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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버마에게도 '우리 선생님'이었다

'아시아 평화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버마 민주화운동가들도 추모

등록|2009.08.19 16:54 수정|2009.08.19 16:54

▲ 지난 2007년 12월 4일,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버마 민주화의 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버마 민주화운동가들과 함께 손을 잡고 있다. ⓒ 김대중평화센터


"우리 버마(현 미얀마) 사람들은 김대중 선생님을 가족처럼 아버지처럼 스승님처럼 느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국제적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한국인들만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특히 버마 민주화운동가들에게 김 전 대통령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들은 스스럼없이 김 전 대통령을 "우리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조모아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부총무는 이틀째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버마 대사관 앞에서 아웅산 수지 민족민주동맹 사무총장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중에 서거 소식을 접하고 바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이날은 오후 3시 반부터 밤 9시까지 병원에 있다가 귀가했고, 19일 낮 12시 다시 빈소를 찾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계속 김 전 대통령을 조문할 생각이다.

DJ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한국으로 불렀다

조모아 총무는 지난 13일에도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 김 전 대통령 쾌유를 비는 기도회에 참석했다. '도쿄 생환 36주년' 기념일이었다.

당시 그는 "선생님이 너무 고생이 많았는데 빨리 일어나서 아시아 평화와 남북통일에 많은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버마 민주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007년 12월 김대중평화센터가 개최한 '버마 민주화의 밤' 행사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 문제가 가장 심한 곳이 버마다, 국민은 극도의 가난 속에 고통을 받고 소수 군부 사람들만 부귀영화를 누린다"면서 "이제 한국이 세계 민주세력을 도울 차례"라고 연설했다.

지난 6월에는 다른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아웅산 수지 사무총장 석방을 촉구하는 공동서한에 서명했다. 이와 함께 "버마 민주주의는 국제사회가 우선순위에 둘 문제"라는 내용의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 지난 2007년 12월 4일,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버마 민주화의 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 김대중평화센터



90년대 후반 20여명의 버마민주화 운동가들이 한국으로 망명한 것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가택에서 연금된 아웅산 수지 사무총장의 상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화 역정과 그대로 겹쳤다. 한국 민주주의가 버마 민주화의 모델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조모아 부총무도 같은 이유로 지난 1994년 한국에 들어왔고, 그 뒤 '버마 민주화의 밤' 행사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여러 차례 만나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지난 5월에는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버마 망명 국회의원 6명과의 면담 자리였다. 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버마 민주화는 꼭 이루어진다, 기운 내서 노력해라"고 민주화 운동가들을 격려했다.

조모아 부총무가 특히 김 전 대통령 서거를 아쉬워하는 것은 아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조국의 현실 때문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동지인 김 전 대통령과 아웅산 수지 사무총장이 민주화된 버마에서 만나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버마 민주화 캠페인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국제 지도자들과 함께 버마 방문 비자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버마 정부는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로 서류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조모아 총무는 "남북통일과 아시아 평화를 위해 노력하신 세계적 지도자가 너무 아깝게 돌아가셨다, 아웅산 수지 사무총장보다 먼저 가셔서 안타깝다"면서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인연을 맺어서 저로선 참 영광이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우리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고 싶다"는 그는 되도록 장례일정 내내 빈소를 찾을 예정이다. 평일이라서 직장이 있는 버마 노동자들은 못 왔지만 오는 23일(일요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문할 생각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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