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40대 '아저씨' 뒤를 쫓으셨나요 민주주의 마지노선마저 무너지나
[주장] 믿기 힘든 민간인 사찰, 기무사 해체는 우리시대의 뒤늦은 책무
▲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쌍용자동차 노조 농성 현장에서 활동했던 국군기무사령부 소속 S씨가 소지했던 수첩의 민간인 사찰 메모와 테이프 등을 공개하고 있다. ⓒ 남소연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공개한 기무사 요원인 신모씨의 수첩 등은 그동안 풍문으로만 떠돌았던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결정적 물증이다.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순히 특정인 몇몇에 대한 사찰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무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는 휴가병을 쫓고 있었다"고 발뺌했지만, 사찰 대상이었던 최석희 민주노동당 비상경제상황실장은 40대 '아저씨'였다. 왜 기무사는 군대와 전혀 상관없는 아저씨의 뒤를 밟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보자. 왜 군이 민간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가? 국정원과 경찰, 검찰이 이미 광범위한 정보수집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밥줄이다. 그런데 군까지 왜?
1989년 노태우 정권시절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는 '청명계획'이란 것을 준비했다. 친위쿠데타 계획이었는데 계엄이 선포되면 민간인 감찰 대상이었던 민주인사 923명을 예비검속한다는 계획이었다. 예비검속 A급 대상에 당시 노무현 의원과 이해찬 의원 등이 있었고, C급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과 현재 용산 참사현장을 지키고 계신 문정현 신부님도 포함되어있었다.
청명계획은 당시 수세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이 고려했던 '해법'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노태우는 친위쿠데타가 아닌 3당 합당을 통해서 이 국면을 타개해나갔다. 진정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정권출범 이후 뭐 하나 되는 것이 없는 이명박 정권 역시 나름의 '해법' 중 하나로 군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쿠데타까지야 아니겠지만 '간첩단' 사건과 같은 형식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잡아넣을 준비라고 볼 개연성은 다분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누구를, 무엇을 위함인가?
우리사회의 '영점', 군에 대한 민간우위의 원칙
▲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12일 오전 "군 기무사는 매우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여 대규모 민간인 사찰을 자행해왔다"며 기무사 소속 군인의 메모수첩을 증거로 제시했다. 사진은 민간인을 사찰한 기무사 소속 군인의 작전차량증. ⓒ 이정희 국회의원실
대부분의 사회는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나름의 '영점(zero point)'을 가지고 있다. 그 영점이란 사회발전의 부침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 이하로는 갈 수 없다는 구성원들의 합의가 이루어진 지점이다. 독일사회에서는 나치와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다. 독일은 법으로까지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긍정하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정해놓았는데, 이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욕과 학살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군에 대한 민간우위의 원칙', 즉 군과 민간영역의 분리, 군에 대한 민간권력의 통제는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이라도,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군의 정치개입이 있을 수 있다고는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선 몇 개월 전에 컴백한 이회창도, 이름도 민망한 친박연대도 다 용서할 수 있지만, '군의 개입은 안된다'가 우리 사회의 상식이며 영점이다.
이러한 영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하에서 벌어진 수많은 고문과 살인을 딛고, 80년 광주와 87년 항쟁 위에서 만들어진 '영점'이다. 이 과정 속에서 문민정부를 시작했던 YS의 가장 큰 과제 역시 군부에 대한 통제였다. YS는 "내가 하나회 숙청 안 했으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못됐다"고 말하는데, IMF 환란의 주인공이 하기엔 민망한 말이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기도 하다.
인적 청산의 과정에서 하나회 숙청이 있었다면, 제도적 장치로서는 보안사와 기무사의 축소과정이 있었다. 보안사가 어떤 곳인가?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은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 사령관이었고, 광주학살의 명령이 내려진 곳 역시 보안사였다. 청와대에서 500여m의 거리에 있었던 보안사 소격동 청사는 그것이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기 버릇 개 못준다 했던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안사는 노태우 정권시절 청명계획이란 친위쿠데타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10월 당시 보안사 소속 이병이었던 윤석양씨가 민간인 주요 인사 수천 명을 사찰하고 있었음을 폭로함으로써 더 이상 보안사가 민간인 사찰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조직개편과 '기무사'로의 명칭 변경이 뒤따랐다. 물론 그 이후에도 민간인 사찰에 대한 의혹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민간우위의 원칙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독대를 폐지하면서, 기무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부활한 독대, 부활한 사찰
▲ 기무사 소속 군인의 사찰 메모(7/20~23) ⓒ 이정희 의원실
기독교 신자라서 그러신지 '부활'을 좋아하시는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기무사와의 독대를 부활시켰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 조직의 위상을 결정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안경환 전 위원장은 퇴임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단 한 차례의 업무보고도 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치욕으로 삭이겠다고 했다. 기무사 독대는 부활시키고 장관급인 인권위원장의 업무보고는 거부한 것이다. 참 일관성 있다.
죽다 살아난 기무사는 충성을 바치고자 했을 것이다. 독대 보고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할 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사실 이번 정권에서 국방부의 역주행이 두드러졌는데 그 중에서 기무사의 노력이 많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전 국민의 웃음거리였던 국방부의 '불온서적' 선정이 바로 기무사의 작품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민간인 사찰은 단순히 기무사의 과잉충성만으로 볼 수 없다. 실제 이정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경찰과의 공조가 진행되고 있으며, CCTV 설치 등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사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상층부의 지시, 혹은 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장비구입'과 '거점확보'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등장하는데, 이는 민간인 사찰이 근래에 본격화되고 있거나 사찰 지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내용이다.
이제 영점까지 온 것일까? 한국 민주주의는 진정 마지노선에 서 있는 것일까? 광화문을 가로막은 컨테이너, 과잉진압으로 5명의 철거민이 죽었는데도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모습, 광장을 둘러싼 닭장차, 전직 대통령의 분향소를 짓밟는 경찰. 매 순간 순간 분노하고 좌절했지만, 어쩌면 이것은 영점으로 가는 과정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뒤에 군인이 따라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불안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이 문제에 대한 조중동의 침묵은 무섭기까지 하다. 왜 이들은 철저하게 침묵하는가? 평소처럼 그냥 작은 박스 기사로 "기무사와 민주노동당 논란" 정도로 다루거나, "이정희 의원의 자료 수집 경로가 의심스럽다" 같은 물타기도 가능할 터인데 이들은 침묵한다.
이들의 침묵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이 기무사의 언론사찰 내역을 공개해서 큰 논란이 있었을 때도 <조선일보>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0면에 2단짜리 스트레이트 기사로 처리한 것이 전부였다.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영점을. 군이 민간인을 감시하고 추적하는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이 몰고 올 폭발성을. 1990년 윤석양씨의 양심선언은 국방부장관을 사퇴시키고, 당시 보안사 사령관의 옷을 벗겼으며, 대통령의 '민간인 사찰 금지'의 약속을 이끌어냈다. 보안사 사령관 출신인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밝혀진다면 그 여파는 어디까지일까?
기무사를 해체해야 한다
1990년 10월 용기 있는 양심선언으로 보안사의 문제를 세상에 알렸던 윤석양씨는 선언 이후 군무이탈 혐의로 2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다가, 결국 붙잡혀서 2년의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그도 어디에선가 지금의 상황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념과 청춘을 걸고 했던 양심선언의 가치를 지켜주지 못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다.
보스니아에서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을 때,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인권단체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내걸었다. "잘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난 줄 몰랐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자신들이 정한 영점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담은 문구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노무현 정부시절, 검찰권력을 온전하게 통제하지 못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뼈아프게 체감하고 있다. 어쩌면 이정희 의원이 '우연하게' 입수한 그 수첩과 자료들은 우리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일 수 있다. "보안사 해체", "기무사 폐지",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사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오래 전 구호였지만, 다시 외쳐야 할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어쩌겠는가? 철저한 진상조사와 민간인 사찰내역에 대한 완전한 공개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군에 대한 민간우위를 보다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근본적인 대책 역시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국내정치에 대한 관여와 민간에 대한 사찰을 시도해온 기무사령부를 폐지하고 이 역할을 엄격하게 제한된 군사법경찰권을 행사할 기구로 대체하는 것이 하나의 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고문당했던 이들에 대한, 청춘을 걸고 양심선언을 한 윤석양씨에 대한, 군사정권을 끝낸 민주화운동에 대한 우리 시대의 때늦은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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