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박정희 묘소 바로 옆에 묻힐 뻔했다
[단독 인터뷰] DJ의 장조카 김관선씨... "정부, 지원할 만큼 했다"
▲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에서 부인 이희호씨와 장조카 김관선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함께 허토를 하고 있다 ⓒ 인터넷공동취재단
굽은 소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도리어 제 구실을 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지난 18일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조카인 김관선(52, 전 광주시의원)씨가 그랬다. 그는 장례기간 내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유족 대표로 장례식 형식과 절차에 관여했으며 서울국립현충원으로 장지가 결정된 뒤에는 영결식(23일)과 삼우제(25일)까지 묘소에서 살다시피했다. 국장의 절차상 봉분 조성 작업은 반드시 유족 대표와 행자부 관계자의 참관 하에 진행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현충원측은 저지대로 평평한 이곳에 묘지를 조성하기 위해 성토를 하느라 100차 분량의 흙을 실어 날랐다. 그 때문에 김씨는 인부들과 함께 매일 철야를 하다시피 했다. 24일과 25일 삼우제 때 만난 김씨는 꼬박 7일째 야간작업을 하고, 특히 막바지 4일 동안은 집에도 못들어가고 인근 사우나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는 서울과 중부지방에 비가 쏟아진 26~27일에도 작업을 독려해 28일부터는 일반인들도 참배할 수 있도록 가설 목조제단을 만들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6일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 형식 및 절차와 관련, 정부가 두 가지(국장 형식과 서울현충원 안장)를 들어주고 유족이 한 가지(장례기간)를 양보한 사실, 전국에서 지관 150명이 몰려든 일과 김 전 대통령이 평생의 정적이얶던 박정희 전 대통령 바로 곁에 묻힐 뻔한 사실 등 알려지지 않은 장례식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족은 '국장과 서울 안장' 원하고, 정부는 '6일장' 원해
그러나 그는 24일과 27일, 두 차례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인터뷰 사진은 한사코 사양했다. 이런 일로 얼굴을 내미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한 1992년과 1997년, 두 번에 걸쳐 7년간 당 재정국장을 맡길 만큼 신임하는 조카였다.
그는 광주시의원을 두 차례 지냈지만 정작 구청장 출마는 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후인 1998년 지방선거에서 지역에서 단수로 추천되었으나 대통령의 친인척이라는 점이 되레 족쇄가 돼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숙부(대통령) 때문에 출마를 포기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컸던 것일까? 김 전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측에 딱 두 사람을 부탁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김관선씨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뒷일을 부탁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공직에 기용되었으나 김씨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숙부의 선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유족 대표로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총괄한 장조카 김관선씨가 묘소에서 봉분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 김당
- 장지를 결정하기 전에 유족을 대표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 그리고 광주 5.18묘역을 둘러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인가.
"대전과 서울현충원을 다 둘러보았다. 광주는 아예 가보지 않았다. 다녀와서 대전은 대통령묘역이 따로 조성돼 있어 넓지만 서울은 좁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여사님(그는 숙모인 이희호씨를 그렇게 불렀다)께서 대전은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서울에 모시자고 했다."
- 정부에서는 난색을 표명하지 않았나.
"잘못 알려진 것이다. 정부는 안장 장소를 결정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께서 서거하자 정부측이 조심스럽게 "(대통령 묘역을 조성해 놓은) 대전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튿날 행자부장관이 유족의 뜻을 물어오기에 여사님이 두 가지 뜻을 전했다. 첫째, 국장으로 했으면 좋겠다, 둘째 동작동(서울)에 모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전은 아무런 연고도 없고 (장례일이 일요일이어서) 대전까지 운구하기 어려운 점도 감안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국무회의에서 바로 '오케이(O.K)'가 되었다."
- 현재의 장지는 어떻게 결정했나.
"정부에서 국무회의 결과를 전하면서 유족의 뜻대로 결정이 났으니 모실 자리를 유족들이 직접 고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 묘역 바로 옆에 1천평 규모의 묘자리가 있다며 그곳을 권했다. 그래서 땅을 파보았는데 지관이 돌이 많아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 대신에 국가유공자 제1묘역 근처에 80평짜리 땅이 있는데 협소하지만 이곳이 명당이라고 지목했다. 여사님께 현충원에서 권한 1천평짜리는 터는 넓지만 자갈이 나오고, 지관이 권유한 80평짜리는 터가 작고 길 바로 옆이어서 주차장도 만들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80평이면 충분하다고 하셨다."
"국장이라서 전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지관 150명 운집"
- 고인은 가톨릭 신자인데 지관(풍수지리설에 따라 묘자리나 집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도 봤나.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지만 유족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풍수지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우리가 안 불러도 국장(國葬)이라고 하니까 전국에서 난다긴다 하는 지관들이 한 150명쯤은 찾아왔다. 그분들로서는 국장에서 묘자리를 봤다면 국사(나라의 지관)로 자신의 주가가 올라가니까. 암튼 다른 지관들도 이곳이 대체적으로 '혈(穴)이 좋다', '흙을 파니 오색토가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무지개빛 오색토는 명당 자리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봉분 작업을 지켜보던 장성민 전 의원이 끼어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한 뒤에 공보비서를 지낸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아침 7시에 왔는데 정동향(正東向)이라서 그런지 다른 곳은 해가 안 비치는데 이곳은 햇살이 좍 비치는 모습이 너무 좋더라. 원래는 낮은 저지대인데 성토를 해서 이렇게 만들었다. 역시 지관들은 다르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데 그 사람들은 한눈에 이런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더구나 불과 20미터 뒤에는 대통령님의 '정치적 스승'인 정일형-이태영 박사가 계신다. 박정희의 묘소에 비하면 2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검소한 분이니 크기는 문제될 것 없고, 무엇보다도 정일형-이태영 박사 부부 곁에 모셔져 더 기뻐하실 것이다."
▲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합장묘소는 '정치적 제자'이자 '민주화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와 불과 20미터 거리에 있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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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언론에서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에 묻히게 된 것을 두고도 '죽어서 화해'한 것으로 썼다. 혹시 유족들이 박정희 옆이 싫어서 1000평짜리 대신에 80평짜리 묘자리를 택한 것은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인은 자신을 여러 번 죽이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이미 오래 전에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리고 현충원이 권유한 곳은 묘지를 조성하려면 훼손해야 될 나무가 많았다. 그에 비해 이곳은 소나무 세 그루밖에 훼손하지 않았다.
여사님은 장례식을 소박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것이 고인의 뜻이라며 묘지 주변 환경을 훼손하지 말고 둘레석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현충원이 권한 곳은 1천평이고 이곳은 80평밖에 안 되지만 별 고민하지 않고 이곳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사실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대통령님은 청와대에 계실 때도 티슈(휴지)를 절반으로 나눠 쓸 만큼 무척 검소하고 수수하신 분이다. 그래서 봉분 안에도 전혀 다른 흙을 사용하지 않고 이곳(현충원) 흙으로만 채웠다."
"정부와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친 것은 사실과 다르다"
- 장례형식과 절차를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은 없었나.
"정부와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정부에서 지원을 할 만큼 했다. 유족은 처음에 7일장을 요청했다. 국장은 법규상 9일장까지 할 수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보낸 지 석 달도 안 돼 다시 전직 대통령 장례를 치러야 하는 국민 정서와 경제난을 감안해 9일장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난색을 표했다. 7일장으로 하면 영결식을 거행하는 월요일(24일)을 공휴일로 정해야 하는데 그러면 공무원들이 3일(토, 일, 월)을 휴무하게 돼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자 여사님이 '6일장은 관례가 없지만 정부에서 우리가 요청한 두 가지(국장과 서울현충원 안장)를 들어줬으니 양보하라'고 말씀하셨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정부의 협조와 유족의 양보가 있었기에 국장 기간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족측에 따르면, 현충원 관계자조차도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곳에 못 들어오실 줄 알았다"고 했단다. 우선 서울현충원에는 전직 대통령을 모실 만한 넓은 땅이 없고, 전직 대통령들이 앞으로 타계할 것에 대비해 법령을 만들어 대전에 대통령묘역을 따로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협조와 유족의 양보로 원만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뒷말은 남았다.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오후 2시에 거행되었다. 이는 역대 대통령 장례 중 처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오전 10시, 노 전 대통령은 오전 11시에 엄수됐다. 그걸 두고도 정부와 갈등설이 불거졌다.
-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은 오전 10시에 영결식을 했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 국장은 영결식을 오후 2시에 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나.
"사람들이 일요일에는 교회나 성당에 가지 않나. 국민의 종교행사 참석을 감안해 오후로 잡은 것이다. 그런 것으로 정부와 갈등은 없었다."
"호상이었고 여사님도 조용하고 경건하게 치르길 원했다"
▲ 25일 오전 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에서 삼우제를 마친 부인 이희호씨가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묘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 김당
김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가장 격이 높은 국장으로 엄수된 만큼 여러 면에서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장의위원회와 영결식 규모는 어느 때보다도 압도적으로 컸다. 그러나 기간(6일)이 짧고 서거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기 때문에 조문객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또 같은 국장으로 치러졌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때와도 차이가 있었다.
장의위원회는 총 2371명으로 구성됐다. 노 전 대통령(1404명) 때보다 900명 이상 많았고, 박 전 대통령(600여명) 때에 비하면 4배 가까이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의 장의위원이 많은 이유는 유가족 추천인사가 많았기 때문. 노 전 대통령 장례 때는 유가족 추천 인사가 111명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1116명에 달했다. 그러나 조문객 수(72만명)는 노무현(400만명) 박정희(200만명) 때보다 적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에는 400만 명이 조문했는데 김 전 대통령 국장에는 70여 만명이 조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유족으로서 서운하지 않았나.
"천만에 그렇지 않다. 대통령님은 호상(好喪)이었고 여사님도 조용하고 경건하게 치르길 원했다. 또 노 대통령 때처럼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한 것 아니냐."
1600평 대 80평.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와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자리 크기는 20 대 1이다. 부인 육영수씨와 합장한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하저의 계단에서부터 묘소까지 거리만도 100미터 정도는 돼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곳에 영구차 보존관까지 따로 있을 정도다. 독재를 했어도 18년 통치와 민주정부 5년 단임의 크기가 국가 발전 공헌의 크기를 반영한 것일까?
리얼미터(대표 : 이택수)가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25일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가 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가 53.4%로 가장 많았으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25.4%로 뒤를 이었다. 3위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12.4%)이 차지했으며, 전두환(2.2%)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윤보선(1.8%), 이승만(1.6%), 노태우(1.3%), 김영삼(1.3%), 최규하(0.5%) 전 대통령은 3% 이하로 나타났다(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휴대전화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민주주의를 유보한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평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신봉했던 '민주화의 상징' 김대중, 그가 평생 정적의 바로 옆에 묻힐 뻔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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