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삵야생의 눈빛은 인간에 대한 경고다. ⓒ 최성수
시골의 여름 생활은 해가 중천에 뜨기 전 오전이 매우 소중한 때다. 지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천하장사도 배겨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오전 은행나무를 심은 묵밭의 풀을 세 시간 정도 베고 나자, 온 몸이 땀범벅이다. 지하수를 퍼 올린 물에 땀을 씻고 나자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마당가에 나와 서서 앞 산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집 앞 개울과 옆 개울에는 엊그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물소리가 장하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중 하나가 개울물 소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집 아래쪽에서 고함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들려온다.
"아으으으---."
물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리라서 누가 산 속에 들어와 호연지기를 뽐내기라도 하는가 보다 하고 피식 웃는다.
잠시 후, 집 옆 개울 건너편 쪽으로 트럭이 한 대 들어온다. 스적스적 나무다리를 건너 가보니 인삼 농사를 짓는 황 선생 부부다. 그런데 부인이 무엇에 놀랐는지, 얼굴이 백지장이다.
"집사람이 산책삼아 걸어오다가 산짐승을 봤대요. 인삼밭에서 나오는 놈과 마주쳤다는데, 놀라서...."
황 선생의 말끝에 그의 아내가 덧붙여 설명을 한다.
"눈이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저를 보고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세우는데, 발도 떼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런 말을 하는 부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공포감이 가득했다.
"족제비 아닌지 모르겠네요."
▲ 삵2숨을 헐떡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 최성수
작년에 은행나무 밭의 풀을 베다가 난데없이 토끼가 달려 나오고, 그 뒤를 쫓던 족제비를 본 적이 있는 터라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웃었다. 이곳 보리소골은 워낙 깊은 산골이라 온갖 짐승들을 가끔 마주치기 때문에, 산짐승 보고 놀란 부인의 표정이 한 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져 한 숨 잘 생각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트럭을 몰고 골짜기를 떠났던 황 선생이 다시 차를 몰고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저 아래 그 짐승이 움직이지 않고 숨어 있어요. 덫을 매달고 있는 것 같아요."
황 선생의 말에 나는 조심조심 짐승이 숨어 있다는 곳으로 가 본다. 길 가 풀숲 그늘에 등만 보이는 짐승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다. 등 쪽으로 검은 반점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이 표범 같다. 몸집은 큰 고양이만 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을 풀숲에 감추고 있어 무슨 짐승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만 가 볼게요."
아까의 공포가 다시 되살아나는지, 황 선생 부부는 내게 얼른 작별의 말을 하고 차를 몰고 내려가 버린다. 차 소리가 나는데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덫에 걸려 달아날 수가 없는 처지에 빠진 듯했다.
나도 어찌 할 방도가 없어 한참 짐승을 바라보기만 했다. 녀석은 숨을 몰아쉬다가 가끔씩 온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그대로 두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기에는 겁이 나기도 했다.
한참 생각을 하다가, 아랫마을에 사는 친척 동생이 떠올랐다. 오래 고향 마을에 살아서 농촌 생활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동생이니 이런 짐승도 어떻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구리나 족제비 아닌가요? 누가 덫을 놨을까? 요즘은 덫 놓는 사람 없는데. 제가 한 번 올라가 볼게요."
동생은 내 전화를 받고 그렇게 대답하더니, 잠시 후 차를 몰고 올라왔다.
짐승이 누운 풀숲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동생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살쾡인데 앞발이 덫에 걸렸네요. 풀어줘야 겠어요."
▲ 삵3덫을 풀어주고 있다. ⓒ 최성수
동생은 차에서 비료포대를 꺼내오더니 짐승의 머리 부분을 가리고, 뒷발을 잡아 숲에서 끌어냈다. 밝은 데로 꺼내놓고 보니, 녀석의 등에 나 있는 반점들이 더 선명했다.
녀석은 몇 차례 동생의 팔을 물려고 으르렁거렸다. 그때마다 동생은 얼른 팔을 거둬들여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덫을 풀려고 애를 썼다.
▲ 삵4덫에서 풀려나 지친 모습의 삵 ⓒ 최성수
절체절명의 죽음을 눈앞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녀석은 독이 올라 있었다. 야생의 눈빛은 적개심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료포대를 덮고 발로 꽉 누른 채, 동생은 마침내 앞발에 걸려있던 덫을 벗겨냈다. 왼쪽 앞발이 거의 다 절단돼 너덜거리는 상태였지만, 살쾡이는 여전이 야성의 눈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경계의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살쾡이의 얼굴은 작은 호랑이 모습 그대로였다. 덫의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녀석은 덫에서 벗어났으면서도 탈진한 상태로 한동안 풀숲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십 여 분이 지나자, 녀석은 벌떡 일어나 풀숲으로 사라졌다.
한쪽 다리를 절룩이는 채로, 숲으로 사라지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흘낏 바라보았는데, 녀석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죽지는 않을 거예요.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겠지만."
동생은 녀석이 사라진 숲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간의 손에 의해 멀쩡한 다리를 잘려야 하는 삵의 비참한 현실이, 공생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경고인 것 같아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지금도 삵의 그 생생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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