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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지절로 나오지, 풍 나와부리지"

진안 백운 사람들의 삶 이야기 <황톨톨이가 옛날엔 정짓담살이 혔지>

등록|2009.08.15 14:03 수정|2009.08.15 14:03

▲ <황톨톨이가 옛날엔 정짓담살이 혔지> /정병귀 외 지음 ⓒ 이매진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책들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글과 책들 속에 촌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있다 할지라도 쓰는 사람에 의해 각색되거나 덧입혀져서 나온다.

촌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고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부분 글을 쓰는 이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사고들이 많이 들어간다. 그 이야기 속에 글쓴이의 관점이나 사상을 집어넣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하나의 작품이지 오롯한 촌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팔구십년이나 백년을 살아온 사람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고 소설도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달픈 시간과 격동의 역사적 현장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드신 어른들은 종종 '내 살아온 이야기하면 몇 권의 책이 될 거여'라는 소리를 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책이 출간되고 있다.

희망제작소가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총서로 내놓고 있는 <황톨톨이가 옛날엔 정짓담살이 혔지>엔 진안 백운 사람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살아온 이야기

사실 이 책은 뭐 특별한 책은 아니다. 구름도 쉬어가는 땅이라는 백운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현재 백운면에는 최고령자인 황판이(102세) 할머니와 한 살 적은 정도순(101세) 할머니처럼 백 세가 넘은 분이 두 명, 90이 넘은 분이 열여섯 명이나 된다고 한다. 책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길 통해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럼 몇몇 백운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딸 넷, 아들 둘. 육남매나 낳았어. 낳는 대로 낳게 그때는. 마흔두 살까정 난 거시 그렇게 낳써. 그때는 뭐 못 낳게도 안 혀. 그랬어도 그것밖에 안 낳써. 마흔둘까지 낳써, 막둥이. 그양 그때는 혼자 낳았지. 애기는 지절로 나오고, 지절로 낳지 누가 받아. 퐁 나와부리지. 친정엄마가 누가 오간디. 친정이 먼디. 그때는 그럴 줄 앙게 괜찮아. 아이고, 그게(아기 낳는 일) 큰일이여. 애기 다 낳아 뿡게로 그 걱정은 없드만. 아, 수월허니 난다고 해도 죽냐 사냐 하잖아. 사람 살다가 죽어도 아픈디. 사람 속에서 사람 나올 땐 어쪄."

구름다리에 살고 있는 안금순씨의 말이다. 마흔 둘에 막내아들을 낳고 허리가 반으로 굽어버렸다. 그래도 아침부터 꼼지락대며 들로 나간다. 수레에 몸을 의지한 채 말이다.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의 말을 들으면 지금 결혼한 여자들이 아기 낳는 모습을 상상하긴 힘들 것이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엔 산달이 돼도 모를 심거나 김을 매러 나갔다. 그러다 보면 산통이 온다. 병원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집에 오다 논두렁에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었었다. 누가 받아주는 사람도 없지 혼자 애기를 낳았지만 하루 이틀 있다가 다시 들로 나갔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70년도까지만 해도 있었던 일이다.

<황톨톨이가 옛날엔 정짓담살이 혔지>엔 모두 이런 삶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어떤 꾸밈도 없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입말을 그대로 옮겨 놓아 생생함을 느낀다. 당시 고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초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 하나만 더 보자.

"그때는 서로 못산게 한 집에서 살도 못혔어. 없이 살아서 (큰누나는) 사방 정짓담살이 가고, 내가 내 발로 걸어다님서 문전걸식 혔당게. 옛날에는 정짓담살이라고 혔어. 지금은 식모살이라고 헌디. 어떻게 살았는가 모른당게. 황톨톨이도 넘의 집 가서 고상 많이 혔지. 넘의 집 가서 밥 혀주고 뭐 심부름허고. 정짓담살이를 혔지."

번암 마을에 살고 있는 황용기씨의 이야기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데다 워낙 가난하여 이러저리 남의 집 살이를 하거나 떠돌이 생활을 해서 어머니의 기일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워낙 가난하여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큰 누나도 정짓담살이(식모살이)를 했고 황톨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동생도 정짓담살이를 했다. 자신은 고입살이(고용살이<머슴>)를 했다. 그러다가 징용에 끌려갔다.

"초근목피로 풀잎 먹고 다 살았어. 둥굴레 캐다가 고아서 먹고, 쇵키(소나무 안 껍질) 벳겨서 먹고, 쑥 뜯어다 먹고, 그놈(왜놈)들은 행여나 나락이나 뭣이나 독아지나 어디 묻어두고 감췄는가, 창 갖고 다니면서 땅 막 쑤시고, 밥 히먹었는가 밥 조사하러 댕기고 왜정 때. 하이고 그놈의 세상 그리도 안 죽고 지금까지 산 것이 다행여."

어느 시대나 잘못된 시대를 만나면 고생하는 건 없는 사람들이다. 뭐라도 있는 자들은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해서 떵떵거리고 산다. 황용기씨 같은 사람들의 삶이 어찌보면 당시 민초들의 일반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황용기씨는 대판으로 징용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충격적인 이야기도 풀어놓고 있다.

"태평양전쟁 적에 그놈들이 이겼으면 지금 우리 여기에 못 살아. 걔들이 어떻게 계획을 세웠냐. 우리 한국이 살기가 좋잖여. 지진이 나 뭣 혀. 걔들이 계획을 세우기를 태평양전쟁 이겼으면 바꿀라고 혔어. 저그가 우리 한국 와서 살고, 한국사람 싹 교체 헐라고 혔었어. 참말로 그 때 설움 설움이 말로는 못혀."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말의 원형

이 책은 여섯 사람의 마을 조사단이 백운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기록한 내용이다. 기록 양식에 일정한 틀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출생, 어린 시절의 모습, 결혼과 가족 관계, 군대생활, 시집살이, 농사일과 자녀 등의 생애사가 기록되어 있고 마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긴 개인의 이야기면서 마을의 이야기고 잊혀진 역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농촌은 공동체의 공간이다. 혈연의 이어진 공동체는 아니지만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게 농촌 공동체다. 그런데 그 공동체로서의 농촌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젊은이가 사라진 농촌은 노인들의 마을로 변해갔고 공동체로서의 모습도 무너지고 있다.

근래 들어 귀농이나 귀촌, 귀향 등의 형태로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일부 농촌에 해당된다. 전형적인 논농사를 짓는 마을엔 귀농 인구가 거의 없다. 그만큼 농촌은 절박하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제작소에서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총서의 일환으로 내놓고 있는 책들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길 미래의 기억을 가질 사람들이 앎으로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려 죽어가는 농촌이 아니라 살 수 있는 농촌의 모습을 다시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을 읽다보면 잊혀졌던 우리말의 원형의 모습들도 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와 의미를 갖게 한다.
덧붙이는 글 <황톨톨이가 옛날엔 정짓담살이 혔지> /정병귀 외 지음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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