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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남과 연애결혼 하고 착한 투사가 된 딸

전실 자식이 둘, 초혼가정보다 부딪히는 게 하나 더 있지

등록|2009.08.18 10:09 수정|2009.08.20 09:59
"커피 같이 먹자구우."

자동수납기에 공과금들을 내고 은행문을 막 나서는데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따라왔습니다. 집에 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그 친구가 자판기에서 뽑아 준 커피를 받아들고 한련화가 한창인 화단가 의자에 가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친구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나더니 무척 섭섭해 하는 눈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글세 우리 딸애가 이번 내 생일엔 봉투 대신에 밥을 샀다구."
"밥도 고맙지 뭘 그래. 요즘 다들 어렵잖아."

"내 말은 결혼하더니 달라졌다는 말야. 아들이 봉투를 줘서 은행엘 왔지 뭐야. 차곡차곡 저축해 놨다가 손자녀석 중학교 입학하면 줄 거야."
"부럽네---"

내가 부러운 것은 아들이 준 돈봉투가 아니라 손자입니다. 나는 아직 사위도 며느리도 보지 못해서 손자가 없습니다. 

"어젠 손자녀석이 와서 할머니이이 하고 매달리는 거야. 용돈이 떨어졌을 땐 꼭 그런다구."
"그것도 부럽네."

"부럽기는, 돈만 받아들면 쏜살같이 달아나버리는 걸. 그때 그 새 마우스판 말야, 그걸 주려고 책장문을 막 여는데 글쎄 '할머니 나 가요오' 하면서 달아나는 거야. 기가 막혀서. 애들도 돈이 젤야 젤."

그 초록색 마우스판은 별 거 아닙니다. 친구가 나와 같이 지하상가를 지나오다가 초록색 마우스판을 발견하고 초록색이 시력에 좋으니까 손자 손녀들에게 줘야겠다면서 세 개를 사서 두었던 것입니다. 손자가 그 마우스판까지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면 아마 친구는 더욱 즐겁고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생각해서인지 조금 전과 다르게 친구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아졌습니다. 나는 혼잣말로 '대체 손자가 뭐길래' 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히죽거리며 약을 올렸습니다.

"난 셋이라구, 친손자 하나 외손녀 둘."
"누가 뭐랬어?"

태연한 척했지만 손자들 자랑을 하는 그 친구가 정말 부럽습니다. 아들 딸 모두 결혼을 해서 홀가분해진 처지도 부럽습니다. 그 친구의 아들과 딸은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 자식이 연애결혼을 하는 것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거라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부모가 발벗고 나서서 반 중매쟁이가 되어 짝을 찾아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딸은 작년까지만 해도 사십 고개에 선 골드미스였습니다. 우리집에도 골드미스가 있습니다. 친구도 나도 큰 걱정거리를 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한 목소리가 되어 딸 걱정을 하면서 이런 저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는 하였는데 이제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지난 봄에 그 친구의 딸이 이혼남과 결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딸은 근무하는 회사가 들어 있는 빌딩 안에 다른 회사원인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매를 둔 후리후리한 키에 수려한 얼굴로 잘 나가는 이혼남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딸 역시 학력 좋고 외모 출중하고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입니다.

요즘은 결혼은 선택이라고 합니다. 결혼 적령기 부담도 없어졌습니다. 이혼남에 대한 편견도 없어졌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더구나 이혼남 중에는 이해심이 깊고 자상하고 경제적 능력도 만만치가 않은 이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도 친구도 딸이 아무리 나이 찬 골드미스라 해도 재혼자리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이 찬 골드미스가 있으면 나이 찬 미혼남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찬 생각일 뿐이었나 봅니다. 그 콧대 높던 친구의 딸이 어린딸이 둘이나 달린 이혼남과 연애결혼을 한 것입니다.

친구는 딸애가 이혼남과 결혼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왔을 때 반대를 하면서 몇 날 며칠을 얼마나 눈물을 질질거렸는지를 모릅니다. 분하고 억울했고 아직도 세상물정을 모르는 싱그러움이 살짝 엿보이는 딸애가 아깝고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딸애가 그 이혼남을 집에 데리고 온 날 그만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혼남도 당당했고 딸애도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나란히 앉은 모습이 요즘말로 환상의 커플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친구는 짐을 꾸려 혼자서 여행을 갔습니다. 평소 나하고 잘 가던 성지에 가서 삼일 동안 있으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돌아온 친구의 얼굴은 앓고 난 후처럼 쑥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었는지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때 자식은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생각하면서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깊은 가슴 속을 감추고 평소처럼 웃고 떠들면서 딸의 결혼을 진행시켰습니다. 

"외손녀들한테도 그 마우스판 줬어?"
"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걔들은 애교덩어리라구, 지 엄마가 퇴근해 돌아오면 막 달려들고 매달리고 같이 깔깔거리고 아주 법석을 떤다구. 나한테도 그래. 나도 지들한테 잘하고 있지만 그게 다아 우리 딸애가 착한 투사로 사는 덕이지." 

친구의 딸은 결혼 전 부모와 같이 살 때는 버는 돈을 주로 자신한테 많이 쓰고는 했습니다. 혼자서 자주 백화점 쇼핑도 하고 옷도 유행대로 화려하게 입고 예쁜 화분을 사들여 즐비하게 늘어놓고 가꾸고 요리도 배우고 새벽 수영도 다니고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는 했습니다. 한눈에도 독신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이런저런 투자를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 자신의 많은 부분을 버리고 친구의 말처럼 착한 투사로 변했습니다. 긴 손톱도 자르고 긴 머리도 한가닥으로 묶고 옷도 편한 캐주얼로만 입고 퇴근길에 친정에 들러서는 아이들 도시락반찬 걱정을 하면서 냉장고를 홀랑 뒤져 반찬들을 덜어가고 책장을 열어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들을 빼가는 것입니다. 토요일에는 온 가족이 함께 마트장을 보러 가는데 어린 딸들이 신이 나서는 앞서서 주차장으로 달려간다고 합니다. 

"요새도 퇴근길에 들려서 냉장고 뒤져 가?"
"말 마. 그저께는 사골탕을 반이나 덜어 갔어. 딸들이 요즘 학원 다니느라구 피곤해 해서 먹여야 한데나. 근데 말야 그런 꼴 보면 기특하면서도 속이 상해. 전처럼 지 자신도 좀 가꾸고 자유로운 시간도 가지고 그랬으면 좋겠어."

"그 옛날 우리도 결혼하고 나서는 반 식모가 됐었잖아. 그때는 왜 그렇게 살기가 힘들었나 몰라. 내 치장은커녕 내 입에 들어갈 것까지 아이 입에 넣어줘야 했으니까 말야."
"그랬지 참. 그렇게 살았어도 즐겁고 행복했지."

"딸애도 지금 즐겁고 행복한 거니까 속상해 하지 마. 외손녀들이 가끔 생모도 만나고 그래?"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허락을 해준대. 그때마다 쓸쓸하고 외로울 거야. 저도 하나 낳았으면 좋겠는데 아직 소식이 없지 뭐야."

친구의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친구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친구는 '오 그래 나다' 하더니 그 자세 그대로 아무 말이 없습니다. 잠시 후 친구는 조용히 핸드폰을 접어 가방에 넣었습니다.

"딸애야. 엄마아 하구 아무 말이 없는 거야. 속상한 일이 있는 거지. 근데 '뭐야 말해봐'라고 묻지 않았어. 내 말이 무슨 소용 있어, 지가 스스로 이겨내야지. 지가 택한 삶인데. 지난 달에도 한 번 그러더니 또 그러네."

나는 그 옛날 단칸방 신혼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나는 자주 남편과 부딪히며 살았습니다. 넉넉한 생활도 아닌데다가 성격차이에 생활관이며 소비성향이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편과 부딪힐 때마다 공중전화로 달려가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하고 불러놓고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엉, 잘 지내지? 라는 말에 눈물이 나면서 이상할 정도로 가슴 속이 따듯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진통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덕분에 나는 그 아프고 힘든 고비들을 잘 넘기고는 했습니다. 

"사위가 매일 칼퇴근해서는 청소해 주고 세탁기도 돌려주고 애들 숙제 봐주고 그야말로 몸바쳐 도와주지만 그래도 부딪히는 뭐가 있지 왜 없겠냐구. 전실 자식이 둘이나 있으니까 초혼가정보다 부딪히는 게 하나 더 있지."   

말은 그렇게 해도 하나도 걱정이 안 되는 눈빛입니다. 집안 일을 몸바쳐 도와주는 든든한 사위의 심성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위도 행복한 가정을 일구는 착한 투사입니다. 친구 역시 착한 투사입니다. 퇴행성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으면서도 바퀴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가서 마트장을 잔뜩 봐다가는 언제든지 딸애가 덜어 갈 수 있도록 반찬들을 넉넉히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투사가 셋이나 됩니다. 무엇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서 친구의 딸애는 아까와 같은 전화를 다시는 어머니에게 하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커피 한 잔 더 먹을까? 우리 사위가 그러는데 하루 두 잔은 괜찮다구 해."

갑자기 친구가 사위 자랑을 하고 나옵니다. 그 모습이 부럽습니다. 아까 손자가 셋이라고 자랑을 할 때보다 더 부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속내를 감추고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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