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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꼬리치는 기러기

각인 효과

등록|2009.08.24 09:57 수정|2009.08.24 09:57
<아름다운 비행>이란 영화를 기억하는가?
야생거위가 주인공 어린소녀를 엄마로 알고 따르며 나중 개발업자들로 인한 늪지대의 보금자리를 잃지 않기 위하여 16마리의 거위들과 우정어린 비행을 하는 영화다.
물론 영화관에서는 보지 못하고 DVD로 보았지만 가족영화, 환경영화, 감동이 있는 영화로 기억된다.

각인(Imprinting)-브리태니커 사전
어린 동물들이 처음으로 시각적·청각적·촉각적 경험을 하게 된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 그것을 쫓아다니는 학습의 한 형태. 자연상태에서는 그 대상이 언제나 부모이나, 실험에서는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을 쓰고 있다.
각인은 조류, 특히 닭·오리·거위 들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이것과 비슷한 학습형태가 포유류·어류·곤충류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청둥오리 새끼나 병아리는 태어난 지 2~3시간 만에 각인이 완성되지만, 각인자극에 대한 감수성은 30시간 정도 후에 사라진다.

"Imprinting이란 단어를 아세요?"
"글쎄, 잘... 아마 각인이란 말이 아닐까?"
"맞아요. 제게 님은 그런 분이었죠. 처음 이성에 눈을 뜨고 전부인 양..."
언제적이었을까, 그때 한 소녀도 내게 그런 말을 했더랬지.
물론 그말은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라는 말을 꺼내기 위한 화두였겠지만.

▲ 형이 시무하는 弓山(활뫼)교회 모습, 왼쪽에 사택이 있다. ⓒ 박우물




▲ 새끼 기러기가 부화한 교회 사택모습 ⓒ 박우물




손윗 형이 시무하는 고창 심원의 弓山(활뫼)교회 앞에는 차량이 오가는 작은 관통도로가 있고 건너편, 굳이 지칭하자면 호수쪽에 텃밭 하나가 있다.
익숙한 가금들을 주로 키우는데 어찌 야생 기러기가 이곳에 합류하였다.
물론 한쌍이었는데 처음에는 탈출을 몇 번 시도하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더 이상 담 밖나들이는 꿈도 꾸지 않았다.
과정은 어찌된지 모르지만 어린 새끼들이 겁결에 방에서 탄생하였고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조카들을, 아니 사람을 각인효과로 인하여 어미로 알고 따르게 되었다.

▲ 사람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르는 새끼 기러기. ⓒ 박종훈






아래 내용은 형이 기러기에 대하여 쓴 글 일부이다.

요즘 텃밭에 자연부화된 기러기 가족을 보는 즐거움이 삶의 여유를 준다.
병아리들이 놀고 먹는 모습조차도 귀엽기 그지없다.
그 평화 속에서도 어미는 잔뜩 긴장을 하며 주인도 몰라보고 경계를 한다.

병아리 소리가 요란하여 가 보았더니 울타리 망으로 세 마리가 빠져나와서 다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번번히 망에 걸리자 삐약거리고 안에서는 어미도 난리다.
혹 지나가는 고양이가 보면 위험하기에 얼른 잡아다가 우리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요리저리 피하는 병아리들을 겨우 잡아 우리에 넣는데 그 사이 사생결단으로 달려오는 어미기러기가 울타리를 단숨에 넘어서 나왔지만 이미 병아리들은 우리 안에 넣어 상황은 끝났다.

이제 어미를 우리 안으로 넣으려고 다가가자 아까까지 달려오던 그 무서운 기세는 어디론가 꺾이고 도망 다니기에 바쁘다.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울타리를 넘고 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겁많은 기러기가 되었다.
훌쩍 뛰어넘은 울타리를 다시 넘어가지도 못하고 계속 들어갈 구멍만 찾고 있다.

어미의 새끼보호 본능이 이처럼 강하고 돌변하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아빠기러기가 항상 우리 옆에 지키고 있지만 그것은 다른 동물들을 지키지 사람에게는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겁쟁이인 어미이고 다른 닭들에게 집단 공격을 당해도 피하기만 했던 어미기러기였다.
비록 말 못하는 약한 짐승이지만 새끼를 보호하려는 그 사랑은 사자같이 담대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 어미와 새끼 기러기들의 단란한 한때. ⓒ 박종훈




문제는 사람을 따르는 그 성향이 새끼 때로 끝나는 게 아니어서다.

잠시 이번에 한국에 들렀을 때 이 내용을 기억치 못하는 나는 우리 속에 희한한 가금류 한마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처음 유사한 외형상 칠면조로 착각을 하였다.
그런데 보기에 그리 예뻐보이지 않지만 바로 다 자란 기러기라고 한다.
목이 쉬었는지 영 안 나오는 불편한 소리를 지르며 우리 입구 문쪽으로 다가오는데 뭔가 다른 구석을 발견했다.
그 몸짓이 어떤 유사성을 발견했는데 이 덩치 큰 녀석의 행동은 예상치 못했치만 개처럼 반갑다고 본능적으로 꼬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장닭보다도 큰 덩치의 위압적인 녀석이 있지도 않는 꼬리치기를 하는 모습을 어이없어 하면서 지켜보았지만 따로 쓰다듬거나 하지는 않았다.

궁금증에 그 많던 기러기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니 길가라서 밤중에 두  번의 도둑이 들어와 기러기들을 훔쳐갔다고 했다.
물론 지나다니면서 속내를 아는 사람의 짓이겠지만 그래서 이제 유일하게 한 마리만이 우리에 있다 했다.

휴가를 맞은 우리 3형제끼리 밥을 먹고 있는 중에 기러기 이야기가 나왔다.
"에이고 말도 마라, 밥 줄 때도 닭들은 제 모이 먹기에 급급한데 무에 그리 반갑다고 내내 쫓아다니다가 사람이 사라지면 그때서야 힘으로 닭들 밥상을 다 차지하더라. 대개 짐승은 먹는 것 앞에서는 주인도 없는데 사람이 더 좋긴 좋은가 봐."
그러더니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며 어제는 자신의 바지를 찢었다고 말을 하는데 새로이 가족에 합류한 형수가 의아한 듯이 물어본다.
"왜 사람을 잘 따르는데 갑자기 당신의 바지를 찢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변했을까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시골목사 활뫼지기는 순간 멈칫하더니 어색히 웃으며
"자식이 담장 망을 고치는데 다가와서 반갑다고 꼬리치길래, 사실 녀석이 힘이 좀 세야지. 아픈 것도 있지만 그보다 사람을 너무 따라서 저번처럼 도둑이 와도 날 잡아갑쇼 않도록 경각심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머리통을 죽지 않을만큼 밟았더니 화가 났나 보더라구. 기를 쓰고 공격해서 바지가 찢어졌다야."

그 말을 듣던 나랑 동생은 즉각 형을 몰아세웠다.
"에휴, 내가 기러기라해도 머리 밟히면 그랬겠수. 다 이유가 있었네."
"........."

그 후로도 교회사택앞을 지날 때면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저수지 산책길에 나서는 나를 보고 부러 주차장쪽으로 다가와 특유의 쉰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예의 그 꼬리치기와 함께.

▲ 사람을 보자 반가워 꼬리를 치며 우리 문까지 달려 온 기러기. 응대를 하건 안 하건 녀석의 구애는 끊어지지 않는다. ⓒ 박종호




刻印(각인)
내게 처음 보여졌던 세상과 사람.
그것이 전부인 것 처럼 특정한 시기에는 그리 자랐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각인효과도 사라지는 것일까?
더 이상 첫사랑으로 인하여, 더 이상 처음이란 단어로 목 매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세월은 나를 타고 흘렀을까?

기러기의 무지한, 어쩌면 그 스스로의 본능에 의거한 가치로 저리 없는 꼬리마저 흔들며 사람을 졸졸 좇는 기현상이 오래 전 잊어버린 듯한 기억 한 켠을 건드린다.
어쩌면 홀로서기란 이름의 삶살이를 해오다 미물의 변함없는 각인된 대상에 대한 일방적 구애가 나의 퇴화된 기억의 한 촉수를 자극했을는지도.

그 질문처럼 말이다.
"Imprinting이란 단어 아세요?" 

▲ 고창 심원면 궁산마을을 건너편에서 찍었다. ⓒ 박우물





덧붙이는 글 문화의 레일, 관계의 레일. Rail Art 박우물. 본인이 속한 카페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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