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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의 다산초당과 길의 의미

다산초당,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

등록|2009.09.01 15:00 수정|2009.09.01 15:00

▲ 강진 다산초당. ⓒ 임현철




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교감일 게다.

흙 길은 우리에게 친근감을 준다.
또한 메말랐던 정서를 풀어주며 다가온다.
다산초당 오르는 흙 길과 나무뿌리가 드러난 길은 위안을 준다.

대리석을 깐 길이 아니어서 좋다.
길바닥에 돈을 깐 길이 아니어서 더더욱 좋다.
행여 다산초당에 오르는 흙 길에 스민 운치를 대리석으로 망칠까봐 노파심이 인다. 

▲ 다산초당 오르는 길은 흙길이어서 좋다. ⓒ 임현철



▲ 행여 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대리석이 깔릴까 우려스럽다. 노파심이길... ⓒ 임현철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되어 머문 곳으로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이다.

다산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1801년 신유박해에 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 외가였던 해남 윤씨들이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다산초당. ⓒ 임현철




약천

약천은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 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았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하였단다.

▲ 약천. ⓒ 임현철




동암

동암은 송풍루라고도 불리며,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 동암. ⓒ 임현철




정석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한다. 아무런 수식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그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보여준다.

▲ 정석. ⓒ 임현철




다산 운명 3일 전 유작시

육십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갔네
복숭아 꽃 곱게 피던 봄철의 신혼 같구나
생이별이나 사별은 모두 늙음을 재촉하는 것
슬픈 세월 짧았고 기쁜 세월 긴 것은
임금의 은혜로다
결혼하던 이날 밤 사랑얘기 다시 좋고
지난 유배시절 아내의 치마폭엔 눈물 자국 번졌노라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은 우리들의 참 모습
바가지 두 쪽이나 자손에게 남겨 줌세

다산의 소박한 삶의 길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 다산수련원 앞에 선 광주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관계자들. ⓒ 임현철



덧붙이는 글 다음과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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