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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한 CEO출신 야당 당수 밀어붙이기식 독선 정치로 지지율↓

[해외리포트] 호주 야당 말콤 턴불 당수의 '날개 없는 추락'

등록|2009.08.25 15:03 수정|2009.08.28 12:11
호주 제1야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의 말콤 턴불 당수(54)는 호주 역사상 가장 재산이 많은 정치인이다. 그는 호주 경제전문지 'BRW'가 선정한 '부자 리스트 200'에서 182위에 올랐다. 호주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그런데 성공한 CEO 출신 턴불 당수가 정치인으로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호주 국민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특히 그의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분야에서조차 케빈 러드 총리에게 뒤지고 있어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 러드 총리는 외교관 출신이다.

친기업적 경제우선정책 선호하는 신자유주의자

▲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한 말콤 턴불 당수를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 디 오스트레일리안


가난한 결손가정에서 성장한 턴불 당수는 젊은 시절에 파트타임 저널리스트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성가를 얻었다. 그는 40대에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오스트레일리아> CEO, 벌목회사 <액시엄> 회장, 인터넷 회사 <오즈이메일> CEO를 역임하면서 억만장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말콤 턴불은 50살 되던 해에 '경제 정치인'이라는 간판을 달고 정치에 입문하여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렸다. 존 하워드 정부에서 초선의원이면서 환경장관에 발탁됐고, 노동당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제1야당 당수가 됐다. 정치 입문 4년만의 쾌거였고, 성공한 CEO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당수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8월 11일, 호주의 유일한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발표한 <뉴스폴> 여론조사의 총리 선호도 부문에서 말콤 턴불 당수는 17%라는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의 카운트 파트너 케빈 러드 총리는 65%다.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턴불 당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하워드 총리가 신봉하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면서 "게다가 그가복지나 환경 등의 21세기 패러다임보다는 친기업적인 경제우선 정책에 매달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지난 3월 초 이명박 대통령이 호주를 국빈방문할 즈음, 호주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 해결책으로 2차 현금보너스 지급을 놓고 여야가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당시 턴불 당수는 "중산층을 포함한 저소득층 가정에 900호주달러(약 90만원)의 현금보너스 지급해서 경기를 부양하자"는 노동당 정부의 법안을 반대했다. 그러자 러드 총리는 TV 대담프로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쏘아붙였다.

▲ 첨예하게 맞붙은 케빈 러드 총리(왼쪽)와 말콤 턴불 제1야당 당수.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일부 탐욕스런 부자들이 저질러놓은 엄청난 재앙이다. 그런데 그 피해를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는다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걸 떠나서라도, 위기에 직면한 계층을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은행 CEO 출신인 말콤 턴불 당수는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경기활성화를 핑계로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복지정책의 축소를 거론하고 있다. 그럼 서민과 노동자 계층은 항상 부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란 말인가?"

결국 74%의 지지를 얻은 현금보너스 경기부양책을 반대한 말콤 턴불 당수는 "돈을 잘 버는지 몰라도 서민계층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비판받았다.

실제로 노동당 정부가 부유층한테서 세금을 더 걷자는 법안 - 예를 들면 고급승용차 취득세 등을 올리는 방식 - 을 제안했지만, 말콤 턴불 당수와 연립당의 반대로 부결된 사건이나, 지난 8월 13일 노동당에서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도입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는데, 관련 기업의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로 연립당의 반대로 부결된 사례에서도 이런 문제점은 잘 드러난다.

이명박 대통령 "현금보너스보다는 쿠폰이 더 좋다"

▲ 낮은 지지율로 곤혹스런 표정의 말콤 턴불 당수. ⓒ 호주 국영 abc-TV 화면 캡처


바로 그 방송이 방영된 날에 이명박 대통령은 말콤 턴불 당수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연유로, 턴불 당수는 "호주의 현금보너스 정책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 대통령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저소득층에 현금을 나눠주는 것보다 쿠폰을 나눠주는 것이 더 좋다"는 답변을 건넸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턴불 당수는 그 자리에서 "한국은 환란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나라여서 이명박 대통령이야말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상"이라고 말했다. 그후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턴불 당수와 만난 사실을 그의 발언을 곁들여서 몇 차례 거론했다. 이 대통령 또한 "매사 비협조적인 한국의 야당과는 큰 차이가 난다"면서 부러움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호주는 오랫동안 그런 전통이 이어져 온다. 러드 총리도 야당 당수 시절에 국빈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내각책임제 하의 야당 당수는 정권이 바뀌면 바로 총리에 취임하는 '그림자내각'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과 턴불 당수는 여러 측면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기업 CEO가 된 기업인 출신이고 엄청난 재력가다. 그러다 보니 친기업적인 정책을 선호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턴불 당수는 지난 6월 중순, 자신에게 고급 정보를 빼돌리던 재무부 고위관리가 가짜로 만든 이메일을 근거로 케빈 러드 총리와 웨인 스완 재무장관이 자동차 판매상을 경영하는 사업가 친구에게 특혜를 주었다고 공격해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국가공무원에게 비밀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총리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만용 또한 야당 당수의 품격을 의심케 만드는 대목이었다. 더욱이 그가 자신을 돕다가 곤경에 처한 재무부 관리를 비판하면서 '버리는 카드'로 활용하자 여론은 극도로 나빠졌다. (6월 27일자 해외리포트 기사 "총리에게 부탁했다, 000을 도와주라" 참조.)

그 사건은 호주 국민들에게 '성공한 CEO 출신 말콤 턴불 당수'에 대한 희망을 접게 만들었다. 아울러 가뜩이나 노동당 정부와 케빈 러드 총리의 높은 지지율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자유-국민 연립당을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말콤 턴불 당수의 '날개 없는 추락'을 놓고 호주 정계와 언론에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맥신 맥큐 의원(원내 장관 겸임)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스타일에 실망했다"면서 "아무래도 CEO의 밀어붙이기식 마인드가 몸에 밴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의 수재로 고독한 소년시절 보내

▲ CEO 시절 부인 루시 턴불(당시 시드니 시장)과 함께 호주-미국 친선의 밤 참석. ⓒ 말콤턴불홈페이지


1954년생인 말콤 턴불 당수는 형제가 없다. 부모가 그를 낳고 나서, 9살 때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기능공이었고 어머니는 성우, 작가, 교수로 활동한 인텔리였다.

뉴질랜드의 대학교수와 재혼한 엄마가 9살짜리 아들을 두고 떠나자 턴불은 기숙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집세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를 명문사립학교인 시드니그램머스쿨에 진학시켰다. 다행히 턴불은 공부를 잘해 장학생이 됐지만 가난한 가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소년 턴불은 "내가 부자가 되면 엄마를 모시고 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시드니 법대를 졸업한 턴불은 호주 엘리트들의 꿈이었던 '로드스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했다. 그는 학생이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호주와 미국 언론에 기사를 보내는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저널리스트 수업을 받았다.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귀국한 턴불은 <채널9TV> 기자로 활동하다가 자신의 본래 전공을 따라 법조인이 됐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호주 최고의 부자 캐리 페커를 만나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를 닦았다. 그런 다음 독립해서 승승장구했다.

말콤 턴불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벌목회사 <액시엄>을 창업해서 솔로몬아일랜드의 원시림을 베어내는 일도 했고, 인터넷 서비스회사가 유망하다는 걸 눈치 채고 <오즈이메일>을 설립한 다음 되팔아서 큰돈을 거머쥐었다.

기업인으로서 말콤 턴불의 전성기는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오스트레일리아> CEO가 된 2002년 이후였다. 그는 대부분의 투자은행 CEO들이 천문학적인 연봉과 보너스를 받던 시기를 잘 활용하여 거부가 됐다. 그러나 <골드만삭스> CEO 시절에도 부패한 보험회사(HIH)와 연계되어 법정까지 가는 곤욕을 당했다.

말콤 턴불은 그렇게 벌목회사, 인터넷 서비스 회사, 투자은행 등의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흠결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야 엄마를 다시 모셔올 수 있다는 어린 시절의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돈 버는 일에 매달렸다. 그는 최근에 방영된 호주 국영 abc-TV '오스트레일리안 스토리'에 출연하여 그 대목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말콤 턴불 당수가 정치인으로 입문할 당시는 이미 부모님이 타계한 후였다. 아버지는 비행기 사고로,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 전직 연방의원 의원이면서 법무장관이었던 장인 톰 휴즈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턴불이 어머니에게 가졌던 감정은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과오를 사과하는 것도 중요하다"

▲ 말콤 턴불 당수의 정치적 위기를 보도한 호주 국영 abc-TV. ⓒ 호주 국영 abc-TV 웹사이트


8월 11일 오전, 호주의 행정수도에 위치한 연방국회의사당 입구에는 수십 명의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6주 동안의 '겨울 휴회'를 끝낸 의원들이 의사당으로 복귀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역구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 의원들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왔고, 많은 숫자의 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의사당에 도착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특별한 모습의 의원들만 TV 카메라에 잡힌 탓인지 그날따라 조깅복 차림의 의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뉴스의 하이라이트는 말콤 턴불 당수에게 "미숙하고 오만한 정치인"이라고 쏘아 붙인 같은 당 소속 월슨 터키 의원의 발언이었다. 안팎으로 수세에 몰린 말콤 턴불 당수는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퇴 압력을 받았던 말콤 턴불은 결국 제1당수직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당수직 유지를 적극 지지했던 앤드류 롭 의원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턴불 당수가 가짜 이메일 사건으로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성공한 CEO 출신으로서의 장점을 살려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8월 14일 호주 국영 abc-TV <블랙퍼스트 쇼>에 출연한 시사평론가는 "말콤 턴불 당수는 아직도 가짜 이메일 사건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가 최악의 지지율과 당수직 사퇴압력을 잘 견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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