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DJ, 반국가단체 한민통 만들어 사형선고 받았다"

조갑제, 전두환 신군부의 DJ사형선고 정당화

등록|2009.08.18 19:24 수정|2009.08.19 17:06
그는 18일,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선고를 정당화하는 글을 올렸다.

조씨는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후평가'라는 글에서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재일인사들과 손잡고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만들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조씨의 주장일 뿐이다.

"1978년 박정희 정권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를 한민통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조작했고,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라는 '훈장'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든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정사는 정작 한민통 회원도 아니었고, 한민통의 간부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간첩죄로 10년형을 받은 김정사가 6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와 활보하고 다닌 사실은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웅변해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한민통의 초대 의장인 김대중을 옭아매고, 해외에서 진행되는 유신독재 타도투쟁을 말살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역사이야기>)

더욱이 김 전 대통령은 조씨가 문제삼은 내란음모사건과 관련 해2004년 대법원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씨는 또 "6·15선언 이후의 김대중씨는 지지자에 의하여서는 평화의 사도, 반대자에 의하여서는 반헌법·반국가적 행위자로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쓴 듯하나  김 전 대통령을 '반헌법'이라고 가장 극력하게 비판한 사람은 조씨 자신이다.

조씨는  "김정일과 손을 잡고 연합제·연방제 혼합 통일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과 동격으로 놓는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희대의 학살 독재자와 동격으로 평가받거나 동격으로 이미지 메이킹되는(특히 영상을 통하여) 사태를 자초하고 말았다"고 강변했다.

조씨는 "다음 장의 역사에서 그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라고 글을 끝냈다. 조씨는 한국 언론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다음은 조씨의 글 전문.

故 金大中 前대통령의 死後평가

그의 生涯(생애)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6·15선언이 될 것이다. 

오늘 他界(타계)한 金大中 前대통령(만 86)은 파란만장한 生涯(생애)를 살았다. 그의 생애는 4期로 나눌 수 있다. 1. 좌익활동가 시절(해방 직후) 2. 야당정치인 3. 대통령 4. 전직 대통령.

그의 활동을 네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 좌익 활동가 2. 야당투사 3. 대통령 4. 6·15선언 선언자. 그의 생애는 2000년 6·15선언 前後로 크게 나뉘어진다. 6·15선언 이전의 故 김대중씨는 민주투사로 불렸다. 6·15선언 이후의 김대중씨는 지지자에 의하여서는 평화의 使徒(사도), 반대자에 의하여서는 反헌법·反국가적 행위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생애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6·15선언이 될 것이다.

1. 6·15선언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왔는가, 아니면 핵폭탄을 가져왔는가.
2. 6·15선언이 한민족의 통합을 가져왔는가, 분열을 가져왔는가.
3. 6·15선언이 자유민주 체제를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4. 6·15선언이 韓美(한미)동맹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5. 6·15선언이 북한 동포·국군포로의 인권을 향상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6. 6·15선언이 헌법의 敵(적)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7. 6·15선언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켰는가, 후퇴시켰는가.

이상 일곱 개의 평가기준을 적용하면 故 김대중씨의 역사적 位相(위상)이 대충 설정될 것이다.

故 김대중씨는 朴正熙·全斗煥 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납치·투옥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연금도 당했다. 그러나 故 김대중씨는 그런 불굴의 용기를 稀代(희대)의 학살자 김정일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700만 인명의 학살의 책임이 있는 김정일과 손을 잡고 연합제·연방제 혼합 통일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反(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과 同格(동격)으로 놓는 치명적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희대의 학살 독재자와 동격으로 평가받거나 동격으로 이미지 메이킹되는(특히 영상을 통하여) 사태를 自招(자초)하고 말았다. 그는 박정희에 의한 유신선포 직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재일)인사들과 손잡고 反(반)국가단체인 韓民統(한민통)을 만들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故 김대중씨는 李承晩(이승만)과 함께 大衆(대중)을 권력의 기초로 보았던 대중정치인이다. 이승만은 대중을 계몽·교육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씨는 계몽보다는 선동적 설득을 더 앞세웠다는 비판이 강하다. 김대중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이냐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그리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촛불난동과 같은 법치파괴, 6·15선언과 같은 헌법파괴까지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권력을 잡은 이후의 이러한 그의 민주주의觀(관) 때문에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역할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내가 만난 한 전직 미국고관은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씨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한국 사람은 이승만·박정희뿐일 것"이라 평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한 章(장)이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의 역사에서 그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