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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런 비율, 명랑한 색감의 탄성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전시회

등록|2009.08.17 18:13 수정|2009.08.17 18:13

▲ 페르난도 보테르 '서커스단원들 ⓒ 페르난도보테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존 세계는 현실인가 가상인가.

지극히 고전적이다 못해 이제는 다소 진부해진 화두. 일찍이 중국의 장자 선생께서 비몽사몽 중에도 자신이 나비일지도 모른다는 과격한(?) 망상으로 시초된 논쟁을 현대에 와서 프랑스의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으로 버전업시켰고, 급기야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가 전세계를 가상현실의 급물살로 빨아들였다. 한동안 지구촌을 들썩였던 주제였건만 평민들의 삶이 워낙 힘겨운 탓인지 현실에서 가상을 솎아낼 시간과 여력은 철학자들의 몫으로 후진한 느낌이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가상은 오묘한(?) 형태로 민생(民生)에 파고들어 생활의 필수요소로 튼실하게 똬리를 튼 것 같다. 제발 기우이기를......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은 유머 넘치고 익살맞다. 진중하고 죽음의 순간을 다룬 작품도 그의 붓끝에서는 희화와 능글맞은 풍자로 범벅되어 산뜻한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남미 특유의 여유로움이랄까. 콜롬비아 출신 보테로의 전시는 넉넉한 비율과 편안한 색상의 조화로 대중들이 시름겨운 생계를 잊고 발그레한 너털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작품들로 주를 이룬다. 엄숙한 사제(司祭)나 결투를 앞둔 투우사도 둥글넓적한 비만체질로 묘사해서 장엄한 신분이나 순간조차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삶은 생사,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시간 앞에서는 무상하다는, 그래서 유쾌한 웃음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자는 취지일까. 그럴지도.

보테로의 작품은 하나같이 편안하다. 작품 대상이 전부 현실에 존재하는 리얼한 것들로, 이번 전시회에는 정물, 라틴 사람들, 투우, 고전을 재해석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렵거나 난해한 소재는 일절 배제했기에 무난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보테로의 작품에는 간과할 수 없는 요상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대상의 표현방식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고양이, 사과, 칼, 집, 사람. 대상 자체는 어디서나 흔히 보는 소재이지만 대상의 비율이나 원근감은 엉망진창이다. 원근감이나 비율은 깡그리 무시해서 얼핏 보면 거인국 사람들을 묘사한 듯한 착각마저 든다. 특히 사람의 수족과 볼륨감은 비정상이다 못해 거의 불가능한 비례로 초인적인 몸매 관리가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형태이다. 일단 불편했다. 인간과 물건의 비율을 가학적인(?) 수준으로 표현했기에 가벼운 미소로 관람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체형에 마뜩찮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기법도 보테로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뇌리에서는 어렴풋이 서늘한 육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페르난도 보테르 '춤추는 사람들' ⓒ 페르난도보테르


우리는 몸짱에 걸신들린 시대를 편력(遍歷)중이다. 황금비례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상이 수학과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 신체로 육박해서 대중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현세기는 몸짱에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로 평가되는 살벌한 시대가 아닌가. 언제부터 우리는 황금비율에 매료됐을까. 사실 보테로나 다빈치의 인체비례는 가상에서나 존재해야 될 비율이다. 내가 보테로의 신체비례에 뜬금없이 기겁한 것도 이미 몸짱 비율에 중독된 탓이려나.   

생경한 것도 익숙해지면 당연시되는 법. 어쩌면 우리는 가상의 몸짱 비율을 진작 현실로 품어버린 건 아니려나. 보테로의 기이한 비율에 희희덕거렸다면 웃통을 벗어 제친 시가의 울긋불긋한 근육남들과 복근녀에 실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오호라! 그랬다가는 열등감의 발로로 치부되리라. 가상이 현실을 전복한지 오래된 증거라고나 할까. 언젠가 이런 흐름이 뒤바뀔 수도 있겠지만 불현 듯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볼온한 일갈이 떠올랐다. 그가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저술한 <역사의 종언>에서 언명했듯이, 인류가 특정 체제나 사상, 생활방식에 길들여지면 다시 벗어나기 힘들다는 분석이 오싹하게 전신에 감싸왔다. 물론 헤겔의 역사관이 역사발전의 정황을 오도한 측면이 있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면 선뜻 내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아 두렵기까지 하다.  

보테로 전시회에는 방학 기간이라 덕숭궁 미슬관에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해맑은 그들이 동심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지만 보테로 작품의 주인공 같은 몸집이 되고자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작품과 일상의 경계가 가상과 현실의 국경선만큼이나 불분명한 시대에 왜 보테로가 희귀한 비율로 작업을 했는지 숙고해 볼 기회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을까. 부족하다 느끼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 도전하기를(http://deoksugung.moca.go.kr).
덧붙이는 글 http://botero.moca.go.kr/index.jsp. 6.30-9.17. 덕수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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