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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실력 없고 줏대 없고 방향 없다"

[해외리포트] 백낙청 교수, 호주서 MB에게 직격탄

등록|2009.09.02 09:58 수정|2009.09.02 09:58
지난 8월 23일 새벽, 백낙청(71,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 비평> 편집인) 교수가 호주를 찾았다.

그날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그즈음 기자는 "정부와의 국장 논의 과정에서 DJ측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유족 측 장의위원장으로 낙점하기도 했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그가 국장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돌아가신 다음날 조문했다. 국장에 꼭 참석하는 게 도리였지만 25일로 예정된 호주국립대학교의 명사 강연 시리즈 일정 때문에 부득이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전부터 포스터가 붙은 공개강좌다."

기자는 백낙청 교수가 호주에 도착한 8월 23일부터 한국으로 떠난 28일까지 3차례 만났다. 그중 두 번이 국제선과 국내선 공항에서의 만남이었으니 그의 호주 일정이 어땠는지 짐작할 만하다. 인터뷰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형국으로 진행됐다. 공항대합실, 밴조 패터슨 코티지, 기자가 운전하는 자동차에서도 인터뷰가 진행됐으며, 호주공영 SBS라디오 한국어프로그램이 백 교수를 인터뷰할 때도 참여했다.

▲ 백낙청 교수의 호주국립대(ANU) 강연 안내 기사. ⓒ ANU 웹사이트


백낙청 교수에게 궁금했던 3가지

백낙청 교수를 만나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가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북한 조문단과 만찬을 가졌던 일이었고, 또 하나는 최근에 펴낸 사회평론서적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 관한 궁금증이었다. 세 번째는 김대중·노무현 이후의 진보진영 구도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그는 "21일 저녁에 북한에서 온 조문단과 함께 만찬을 겸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면서 "그날 얻어들은 얘기들이 있지만 나중에 천천히 얘기합시다"라고 답변했다. 무척 궁금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호주 대학가에서 얻은 이념지도(Ideology Map)를 내보이며 "어디가 중도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참동안 그 지도를 살펴본 백낙청 교수는 "이건 축이 둘밖에 없는 평면적 구도라서 한반도 분단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분단체제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입체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 증후군(Acquired Division-Awareness Deficiency Syndrome)'이라는 낯선 용어를 이념지도 뒷면에 써주었다. 백 교수는 이어 "극단적인 노선을 걷는 수구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분단체제의 특성에 대한 성찰 없이 함부로 말하는 일부 진보세력은 중도가 아니다,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 증후군은 후자(일부 진보세력)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 시드니공항에서 인터뷰 도중 백낙청 교수가 써 준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 ⓒ 윤여문


백낙청 교수가 중도를 설명하면서 수구세력을 제쳐놓고 일부 진보진영부터 공박하는 게 조금 뜻밖이었다. 게다가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 증후군'이라는 말은 처음 대하는 용어라서 이해가 불충분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결국 첫 만남에서 궁금증만 부풀린 채, 백 교수 부부는 캔버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어디가 중도이고, 어째서 변혁인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 백낙청 교수는 본인이 최근에 펴낸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기자에게 선물했다. 집필실로 향하는 전철에서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마주 앉아서 대화하듯 써내려간 글이라서 술술 읽혔지만, 20년 넘게 호주에서 살고 있는 기자의 입장에서 결코 녹록한 책이 아니었다.

우선 '중도' '변혁' '분단체제' 등의 단어가 함의(含意)하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들이 어떻게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뒤집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여서 어떤 꼭지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 백낙청 사회비평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표지 ⓒ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교수는 "어디가 중도인가를 알고 싶으면 무엇보다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북 분단체제를 존속시키는 '나쁜 에너지'가 성찰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것. 그는 "그게 진보이든 보수이든 극단적인 노선으로는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성찰을 가지는 입장이 중도"라고 설명했다.

'어째서 변혁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은 똑같이 요구된다. 남북한 기득권 세력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혁파하기 위해서 어떤 동력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폭력혁명에 기댈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혁명'이 아니라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

백낙청 교수는 "그런 변혁과 중도주의를 견인할 수 있는 주체가 시민이고 시민단체"라면서 "2008년에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했던 시민들의 의식이 변혁적 중도주의에 근접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DJ 죽음은 남북화해 위한 마지막 선물"

8월 25일 오후, 백낙청 교수는 호주국립대학에서 가진 강좌 들머리에 예정에 없었던 고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추가했다. 김 대통령 서거 소식이 호주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다음이었기 때문에 청중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헌신했다. 더욱이 그의 죽음은 남북화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약 1년 반 동안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는데, 최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서 해빙의 조짐이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의 방북도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셨고, 북한은 조문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를 계기로 새 정부 출범 이후 최초로 남북 당국자 고위회담이 성사됐고,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 면담까지 이루어졌다."

모두발언에 이어 백 교수는 1시간 동안 강좌를 이어갔다. 영어로 진행된 그날 강연은 '한반도 분단체제와 그 지역적 함의(Korea's Division System and Its Regional Implication)'라는 제목으로, 본인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관한 거대담론에 분단체제로 형성된 주변국가와의 상관관계를 포함시켰다.

1945년 남북 분단으로 시작된 한반도 분단체제가 독재정부와 군사정부 하에서 고착화 됐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분단체제 극복 과정에 접어들었으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또다시 분단체제로 복귀하는 조짐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말귀 못 알아듣던 남측 관리들 때문에..."

▲ '백낙청 교수와의 대화 in Sydney'에서 한인동포의 질문을 듣는 백낙청 교수. ⓒ 윤여문

"백낙청은 하나의 정부다. 민족문학, 민주화, 통일에 관한 거대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했다. 특히 통일에 관한 그의 사상과 현실참여는 철저한 자기 성찰과 내면화 과정을 거쳤다. 그러니 차돌맹이처럼 단단할 수밖에 없다."

2001년 8월 27일, 시드니에서 열린 제7회 '조국 통일에 관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고은 시인이 '백낙청 역할론'을 상기시키면서 한 말이다. 기자는 그 행사를 취재해서 '오세아니아 프레스'에 보도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8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9년 8월 27일, 시드니 파라마타 강변에 위치한 '밴조 패터슨 코티지'에서 백낙청 교수는 한인동포 15명을 만났다. 일정에 없었던 행사였는데 몇몇 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백낙청 교수와의 대화'가 급조된 것. 백 교수는 그 시간을 활용해서 캔버라로 떠나기 전에 기자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북한 조문단과 나눴던 얘기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북측 조문단을 위한 만찬에 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 전 장관과 박지원 의원, 문정현 교수, 그리고 내가 자리를 함께 했다. 정부에서는 통일부의 한 국장이 배석해 기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업적을 회상하는 등 만찬 분위기는 썩 좋았다. 또한 북한 조문단은 조의 표시뿐만 아니라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는 암시를 내비쳤다. 전체적으로 북쪽이 적극적으로 나오는 분위기였다."

차분했던 백 교수의 목소리 톤이 높이 올라간 건 그 다음부터였다. 문학판에서 냉철하기로 소문난 백 교수답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남쪽 관리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일관된 입장도 없고 그런 기회를 잘 활용해보겠다는 의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일을 자꾸 어렵게 만들었다. 더 이상은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결국 북한 조문단의 이명박 대통령 면담까지 이루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북한 3차 핵위기는 MB정부가 자초했다"

백낙청 교수는 그쯤에서 말머리를 분단체제로 돌려서 동포간담회를 이어갔다. 그는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서 분단됐고, 남북이 서로 이용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고 분석하면서 "분단이 체제화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찌됐던 통일만 되면 된다는 게 아니라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건설하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하면서도 애써 낙관론을 펼쳤다.

그가 펼치는 낙관론의 바탕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서로 외면하던 남북이 화해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번 계기를 살려서, 덜 긴장된 상태로 사는 정도에 안주하지 말고 분단체제를 극복해서 통일된 사회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소망이 곁들여진 미래적 전망이 깔려있었다.

▲ '호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밴조 패터슨 흉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백낙청 교수. ⓒ 윤여문


백 교수는 북한 조문단과의 만남에 관하여 할 얘기가 더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선에서 마무리 했다. 한인동포들의 입장에서도 더 물어볼 계제는 아니었고. 그러나 그의 이명박 정부 비판은 간담회 내내 이어졌다.

특히 "최근의 제3차 핵위기는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2007년 10·4합의에서 이루어진 '자주 만나자'는 등의 약속을 MB정부가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면 그와 같은 위기가 찾아왔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 "핵실험으로 분단체제는 굳어지는가?"라고 자문하더니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답했다. 물론 오랜 사태분석 후에 나온 자문자답이지만, 기자의 귀에는 "그렇게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백 교수의 바람으로 들렸다.

또한 백 교수는 "북한이 어렵기 때문에 핵실험으로 난리 피우는 것"이라면서 "남한의 입장에서도 북을 힘으로 무너트릴 수도 없고, 그래봐야 이로울 것도 없다는 게 내 판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북측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최선이라는 의견도 개진했다.

"실력 없고 줏대 없고 방향 없는 MB정부, 국민이 압박해야"

백낙청 교수는 분단체제 극복의 한 가지 해법으로 6.15공동선언을 꼽았다. 그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를 두 차례에 걸쳐 역임한 바 있다.

"남북이 통일을 지향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점진적,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남한은 남북연합을, 북한은 낮은 단계 연방제를 주장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연합을 건설하여 일정 기간 동안 두 개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통일을 위해서 서로 협력한다."

이와 관련하여 백낙청 교수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북측이 그 방향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라면서 "MB정권 1년 반 동안 꾹 참아온 북한 당국이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할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맥락으로 남한에서도 수위와 속도 조절이 필요한데 MB정부는 실력이 턱 없이 부족한데다 줏대도 없고, 방향도 없다"고 일갈했다. 이어서 "현 정권은 제대로 된 보수정권이 아니다, 걸맞은 일관된 전략이나 품격이 없다. 국정담당세력의 전반적인 무능과 무정견, 무교양에 할 말을 잃는다"고 공박했다.

물 한 잔으로 한숨을 돌린 백낙청 교수는 "결국 포용과 햇볕정책으로 돌아가서 6.15공동선언을 실천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아울러서 이명박 정부의 내부 정비가 꼭 필요하고 시민사회의 역할 또한 크게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날의 간담회를 갈무리하면서 백낙청 교수는 '시민사회 역할론'을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지금이야말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실천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출범한 정부를 전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대신 국민이 압박해서 정부가 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뽑았으니 꾹 참는 게 도리라는 말은 옳지 않다. 선거 등의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부를 깨우쳐야 한다.

호시탐탐 분단체제 복권을 꾀하는 '나쁜 보수'와 대한민국을 역주행 시키는 이명박 정부를 깨우치기 위해서, 오는 10월 재보선으로 그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성찰하는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만남과 지속적인 시민운동을 통해서 폭넓은 중도를 이끌어내야 한다."

▲ 2009년 8월 23일 시드니공항. 백낙청 한지현 부부의 아름다운 동행.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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