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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추도사, 백성들의 눈물과 분노로 써야

내가 선택한 두 분 대통령을 3개월 사이에 다 잃었다

등록|2009.08.21 11:23 수정|2009.08.21 11:23

추모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19일 저녁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유성호




어릴적 내가 살았던 동네. 나이 마흔을 넘겨 다시 돌아온 내 고향 땅 강원도 정선. 정선에도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가 지자체에 의해 마련됐다. 그를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는 것이겠지만 격세지감이다.

빨갱이라 손가락질 받던 그를 선택하다

내가 살던 동네 정선의 대다수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빨갱이'라 불렀다. 3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빨갱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은 곳이다. 그런 이유로 비록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 해도 지역에 분향소가 차려지는 것은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에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에게 씌워진 '빨갱이'라는 굴레가 완전히 벗겨진 것일까.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아닌 듯싶다. 그러하니 과거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덧칠되어진 붉은 색 망령은 팝가수 마이클 잭슨처럼 그가 아무리 푸른 색 얼굴로 성형을 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가슴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은 서울의 봄인 1980년 무렵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이런저런 일로 세상에 불만이 많던 나이였다. 그해 4월 내가 살던 동네 인근 마을에서는 이른바 '사북사태'라는 광산 노동자들의 항거가 있었다.

신군부가 내린 계엄령으로 인해 시골 마을까지 군인들은 실탄을 장착한 M16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사북 항거가 있을 때 매일 아침이면 정선경찰서에 차려진 합동수사본부에 간밤 누구누구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아직도 '교대' 출신이라고 말하는 내 작은 형도 그 무렵인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작은 형은 운 좋게도 3주가 지난 어느 날 새벽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었고, 새마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해 5월 당시 신군부는 사북을 짓밟는 대신 광주를 선택했고, 김대중은 내란음모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때부터 사람들 입에선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말이 급격하게 나돌았다. 정부가 앞장섰고, 언론과 방송이 그 뒤를 따라 빨간색을 끊임없이 덧칠했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 당시 밥상머리에 마주 앉으면 언쟁을 자주 했다. 나는 김대중이 빨갱이가 아니라 했고, 아버지는 그가 빨갱이라고 했다. 정부와 언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갔던 아버지였기에 언쟁은 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나이였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도 199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쿠데타와 5·18 광주 진압 등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나서야 "전두환이 나쁜 놈이라더만 니 말이 맞았구나..."라며 뒤늦은 후회를 하셨지만 '김대중=빨갱이'라는 등식만큼은 그대로 유지하다가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로소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1987년, 나는 군 제대 후 복학한 복학생 신분이었다.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통과되었고,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 당시 유력한 후보는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염원했던 야권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구 몇이 모이면 서로 누구를 밀 것인가에 대해 격론이 일었다. 한 친구는 노태우를 지지 한다고 했고, 어느 친구는 김영삼을 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김대중을 선택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 기회를 김대중에게 걸었던 것이다.

김대중이 유세 연설을 할 때면 뜻을 함께 하던 친구들과 거리를 점거한 채 "김대중"을 연호했다. 돈 몇 푼씩을 받으며 노태우를 연호한 친구들과는 그 무렵부터 멀어졌고, 지금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선거에서 졌다. 후회하지 않았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선거 운동을 했던 친구나 선배 몇은 공무원이 되었다. 선거 운동에 대한 보답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 몇은 아직도 공무원이고, 몇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도중에 그만두었다.

통일을 위한 힘찬 걸음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지난 2000년 6월 13일 오전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역사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1992년 대선 때도 나는 김대중을 지지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여당 사람으로 변신한 김영삼에게 졌다. 선거에 패배한 김대중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나는 지지할 사람을 잃었다. 그가 다시 정치에 복귀했을 때 나는 또 그를 지지했다. 마침내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세 번의 지지 끝에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일조했다.

내가 선택한 대통령 김대중, 이번에도 지켜주지 못했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고,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해 힘을 쏟았다. 억압 당하며 살았던 국민들에겐 인권의 의미를 부여했고 복지국가로 가는 초석도 놓았다. 무엇보다 그는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높아서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도 큰 힘을 쏟았다.

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나는 노무현을 선택했다. 아낌없는 선택이었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젊은 세대들은 노무현에게 열광했다. 그도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을 옆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게 할 정도로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벗어버린 노무현 대통령. 그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뒤 이은 대통령 선거에서 전과 14범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내가 지지했던 이는 무참하게 패배했다. 사람들은 '경제살리기'라는 미명에 혹 빠져 버렸다. 이명박의 경제살리기는 개발독재를 낳았고, 세상은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용산에서는 무고한 백성이 불 타 죽었고, 숱한 죽음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는 실종되었거나 말라 죽어갔다.

사람들은 이명박이 민주주의를 이렇게까지 후퇴 시킬 줄을 몰랐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배는 떠난 후였다. 불행하게도 지금으로서는 그가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 반민주, 반통일을 향한 그의 질주를 막을 힘이 국민에겐 없다. 그들이 500만 표 차이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믿는 한 국민 세 명 중 한 명만이 이명박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대통령으로 선택한 두 사람 김대중과 노무현.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오르자 3개월의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먼저 목숨을 던져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이명박 사람들의 치졸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던졌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내 몸의 절반이 무너졌다는 김대중 대통령 또한 나머지 절반의 몸만으로는 이명박 사람들을 대적하긴 힘들었던지 3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 행사 연설 중에서

지난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백성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고 난 후 이명박 정부 사람들과 수구들이 엄청난 저주와 비난을 퍼부었음에도, 우리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가 노구를 이끌고 광폭한 저들과 싸우는 중에도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원한 선생님이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둥인 또 한 분의 대통령을 잃었다. 두 분의 대통령을 떠나보낸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생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직도 우리들의 양심은 행동하지 않는다.

DJ의 마지막 유언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악을 이겨라"

악을 이기는 방법6.15 공동선언 9주년 행사 관계자들과의 오찬 발언 중에서 ⓒ 오마이뉴스 그래픽



내가 만든 대통령 김대중. 그는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보궐 선거로 첫 당선의 영예를 얻었지만 강원도 사람들은 그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배척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강원도 출신들을 중용했지만 강원도 사람들은 늘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언젠가 강원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강원도 출신 인재를 두루 등용한 것을 예를 들면서 그럼에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후문도 있고 보면, 오래 전 박정희와 전두환 등의 군사 독재 정권이 만들어낸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잘도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직접적인 사인이 다발성 장기 손상이라지만 나는 그의 사인이 이명박 정부에 의해 받은 '홧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반통일 세력이 득시글거리는 속에서 그렇게 죽어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까지 막았던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를 위해 추도사를 쓸 전직 대통령은 없다. 그러하니 그의 추도사는 그가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의 백성들의 눈물과 분노로 쓰여져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 국민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두며 이젠 그를 보내려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일, 이제 살아남은 이들에게 달려있다.

"(이명박 정부를)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 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 6월 25일 오찬 발언 중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6·15로 돌아가자!'(Let's Return to 6.15)의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덧붙이는 글 내가 선택한 김대중 전 대통령님, 이젠 모든 시름 내려 놓으시고 편안하게 영면에 드시기를 엎드려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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