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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혜, 제발 '자막'을 부탁해

[TV리뷰] KBS 수목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

등록|2009.08.27 15:27 수정|2009.08.27 15:27

▲ <아가씨를 부탁해>에서 강혜나 역을 맡은 윤은혜. ⓒ KBS


윤은혜가 돌아왔다.

지난 2007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커피프린스 1호점>을 마지막으로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던 윤은혜가 2년 만에 돌아왔다. 황태자비(<궁>), 시골로 낙향한 디자이너(<포도밭 그 사나이>), 남장여자(<커피프린스 1호점>)에 이어 그녀가 입은 것은 재벌이라는 화려한 옷이었다. 재벌도 그냥 재벌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산그룹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상속녀 강혜나. 이쯤 되면 재벌 중에서도 재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은혜, 윤상현 주연의 KBS 수목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밤 10시 방송)가 지난 19일 첫 방영을 시작했다. 방송 첫 회 만에 수목드라마 시장을 평정한 이 화제작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좋은 반응이든 나쁜 반응이든 무관심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시청률과는 어울리지 않게 혹평이 넘쳐났다. 특히나 윤은혜의 연기력과 극의 설정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대체 윤은혜의 연기가 어땠기에?

놀랍게도 윤은혜의 연기는 2년 전과 비교해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답보 상태, 아니, 오히려 퇴보한 듯보였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표정과 함께 표현해내고 있는 윤은혜를 보고 있자니,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원래부터 발음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최소한 알아들을 수는 있게 말해야 할 것 아닌가? 좀 오버해서 말한다면, 오락프로그램이나 외화에 등장하는 '자막'이 필요한 수준이다.

'재벌2세'란 어울리지 않는 옷 입은 윤은혜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윤은혜는 원래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 대사 전달력이 좋은 배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이돌 가수 출신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거쳐 드라마 주인공에 안착한 윤은혜의 연기 경력은 고작해야 4년, 그 중에서 2년을 내리 쉬었으니 실제 활동기간은 2년이라고 봐야겠다. 그 2년 동안 그녀는 드라마 3편, 영화 1편, 총 4작품을 했다. 단역이나 조연 경험 없이 처음부터 주연이었다.

불분명한 발음과 대사전달력은 연기자 전향 이후 쭉 논란이 됐던 부분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승승장구하며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회당 2천만원을 받는 거물급 여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감정몰입과 뛰어난 캐릭터 소화력에 있었다. 말괄량이 황태자비 신채경이나 남장여자 고은찬을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캐릭터 소화력. 윤은혜는 장점으로 능히 단점을 커버할 줄 아는 배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아가씨를 부탁해>의 강혜나는 지금까지 윤은혜가 연기해왔던 캐릭터와는 180도 다른 인물이다. 지금까지 윤은혜가 맡았던 캐릭터가 주로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함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캔디형 캐릭터였다면, 강혜나는 재벌가 후계자의 오만함과 당당함을 온몸에 두르고 사는 천방지축 안하무인형 캐릭터이다.

이런 안하무인형의 재벌 2세를 연기하는 연기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아우라'다. 다른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오만함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특유의 아우라. 요즘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즐겨 쓰는 용어로 '포스'나 '간지' 따위가 재벌 2세 캐릭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갖춰진 배우들의 재벌 2세 연기는 자연스럽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런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며 호감을 나타낸다.

윤은혜에겐 <커프> 고은찬 그림자가 너무 컸다

그런데 지금의 윤은혜에게는 그런 아우라를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비싼 명품으로 치장하고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녀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이건 윤은혜의 캐릭터 소화력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애초에 대중이 갖고 있던,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쭉 어필해왔던 그녀 자신의 이미지와 강혜나가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준 '소녀 장사'라는 이미지,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이다.

여기에 유난히 튀는 극의 설정과 유치찬란한 대사도 한몫 거들었다. 세트에서부터 "우리는 <꽃보다 남자> 여성버전이에요"라는 느낌이 팍팍 풍겨지는 <아가씨를 부탁해>는 여러모로 <꽃보다 남자>와 닮았다. 으리으리한 대저택도 그렇고(사실 두 드라마의 촬영지가 같다), 요란한 복장의 집사와 메이드들도 그렇다. 무엇보다 이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재벌 후계자인 두 주인공에 대한 지나치게 과도한 설정이다.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는 순전히 제멋대로 사는 위인이었다. 자기 구두에 아이스크림을 흘린 동급생에게 핥으라고 하질 않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괴롭혔다고 소화기로 머리를 내려치는, 상식 같은 건 모르고 사는 인물이다. 강혜나 역시 제멋대로이긴 마찬가지. 피고용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이고, 아무에게나 "천한 것들~"이란 대사를 쉽게 내뱉는, 도무지 현실에선 있을 것 같지 않은 캐릭터가 바로 강혜나다.

<꽃보다 남자>에선 이런 과도한 설정이 오히려 이민호가 연기하는 구준표의 캐릭터 구축에 일조하며 구준표 신드롬, 이민호 신드롬을 낳았다. 이는 <꽃보다 남자> 이전에 이민호가 대중에 각인된 뚜렷한 이미지가 없었고, 그가 아주 많이 빼어나게 잘생겼다는 점이 주효했다. 정해진 이미지가 없으니 재벌 2세 역할에 큰 부담이 없었고, 무엇보다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절정의 외모는 과도한 설정과 만나 오히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윤은혜는 달랐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준 소녀 장사의 이미지, <궁>의 신채경과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갖고 있던 서민 이미지는 대중에게 각인될 대로 각인된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는 미모를 뽐내기보다는 특유의 매력과 개성으로 사랑받던 배우였다. 어느 면으로 보나 재벌과는 동떨어진 이미지를 갖고 있던 그녀가 재벌 중의 재벌이 되어 유치찬란한 대사들을 내뱉을 때, 시청자는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부해> 인권변호사 '정일우'도 미스캐스팅

▲ <아가씨를 부탁해>의 주연들. (왼쪽부터)윤상현, 윤은혜, 정일우. ⓒ KBS

이 작품에서 '인권변호사'로 등장하는 정일우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과 뜻이 맞지 않아 집을 뛰쳐나온 재벌 2세, 윤은혜의 백마 탄 왕자님, 다 좋다. 그런데 인권변호사라는 설정은 좀 무리다. 정일우의 실제 나이 이제 겨우 23살.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이는 이십대 초반의 꽃미남 스타에게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은 좀 억지스러운 감이 있었다. 직업을 다른 것으로 설정하거나 아니면 그 역할에 어울리는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어야 했다.

물론 배우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나이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 여운계나 김수미, 최불암 등은 20대 때부터 연배있는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중심은 캐릭터 구축이다. 얼마만큼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몇 회 동안 정일우는 인권변호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잔뜩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윤은혜보다는 정일우가 미스캐스팅으로 보였다.

4명의 남녀 주인공 가운데 그나마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윤상현과 문채원이다. <겨울새> 이후 확실히 달라진 윤상현의 연기는 이제 물이 올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문채원 역시 <찬란한 유산>을 통해 전작 <바람의 화원>의 영향으로 남아 있던 사극티를 벗어내고 완전히 현대극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이 둘이 중심을 잡아 극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윤은혜와 작업을 했던 연출자들은 윤은혜의 가장 큰 장점으로 감정몰입과 캐릭터 소화력을 꼽는다. 윤은혜는 언제나 작품 초반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지만 장점을 살려 논란을 일축시키고 끝내는 작품이 성공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에게는 평범한 20대 여성이 쉽게 공감하고 감화될 수 있는 특유의 친화력이 있다고 했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이미지가 여성 시청자 층에 어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던 그 이미지가 지금의 윤은혜에게는 독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강혜나라는 캐릭터부터가 평범함과는 백만 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윤은혜가 극복하느냐에 <아가씨를 부탁해>의 운명이 달려있다. 윤상현이 분발하고 있지만 이 극의 중심은 누가 뭐라 해도 윤은혜다. 그녀가 살아야, 극이 산다. 과연 윤은혜가 연기력 논란을 딛고 4연타석 홈런을 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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