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 14회
들물이 있으니 날물도 있다(2)
"공부 갤치는 학교에서 뭔 놈의 거름을 맨든다고…."
"요새 사방에 써 붙여 논 말이 '식량증산' '퇴비증산' 아니라고. 학교에도 딸린 밭이 있고 학생들이 싸놓은 똥오줌이 징하게 많응께 그놈을 이용해서 퇴비를 맨들자, 그래서 갖고 오라고 한 것이겄제."
전날 방과 후에 베어다 놓았던 꼴 한 아름을 새끼줄로 묶어서 책보와 함께 들고 나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두엄더미에 소마 끼얹듯 한 마디씩을 보탰다. 그날의 학교 숙제는 퇴비를 만들 꼴 한 뭉텅이씩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선호야, 오늘 학교 파하면 집으로 핑 온나 이. 엄니랑 갯바탕에 진줄 가질러 가자."
아니나 다를까 사립을 향하는 내 뒤꼭지에 대고 어머니가 언제나 처럼 그렇게 말했다. 나는 돌아서서 어머니를 향해 뭐라고 한 마디 내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간신히 다독거리며 고샅으로 나갔다. 그 무렵 내 마음바닥에도 은근히 반항심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국민학생에 불과한 나를 한 시도 가만두지 않고 부려먹으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제법 일찍 철이 든 편이어서 그러는 어머니를 향해 큰맘 먹고 반항을 한다는 것이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엄니, '오늘 학교 파하면 해찰피지 말고 집으로 피이이이이이잉 온나 이', 시방 그 소리 할라고 그랬제?"
그렇게 선수를 쳐서 어머니를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집안일을 거들지 않으면 어머니가 더 많이 고단할 것이라는 사실쯤이야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학교 가는 행렬이 가관이었다. 여자 아이들이 꼴 뭉치를 단정하게 머리에 이고 가는 데 비하여 사내 녀석들은 어깨에 들쳐 메거나 옆구리에 끼거나 두 손을 깍지 끼어 앞가슴에 부둥켜안는 등 제각각이었다.
"야, 야, 쩌그 선열이 똥구멍 조깐 봐라 이."
송남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선열이는 가슴에 안은 꼴 더미를 추스르랴 고무줄이 끊어져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를 단속하랴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바지가 흘러내려서, 덤불 속에서 몰래 익은 조선호박 옆구리 같은 엉덩이가 언듯언듯 비칠 때마다 여자 아이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학교에 두엄더미를 만드는 일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남자 아이들은 순번을 정해서 수업 중에도 서너 명씩 불려나갔다. 학교 변소의 잘 숙성된 소마를 나무통에다 길어 부은 다음에 두엄더미 쪽으로 갖다 주면, 학교 소사가 그 통을 받아 올려서 햄버거에 케첩 뿌리듯 고루뿌리고서 다시 풀을 올려 쌓는 작업이었다.
소마를 퍼 나르는 작업을 위해 남자 아이들은 교대로 징발 당하였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들은 비릿하고 텁텁한 똥오줌 냄새를 달고 와서 교실에 풀어 놓았다.
"자, 받아쓰기를 시작하겄다. 50점 이상 못 맞은 놈들은 학교 파하고 나서 소매 통 운반하는 일을 한 시간 동안 더 하게 할 것이여."
선생님이 엄포를 놓았다. 우리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연필에 침을 잔뜩 바른 다음 선생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 시방부텀 받어 써라 이. '재건!'…그 다음은 '반공방첩!'…세번째로 '식량증산!'…4번은 '퇴비!'…그 다음은 '유우엔!'…다 썼냐? 6번 문제는 '쥐를 없애자!' 그 다음 문제는 '입산금지!'…"
물론 나는 방과 후에 변소의 소마 통을 나르는 벌을 받지는 않았으나 내가 받아쓰기 시험을 치른 중에서 그 날의 성적이 가장 초라하였다. 반공방첩을 '방공방첩'이라 해서 틀렸고(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공' 말고도 공산세력을 막아낸다는 의미의 '방공'이라는 말 역시 당시에 널리 쓰였는데 그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 선생님은 분명히 '방공'이라고 발음하였다), '쥐를 없애자'의 경우 언젠가 동각의 양철문짝에 붙은 포스터에서 보았던 문구였지만 선생님은 분명히 '어배자'라고 발음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갸웃거리다가 발음 그대로 '쥐를 어배자'라고 적었다가 틀린 것이다.
또 한 문제를 틀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어느 날 육지의 간판장이가 와서 마을 인근 산들의 들머리마다 네 글자로 된 입간판을 세워 놓았는데 물론 '입산금지'였다. 그런데 그 간판장이가 멋을 부려 쓰느라고 그랬는지 금지의 '금'을 '놈'처럼 써놓았다. 그래서 아예 우리는 그것을 장난삼아 '입산놈지'라고 읽고 돌아다녔다. 물론 입산금지가 산에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그날 받아쓰기를 할 때 엉뚱한 발상을 제의한 녀석은 희철이였다.
"우리 '입산놈지'라고 한 번 써부까?"
"좋아!"
그래서 우리 둘은 일부러 '입산놈지'라는 오답을 적어냈다가 통쾌하게 틀려버렸다.
섬마을이다 보니 농지가 많지 않아 몇몇 집을 빼고는 자급자족도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소출을 늘리자면 퇴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들 거름 땀세 난리 아니냐. 너도 점심 묵고는 재너메 까끔(산)에 가서 깔 한 망태 비 갖고 온나. 꽉꽉 채워서 야무지게 한 망태 미고 와야 돼."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노라면, 그런 식으로 나의 오후 일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작업지시를 내렸다. 날씨는 덥고 온몸이 나른하여 토방마루에서 낮잠이라도 한 숨 자려고 누워 보지만 어머니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망태와 낫을 챙겨들고 일찌감치 산으로 대피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이웃에 사는 종석이와 영길이도 처지가 같았으므로 우리는 마을의 뒷재를 넘어 산으로 들어갔다. 평평한 널바위 그늘에 빈 망태를 뭉뚱그려 베고서 나란히 누웠다. 낮잠을 한 숨 자려는 것이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조각낸 햇살이 각광처럼 어른거리고, 산 너머에서 피어오른 구름덩이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영길이는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종석이가 내게 말했다.
"너는 요 담에 커서 뭣이 될래? 나는 장사를 해서 돈을 조깐 많이 벌었으먼 좋겄는디…."
"전번에는 마도로스가 돼서 징하게 큰 윤선을 타고 수펭선 넘에 먼 디 까지 돌아댕기는 거이 소원이라고 하듬만."
"일단 웃녘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 배를 큰놈으로 살 것 아녀. 선호 너는?"
"나는 대통령."
"야,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읍해야 되는 것이여."
"박정희 맹킬로? 나도 사관학교를 댕기면 되제."
"댕기고 자프면 댕기든지. 선호 너가 군대 장군이 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되면, 그 시꺼먼 안겡은 내가 사주께."
"야, 그런 안겡 쓰고 걸어가다가 깜깜해서 자빠져뿔면 어짜라고?"
"자빠져서 다치면…누릅나무 껍데기 씹어서 볼르면 되제."
우리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둘이서 나누는 대화가 영 황당하고도 재미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므로 금세 싫증이 났다. 설핏 잠이 들려 했는데, 갑자기 우리의 발치 쪽 소나무 가지어름에서 말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매미 중에서 가장 재미없고도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녀석이 말매미였다. '우웽, 우웽'을 끝없이 반복하는 녀석의 울음소리는, 학교 소사가 교무실 창밖에 매달린 종을 쳤을 때, 그 종소리가 때마침 불어오는 세찬 바람의 그물에 걸려서 퍼져 나가지고 못 하고 다시 종의 아가리로 되돌아와 웅웅대는…바로 그런 공명(共鳴)을 동반하는 소리여서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종석이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누운 채로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서 소나무 가지를 향해 던졌다. 푸드득, 매미 한 마리가 도망을 쳤다. 이제 낮잠을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쪽에서 시오시 매미가 발동을 걸었다. 녀석의 울음소리는 단조롭기만 한 다른 매미들과는 그 구성 자체가 달랐다. 그것은 발단과 전개, 그리고 절정과 결말이 한 데 어우러진 짧은 드라마라 할 만 하였다.
-쓰우…쯔꾸 쯔꾸 쯔꾸 쯔꾸 쯔꾸…
여기까지는 본격 울음을 울기 위한 발단이자 도입부에 해당한다. 그 다음부터 시오시 매미의 '울음극'이 전개되는데 종석이와 내가 소리를 맞춰 합창을 시작하자 잠이 들었던 영길이도 눈을 뜨더니 따라 했다.
-쯔꾸 쯔꾸 쯔꾸 쯔꾸…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히, 쯔꾸쯔꾸 히, 쯔꾸쯔꾸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시오시, 시오시, 시오시, 추르르르르르르르르.
시오시 매미의 울음소리는 발단과 전개과정을 거쳐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그 속도가 빨라지는데 가령 '쯔꾸쯔꾸 오시'를 몇 번 반복하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은 매미에 따라 한두 번씩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우리가 발뒤꿈치를 타박타박 움직여 계산하는 박자와 대개는 맞아 떨어졌다.
"에이, 낮잠은 달어나부렀고, 우리 깔 내기 윷놀이 하자."
잠을 한숨 자고난 영길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꼴 내기 윷놀이를 제안하였다. 우리도 그 더운 낮 시간을 달리 때울 방도가 없었으므로 윷놀이에 동의하였다. 윷 가르는 일은 내가 맡았으므로 나는 낫을 들고 일어나 널바위 끝부분에 키 높이로 늘어져 있는 재밤나무(짝밤나무) 가지를 꺾었다. 어른들 가운데 손가락 굵기 만한 그 나뭇가지의 끝을 낫으로 대충 다듬은 다음에 2센티미터 가량의 길이로 잘라 두 토막을 만들었다. 낫을, 날이 하늘을 향하도록 세우고서 그 나무토막의 중심을 가늠하여 낫의 날에다 꼬옥 누른 다음, 다른 낫의 자루로 탁 치면 나뭇가지의 토막은 속살을 내보이며 이등분된다. 또 한 번…. 그렇게 해서 윷 가르기가 완성되었다.
그 사이에 종석이와 영길이는 칡잎파리 등 풀물이 잘 우러나는 잎사귀를 뜯어와 뭉뚱그려서 널바위에 문질러 윷판을 그려 놓았다. 퍼런 풀물이 선명한 근사한 윷판이었다. 윷판에 놓을 말이야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나 돌멩이를 사용하면 될 것이었다.
"자, 가자!"
우리는 낫을 들고 제각기 풀숲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땀 흘려서 한 아름씩을 베어온 꼴을 바위 한쪽에 전리품으로 쌓아두고 윷놀이를 시작했다. 앙증맞도록 작은 그 윷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흔들어 섞은 다음에 윷판에 뿌리는 방식이었다. 어른들이 술내기를 할 때에는 마당에다 덕석을 펴놓고 간장종지에 윷가락을 담아서 찰찰찰 흔들고 나서 내던졌다. 어른들은 윷가락을 던져놓고서 오른손 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철썩, 때리면서 '모야!' '숫(윷)이야!' 따위의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맞이한 설 명절 때,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가 윷놀이를 하자면서 문구점에서 윷을 사왔는데, 나는 그 윷가락의 크기에 기가 질려버렸다. 고향 마을의 윷이, 어린아이 손바닥에 네 가락이 모두 감춰질 만큼 작았던 데 비하여 중부지방의 그것은 숫제 장작개비만 했던 것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내 고향의 윷가락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둘러대었다.
"육지 사람들이 요렇게 큰놈을 가지고 윷놀이를 한다, 이 말이지? 쯧쯧쯧, 순 머슴 윷이로구먼. 머슴들끼리 도끼질하다가 즈이들이 패던 장작개비 갖고 놀이하는 거니까 머슴 윷이고 하인 윷이지, 선비들이라면 어디 그런 무지막지한 윷가락으로 놀이를 하겠냐."
물론 나의 그런 발언은 뭐랄까 일종의 왜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아전인수요, 견강부회였다.
"자, 인자 걸만 하면 내가 이긴다 이. 부처님, 조부님, 지발덕분에 개 말고 걸이 나오게 해주십사. 으이차! 어메, 이거이 뭣이여, 모다!"
종석이가 거푸 세 번을 이겼다, 그 바람에 종석이의 꼴망태는 벌써 불룩해졌다.
"선호야, 해 넘어가기 전에 엄니랑 갯바탕에 갔다 오자."
"갯바탕에는 뭣 하러?"
"진줄이랑 몰이랑 조깐 끗에올례야겄다. 놈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몰을 한 배씩 캐다가 널고 야단인디…우리는 갯바탕에 밀례온 놈이래도 끗어올렜다가 거름으로 써야제."
"시방 막 산에서 깔 한 망태 비 왔는디 오자마자 또 어디를 가자고…."
꼴 한 망태를 베어오자마자 어머니는 밀개떡 한 덩이를 내밀더니 이번에는 바닷가에 내려가자고 했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당에 굴러다니던 몽당 빗자루를 발길로 내질렀다. 그러나 결국 따라나서야 할 일이었다. 어머니를 앞세우고 바닷가로 내려가면서 나는 어머니의 목덜미가 온통 땀띠 투성이인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에 몽니를 부렸던 것이 막심하게 후회가 되면서 콧등이 시큰거렸고, 더불어 괜히 화도 났다.
"맨날 나이롱 적삼을 입고 밭 매러 댕깅께 땀띠가 나제."
나는 흡사 어머니가 나를 야단칠 때 하는 어투로 그렇게 내쏘았고,
"어짜겄냐, 그래도 나이롱이 안 떨어지고 질깅께…"
반대로 어머니는 야단맞는 어린아이처럼 기운 없이 그렇게 얼버무렸다. 기분이 영판 개똥같았다.
썰물이 진 바다에는 배들이 여러 척 떠서 몰 캐기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였다. 표준어로는 모자반이라고 하는 그 해초를 우리는 '몰'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바닷말의 '말'에 대한 생일도식 사투리 발음인 듯하다. 국도 끓여먹고 참기름에 무쳐먹기도 하는 몰은 '참몰'이라 하고 억세고 뻣세어서 먹을 수 없는 몰은 '개몰'이라 했는데 썰물이 되면 수심이 낮은 바다는 그야말로 몰밭이었다.
몰을 캐려면 기다란 대나무 장대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몰을 캐기 위해서 미리 대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바투 자르지 않고 십여 센티미터쯤 남긴 채 거칠게 잘라서 말렸다. 배를 타고 몰밭으로 나가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한 그 대나무 장대 둘을 물속에 넣고 이러 저리 꼬아서 돌린 다음 으이쌰 으이쌰, 잡아당기면 뿌리째 뽑힌 몰을 무더기로 캐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배가 있는 집의 경우고, 우리처럼 배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뿌리가 뽑혀서 떠다니다가 밀물 때 바닷가로 밀려오는 몰들을 끌어올려 말렸다. 그 역시 식량증산을 위해 밭에 낼 거름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말린 몰을 이고지고 밭으로 가서 이랑을 따라 깔아두면 그것이 삭아서 거름이 되었다. 우리가 진줄이라고 부르던 잘피의 경우,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거대한 띠를 이루며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파도가 치면 바닷가 갯돌 밭에 무더기로 밀려오곤 했는데, 그 잘피 역시 뭍으로 끌어올려 말렸다가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보리이삭 하나 고구마 한 뿌리라도 더 거두겠다는 마음들이 그처럼 절실하였던 것이다.
"자, 엄니는 쩌그 있는 진줄을 여 나를 것잉께 너는 갯갓에 가서 몰을 끗고 올라온나 이. 자, 심 내서 해보자. 그래야 멩년 밭농사를 잘 할 것 아니겄냐."
나는 이제 더 이상 화를 내고 있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내 기분을 다독거리느라 불쌍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몰 무더기를 한 아름씩 안아 올려서 바닷물이 미치지 못할 갯돌밭 위쪽에다 너는 작업을 해나갔다. 어느 사이 석양이 수면위에 고운 빛을 뿌리며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 무더기를 품에 그러안으려고 헤집던 나는 기겁을 하고 놀라 움찔 뒤로 물러났다.
"어, 엄니! 일루 와봐! 얼릉!"
나는 가슴이 뜀박질했으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소리를 죽여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
"이거이 뭔 일이라냐! 시상에…. 맨손으로 잡으면 안 돼!"
문어였다. 상당히 큰 그 녀석이었는데 아마도 밀물 때 몰 무더기와 함께 바닷가로 밀려왔다가 미처 못 빠져나간 듯 했다. 내가 몰 무더기를 헤쳤을 때 녀석은 민둥 대가리를 위로 뽑아 올리면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기에는 바닷물이 너무 멀리 있었다. 나는 얼결에 다리 하나를 맨손으로 덥석 잡았다가 문어 다리의 빨판이 내 손등에 달라붙는 바람에 고놈을 떼어내느라 한바탕 낑낑거려야 했다. 금세 손등 밖으로 피가 배어났다.
그 날 저녁 우리 식구는 삶은 문어를 도마에 올려놓고 썰어서 포식을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선호 너 아까 갯바탕에 가기 싫어서 몽니 부려쌓듬만…엄니가 펭소에 뭐라디야? 시상 일이란 거이, 다 좋기만 하고 다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니라. 들물이 있으면 날물도 있는 벱이랑께."
"요새 사방에 써 붙여 논 말이 '식량증산' '퇴비증산' 아니라고. 학교에도 딸린 밭이 있고 학생들이 싸놓은 똥오줌이 징하게 많응께 그놈을 이용해서 퇴비를 맨들자, 그래서 갖고 오라고 한 것이겄제."
전날 방과 후에 베어다 놓았던 꼴 한 아름을 새끼줄로 묶어서 책보와 함께 들고 나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두엄더미에 소마 끼얹듯 한 마디씩을 보탰다. 그날의 학교 숙제는 퇴비를 만들 꼴 한 뭉텅이씩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선호야, 오늘 학교 파하면 집으로 핑 온나 이. 엄니랑 갯바탕에 진줄 가질러 가자."
아니나 다를까 사립을 향하는 내 뒤꼭지에 대고 어머니가 언제나 처럼 그렇게 말했다. 나는 돌아서서 어머니를 향해 뭐라고 한 마디 내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간신히 다독거리며 고샅으로 나갔다. 그 무렵 내 마음바닥에도 은근히 반항심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국민학생에 불과한 나를 한 시도 가만두지 않고 부려먹으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제법 일찍 철이 든 편이어서 그러는 어머니를 향해 큰맘 먹고 반항을 한다는 것이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엄니, '오늘 학교 파하면 해찰피지 말고 집으로 피이이이이이잉 온나 이', 시방 그 소리 할라고 그랬제?"
그렇게 선수를 쳐서 어머니를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집안일을 거들지 않으면 어머니가 더 많이 고단할 것이라는 사실쯤이야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학교 가는 행렬이 가관이었다. 여자 아이들이 꼴 뭉치를 단정하게 머리에 이고 가는 데 비하여 사내 녀석들은 어깨에 들쳐 메거나 옆구리에 끼거나 두 손을 깍지 끼어 앞가슴에 부둥켜안는 등 제각각이었다.
"야, 야, 쩌그 선열이 똥구멍 조깐 봐라 이."
송남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선열이는 가슴에 안은 꼴 더미를 추스르랴 고무줄이 끊어져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를 단속하랴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바지가 흘러내려서, 덤불 속에서 몰래 익은 조선호박 옆구리 같은 엉덩이가 언듯언듯 비칠 때마다 여자 아이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학교에 두엄더미를 만드는 일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남자 아이들은 순번을 정해서 수업 중에도 서너 명씩 불려나갔다. 학교 변소의 잘 숙성된 소마를 나무통에다 길어 부은 다음에 두엄더미 쪽으로 갖다 주면, 학교 소사가 그 통을 받아 올려서 햄버거에 케첩 뿌리듯 고루뿌리고서 다시 풀을 올려 쌓는 작업이었다.
소마를 퍼 나르는 작업을 위해 남자 아이들은 교대로 징발 당하였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들은 비릿하고 텁텁한 똥오줌 냄새를 달고 와서 교실에 풀어 놓았다.
"자, 받아쓰기를 시작하겄다. 50점 이상 못 맞은 놈들은 학교 파하고 나서 소매 통 운반하는 일을 한 시간 동안 더 하게 할 것이여."
선생님이 엄포를 놓았다. 우리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연필에 침을 잔뜩 바른 다음 선생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 시방부텀 받어 써라 이. '재건!'…그 다음은 '반공방첩!'…세번째로 '식량증산!'…4번은 '퇴비!'…그 다음은 '유우엔!'…다 썼냐? 6번 문제는 '쥐를 없애자!' 그 다음 문제는 '입산금지!'…"
물론 나는 방과 후에 변소의 소마 통을 나르는 벌을 받지는 않았으나 내가 받아쓰기 시험을 치른 중에서 그 날의 성적이 가장 초라하였다. 반공방첩을 '방공방첩'이라 해서 틀렸고(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공' 말고도 공산세력을 막아낸다는 의미의 '방공'이라는 말 역시 당시에 널리 쓰였는데 그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 선생님은 분명히 '방공'이라고 발음하였다), '쥐를 없애자'의 경우 언젠가 동각의 양철문짝에 붙은 포스터에서 보았던 문구였지만 선생님은 분명히 '어배자'라고 발음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갸웃거리다가 발음 그대로 '쥐를 어배자'라고 적었다가 틀린 것이다.
또 한 문제를 틀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어느 날 육지의 간판장이가 와서 마을 인근 산들의 들머리마다 네 글자로 된 입간판을 세워 놓았는데 물론 '입산금지'였다. 그런데 그 간판장이가 멋을 부려 쓰느라고 그랬는지 금지의 '금'을 '놈'처럼 써놓았다. 그래서 아예 우리는 그것을 장난삼아 '입산놈지'라고 읽고 돌아다녔다. 물론 입산금지가 산에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그날 받아쓰기를 할 때 엉뚱한 발상을 제의한 녀석은 희철이였다.
"우리 '입산놈지'라고 한 번 써부까?"
"좋아!"
그래서 우리 둘은 일부러 '입산놈지'라는 오답을 적어냈다가 통쾌하게 틀려버렸다.
섬마을이다 보니 농지가 많지 않아 몇몇 집을 빼고는 자급자족도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소출을 늘리자면 퇴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들 거름 땀세 난리 아니냐. 너도 점심 묵고는 재너메 까끔(산)에 가서 깔 한 망태 비 갖고 온나. 꽉꽉 채워서 야무지게 한 망태 미고 와야 돼."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노라면, 그런 식으로 나의 오후 일과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작업지시를 내렸다. 날씨는 덥고 온몸이 나른하여 토방마루에서 낮잠이라도 한 숨 자려고 누워 보지만 어머니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망태와 낫을 챙겨들고 일찌감치 산으로 대피하였다.
나뿐만 아니라 이웃에 사는 종석이와 영길이도 처지가 같았으므로 우리는 마을의 뒷재를 넘어 산으로 들어갔다. 평평한 널바위 그늘에 빈 망태를 뭉뚱그려 베고서 나란히 누웠다. 낮잠을 한 숨 자려는 것이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조각낸 햇살이 각광처럼 어른거리고, 산 너머에서 피어오른 구름덩이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영길이는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종석이가 내게 말했다.
"너는 요 담에 커서 뭣이 될래? 나는 장사를 해서 돈을 조깐 많이 벌었으먼 좋겄는디…."
"전번에는 마도로스가 돼서 징하게 큰 윤선을 타고 수펭선 넘에 먼 디 까지 돌아댕기는 거이 소원이라고 하듬만."
"일단 웃녘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 배를 큰놈으로 살 것 아녀. 선호 너는?"
"나는 대통령."
"야,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읍해야 되는 것이여."
"박정희 맹킬로? 나도 사관학교를 댕기면 되제."
"댕기고 자프면 댕기든지. 선호 너가 군대 장군이 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되면, 그 시꺼먼 안겡은 내가 사주께."
"야, 그런 안겡 쓰고 걸어가다가 깜깜해서 자빠져뿔면 어짜라고?"
"자빠져서 다치면…누릅나무 껍데기 씹어서 볼르면 되제."
우리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둘이서 나누는 대화가 영 황당하고도 재미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므로 금세 싫증이 났다. 설핏 잠이 들려 했는데, 갑자기 우리의 발치 쪽 소나무 가지어름에서 말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매미 중에서 가장 재미없고도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녀석이 말매미였다. '우웽, 우웽'을 끝없이 반복하는 녀석의 울음소리는, 학교 소사가 교무실 창밖에 매달린 종을 쳤을 때, 그 종소리가 때마침 불어오는 세찬 바람의 그물에 걸려서 퍼져 나가지고 못 하고 다시 종의 아가리로 되돌아와 웅웅대는…바로 그런 공명(共鳴)을 동반하는 소리여서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종석이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누운 채로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서 소나무 가지를 향해 던졌다. 푸드득, 매미 한 마리가 도망을 쳤다. 이제 낮잠을 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쪽에서 시오시 매미가 발동을 걸었다. 녀석의 울음소리는 단조롭기만 한 다른 매미들과는 그 구성 자체가 달랐다. 그것은 발단과 전개, 그리고 절정과 결말이 한 데 어우러진 짧은 드라마라 할 만 하였다.
-쓰우…쯔꾸 쯔꾸 쯔꾸 쯔꾸 쯔꾸…
여기까지는 본격 울음을 울기 위한 발단이자 도입부에 해당한다. 그 다음부터 시오시 매미의 '울음극'이 전개되는데 종석이와 내가 소리를 맞춰 합창을 시작하자 잠이 들었던 영길이도 눈을 뜨더니 따라 했다.
-쯔꾸 쯔꾸 쯔꾸 쯔꾸…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오시, 쯔꾸쯔꾸 히, 쯔꾸쯔꾸 히, 쯔꾸쯔꾸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시오시, 시오시, 시오시, 추르르르르르르르르.
시오시 매미의 울음소리는 발단과 전개과정을 거쳐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그 속도가 빨라지는데 가령 '쯔꾸쯔꾸 오시'를 몇 번 반복하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은 매미에 따라 한두 번씩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우리가 발뒤꿈치를 타박타박 움직여 계산하는 박자와 대개는 맞아 떨어졌다.
"에이, 낮잠은 달어나부렀고, 우리 깔 내기 윷놀이 하자."
잠을 한숨 자고난 영길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꼴 내기 윷놀이를 제안하였다. 우리도 그 더운 낮 시간을 달리 때울 방도가 없었으므로 윷놀이에 동의하였다. 윷 가르는 일은 내가 맡았으므로 나는 낫을 들고 일어나 널바위 끝부분에 키 높이로 늘어져 있는 재밤나무(짝밤나무) 가지를 꺾었다. 어른들 가운데 손가락 굵기 만한 그 나뭇가지의 끝을 낫으로 대충 다듬은 다음에 2센티미터 가량의 길이로 잘라 두 토막을 만들었다. 낫을, 날이 하늘을 향하도록 세우고서 그 나무토막의 중심을 가늠하여 낫의 날에다 꼬옥 누른 다음, 다른 낫의 자루로 탁 치면 나뭇가지의 토막은 속살을 내보이며 이등분된다. 또 한 번…. 그렇게 해서 윷 가르기가 완성되었다.
그 사이에 종석이와 영길이는 칡잎파리 등 풀물이 잘 우러나는 잎사귀를 뜯어와 뭉뚱그려서 널바위에 문질러 윷판을 그려 놓았다. 퍼런 풀물이 선명한 근사한 윷판이었다. 윷판에 놓을 말이야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나 돌멩이를 사용하면 될 것이었다.
"자, 가자!"
우리는 낫을 들고 제각기 풀숲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땀 흘려서 한 아름씩을 베어온 꼴을 바위 한쪽에 전리품으로 쌓아두고 윷놀이를 시작했다. 앙증맞도록 작은 그 윷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흔들어 섞은 다음에 윷판에 뿌리는 방식이었다. 어른들이 술내기를 할 때에는 마당에다 덕석을 펴놓고 간장종지에 윷가락을 담아서 찰찰찰 흔들고 나서 내던졌다. 어른들은 윷가락을 던져놓고서 오른손 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철썩, 때리면서 '모야!' '숫(윷)이야!' 따위의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맞이한 설 명절 때,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가 윷놀이를 하자면서 문구점에서 윷을 사왔는데, 나는 그 윷가락의 크기에 기가 질려버렸다. 고향 마을의 윷이, 어린아이 손바닥에 네 가락이 모두 감춰질 만큼 작았던 데 비하여 중부지방의 그것은 숫제 장작개비만 했던 것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내 고향의 윷가락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둘러대었다.
"육지 사람들이 요렇게 큰놈을 가지고 윷놀이를 한다, 이 말이지? 쯧쯧쯧, 순 머슴 윷이로구먼. 머슴들끼리 도끼질하다가 즈이들이 패던 장작개비 갖고 놀이하는 거니까 머슴 윷이고 하인 윷이지, 선비들이라면 어디 그런 무지막지한 윷가락으로 놀이를 하겠냐."
물론 나의 그런 발언은 뭐랄까 일종의 왜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아전인수요, 견강부회였다.
"자, 인자 걸만 하면 내가 이긴다 이. 부처님, 조부님, 지발덕분에 개 말고 걸이 나오게 해주십사. 으이차! 어메, 이거이 뭣이여, 모다!"
종석이가 거푸 세 번을 이겼다, 그 바람에 종석이의 꼴망태는 벌써 불룩해졌다.
"선호야, 해 넘어가기 전에 엄니랑 갯바탕에 갔다 오자."
"갯바탕에는 뭣 하러?"
"진줄이랑 몰이랑 조깐 끗에올례야겄다. 놈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몰을 한 배씩 캐다가 널고 야단인디…우리는 갯바탕에 밀례온 놈이래도 끗어올렜다가 거름으로 써야제."
"시방 막 산에서 깔 한 망태 비 왔는디 오자마자 또 어디를 가자고…."
꼴 한 망태를 베어오자마자 어머니는 밀개떡 한 덩이를 내밀더니 이번에는 바닷가에 내려가자고 했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당에 굴러다니던 몽당 빗자루를 발길로 내질렀다. 그러나 결국 따라나서야 할 일이었다. 어머니를 앞세우고 바닷가로 내려가면서 나는 어머니의 목덜미가 온통 땀띠 투성이인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에 몽니를 부렸던 것이 막심하게 후회가 되면서 콧등이 시큰거렸고, 더불어 괜히 화도 났다.
"맨날 나이롱 적삼을 입고 밭 매러 댕깅께 땀띠가 나제."
나는 흡사 어머니가 나를 야단칠 때 하는 어투로 그렇게 내쏘았고,
"어짜겄냐, 그래도 나이롱이 안 떨어지고 질깅께…"
반대로 어머니는 야단맞는 어린아이처럼 기운 없이 그렇게 얼버무렸다. 기분이 영판 개똥같았다.
썰물이 진 바다에는 배들이 여러 척 떠서 몰 캐기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였다. 표준어로는 모자반이라고 하는 그 해초를 우리는 '몰'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바닷말의 '말'에 대한 생일도식 사투리 발음인 듯하다. 국도 끓여먹고 참기름에 무쳐먹기도 하는 몰은 '참몰'이라 하고 억세고 뻣세어서 먹을 수 없는 몰은 '개몰'이라 했는데 썰물이 되면 수심이 낮은 바다는 그야말로 몰밭이었다.
몰을 캐려면 기다란 대나무 장대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몰을 캐기 위해서 미리 대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바투 자르지 않고 십여 센티미터쯤 남긴 채 거칠게 잘라서 말렸다. 배를 타고 몰밭으로 나가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한 그 대나무 장대 둘을 물속에 넣고 이러 저리 꼬아서 돌린 다음 으이쌰 으이쌰, 잡아당기면 뿌리째 뽑힌 몰을 무더기로 캐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배가 있는 집의 경우고, 우리처럼 배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뿌리가 뽑혀서 떠다니다가 밀물 때 바닷가로 밀려오는 몰들을 끌어올려 말렸다. 그 역시 식량증산을 위해 밭에 낼 거름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말린 몰을 이고지고 밭으로 가서 이랑을 따라 깔아두면 그것이 삭아서 거름이 되었다. 우리가 진줄이라고 부르던 잘피의 경우,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거대한 띠를 이루며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파도가 치면 바닷가 갯돌 밭에 무더기로 밀려오곤 했는데, 그 잘피 역시 뭍으로 끌어올려 말렸다가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보리이삭 하나 고구마 한 뿌리라도 더 거두겠다는 마음들이 그처럼 절실하였던 것이다.
"자, 엄니는 쩌그 있는 진줄을 여 나를 것잉께 너는 갯갓에 가서 몰을 끗고 올라온나 이. 자, 심 내서 해보자. 그래야 멩년 밭농사를 잘 할 것 아니겄냐."
나는 이제 더 이상 화를 내고 있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내 기분을 다독거리느라 불쌍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몰 무더기를 한 아름씩 안아 올려서 바닷물이 미치지 못할 갯돌밭 위쪽에다 너는 작업을 해나갔다. 어느 사이 석양이 수면위에 고운 빛을 뿌리며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 무더기를 품에 그러안으려고 헤집던 나는 기겁을 하고 놀라 움찔 뒤로 물러났다.
"어, 엄니! 일루 와봐! 얼릉!"
나는 가슴이 뜀박질했으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소리를 죽여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
"이거이 뭔 일이라냐! 시상에…. 맨손으로 잡으면 안 돼!"
문어였다. 상당히 큰 그 녀석이었는데 아마도 밀물 때 몰 무더기와 함께 바닷가로 밀려왔다가 미처 못 빠져나간 듯 했다. 내가 몰 무더기를 헤쳤을 때 녀석은 민둥 대가리를 위로 뽑아 올리면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기에는 바닷물이 너무 멀리 있었다. 나는 얼결에 다리 하나를 맨손으로 덥석 잡았다가 문어 다리의 빨판이 내 손등에 달라붙는 바람에 고놈을 떼어내느라 한바탕 낑낑거려야 했다. 금세 손등 밖으로 피가 배어났다.
그 날 저녁 우리 식구는 삶은 문어를 도마에 올려놓고 썰어서 포식을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선호 너 아까 갯바탕에 가기 싫어서 몽니 부려쌓듬만…엄니가 펭소에 뭐라디야? 시상 일이란 거이, 다 좋기만 하고 다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니라. 들물이 있으면 날물도 있는 벱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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