의 투지도 돋보였다.

한국은 전희철이 내외곽을 넘나드는 전천후 득점력으로 중국의 센터진을 골밑에서 끌어내면 강동희·이상민의 투 가드 시스템이 지공과 속공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게임운영으로 상대의 혼을 빼놓았다. 경기 내내 높이의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한 중국은 한국의 '스몰라인업'과 템포 바스켓에 농락당하며 시종일관 끌려다녔고, 한국은 86-72로 예상을 깬 완승을 거두며 결승에 올랐다. 아시아선수권 대회 토너먼트에서 중국 징크스를 넘어선 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마지막 상대는 예선에서 빚을 남겼던 일본이었다. 일본도 최장신센터 야마자키(217cm)를 앞세워 높이가 위협적인 팀이었다. 한국은 중국전을 마치고 전희철이 탈진 증세를 보이며 링겔을 맞아야 했고, 주축 선수들 대부분도 사우디의 폭염과 빡빡한 경기일정 속에 체력부담을 호소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을 힘겹게 물리치고 다잡은 우승컵을 일본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투지가 선수들을 다시 일으켜세웠다.

한국은 결승전에서 경기 내내 일본과 물고물리는 접전을 거듭했다. 주포였던 문경은이 일본의 수비에 막혔고, 강동희(현 동부 감독)와 이상민도 체력저하로 중국전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실질적인 전술운영의 전권을 쥐고있는 김동광 코치는 국제무대에서 알려지지 않은 김승기(동부 코치)를 전격 투입하며 반전을 노렸다. 뛰어난 돌파력을 앞세워 '터보 가드'로 불리우던 김승기는 지금으로 치면 양동근과 비슷한 스타일로 단신이지만 힘이 좋고 스피드가 빼어나서 빠른 템포의농구에 강점을 보이던 선수였다. 김승기는 결승전에서 17점을 뽑아내는 깜짝 활약으로 경기의 흐름을 한국 쪽으로 가져오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한국은 후반 2분여를 남기고 일본에 76-74로 역전당하여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위기에서 문경은과 전희철의 슛이 연거푸 터지면서 결국 2점차의 짜릿한 역전승(78-76)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선수들은 대회가 끝난 이후, 정광석 감독과 김동광 코치를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다. 69년 제5회 대회 우승 후 무려 28년만이자, '농구대잔치 세대'가 일궈낸 최초의 성인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모두가 역대 최약체라고 손가락질하던 편견과 우려를 딛고 거둔 우승이기에 더욱 값진 의미가 있었다.

대회 내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전희철은 아시아선수권 MVP로 선정됐다. 일선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을 정광석과 김동광, 두 지도자는 완벽한 팀워크와 분업화 체제로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합작해내며 다시한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은 97년 아시아선수권 우승팀 자격으로 이듬해 98년 그리스세계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다.

97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은, 흔히 2002년 아시안게임 우승에 비하여 팬들의 뇌리에 그리 강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당시 홈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 비하여 TV중계 등의 문제로 많이 알려지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97년 아시아선수권은 한국이 지난 2009년 일본 동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이전까지 원정으로 치러진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마지막 기록이다.

특히 안팎으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 기적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97년 사우디 '리야드의 기적'은 12년만의 아시아정상탈환에 도전하는 지금의 대표팀에게도 '불가능은 없다.'는 자신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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