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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장애인 단물만 빨아먹는다?

등록|2009.08.20 16:24 수정|2009.08.20 16:24
근래에 화제를 낳은 몇몇 대중문화 콘텐츠는 장애인의 몸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장애인 문제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장애인의 단물만을 빨아 먹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전히 춘래불사춘인 셈이다.

몇몇 콘텐츠를 보자. 공지영 소설 <도가니>는 어느 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통해 브레이크 없는 권력의 카르텔을 고발한다. 정작 <도가니>에서 장애인은 지식인의 관념적인 고뇌를 포장하는 후일담 문학의 또 다른 상품 대상이 됐다. 장애인과 장애인 단체들이 주체적이고 주도적이었다면 소설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장애인은 개인일 뿐이고 조직화와 연대가 없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2009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날아라, 잡상인>에도 장애인이 등장한다. 장애인 남매는 주인공에게 삶의 깨달음을 준다. 그러나 그들은 재기발랄한 문체 속에서 개인적 약자로만 규정된다. 더욱이 여전히 장애인 화두를 배제하고, 편견을 강화하며, 장애인을 개인으로 파편화시킨다.

47%의 시청률로 종영된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는 고은성의 동생 고은우가 자폐 아동이다. 고은우의 시선은 없으며, 장애는 갈등과 해결의 장치일 뿐이다. 서번트 신드롬에 따른 놀라운 피아노 실력은 고은우 스스로의 꿈과 희망이 아니라 단지 극적 전개에 필수적인 갈등 유발 도구였다. 아침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는 자폐 남성이 등장했는가 하면, <멈출 수 없어>에서는 교통사고로 정신 장애에 걸린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는 개별 파편화 됐거나 장애인에 대한 정체성이 없으며, 장애를 뜬금없이 극복하는 데 급급해 개연성을 떨어뜨린다. <아내의 유혹>에서 지적 장애인은 희화화되기 일쑤였지만 영화 <슬링 블레이드>처럼 지적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월등한 이타적 가치 체계를 지닌 존재일 수 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제임스 찰턴의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는 방향성을 지적해 준다. 그동안 장애인을 다룬 문화 콘텐츠는 장애인에 대한 재활·교육·돌봄에 관한 것이었고, 성취 또는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데 머물렀다. 이런 비정치성은 장애인의 삶이 나아지려면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고, 그들을 대변해 줄 정치 세력과 조직의 존재 필요성을 도외시했다. 장애인은 조직적이고 정치적이면 안 되는 것인가.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홀로 극복하거나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인가. 장애인 스스로 정체성을 긍정하고 연대하며 조직할 때 권리 보장과 삶의 진전이 이뤄진다. 장애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산물이며, 장애인은 혼자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5억명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위한다는 작품들이 '비정치화의 덫'에 가두어 오히려 장애인을 여전히 소외시키고 있다.
덧붙이는 글 위클리 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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