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87) '난날'과 '출생일'

[우리 말에 마음쓰기 749] 왜 '출생신고서'라고 써야 할까?

등록|2009.09.10 11:23 수정|2009.09.10 11:23

- 난날, 태어난날, 출생 날짜

.. 그리고 아이를 발견한 날이 출생 날짜로 되어 있었다 ..  《도리스 클링엔베르그/유혜자 옮김-엄마가 사랑해》(숲속여우비,2009) 75쪽

 "아이를 발견(發見)한 날이"는 "아이를 찾은 날이"나 "아이를 거두어들인 날이"로 다듬습니다. 어버이가 버려서 길에서 떠돌고 있던 아이를 '처음 본' 날을 가리키는 보기글이니, "아이를 처음 본 날이"로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 출생(出生) : 세상에 나옴. '태어남'으로 순화
 │   - 서울 출생 / 그에 대해서는 출생과 성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거의 없고
 │
 ├ 출생 날짜로 되어 있었다 (△)
 ├ 출생일로 되어 있었다 (x)
 └ 태어난 날로 되어 있었다 (o)

 국어사전에서 '출생'이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말풀이는 "세상에 나옴"으로 되어 있고, '태어남'으로 고쳐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자말 '출생'을 우리가 따로 쓸 까닭이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아니 말뜻 그대로 '태어남'으로 쓰면 넉넉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말 그대로 쓰거나 말뜻 그대로 쓰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동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하나 쓰려고 하면 '태어남 알림'이 아닌 '출생 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자말 '출생'은 바람직하지 못해서 '태어남'으로 고쳐써야 한다는 말풀이를 정부 스스로 하면서, 정작 정부 스스로 '출생 신고'라는 말마디를 바로잡거나 손질하거나 고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태어남 신고'나 '태어남 알림' 같은 말은 정부 서류에서는 쓸 수 없을까요? 이런 말마디를 쓰면 서류를 간수하기 어려울까요? 정부에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태어남' 같은 말로는 어렵거나 힘이 들까요?

 ┌ 출생자 → 태어난 사람
 ├ 출생일시 → 태어난 날, 태어난 날짜
 └ 출생장소 → 태어난 곳

 우리 식구는 지난 2008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기에 아이가 세상에 나왔음을 알리려고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적었습니다. 서류는 2008년에 새로 꾸몄다고 하는데, 2008년에 새로 꾸리면서도 '출생'이라는 말마디를 털어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식 이름으로는 '출생신고서'라 할지라도, '출생자'나 '출생일시'나 '출생장소'는 얼마든지 고쳐 놓을 수 있을 텐데, 어느 한 군데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고쳐쓰라고 두툼한 《국어순화자료집》까지 펴내지만, 막상 어느 정부 기관에서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 한 번 살가이 쏟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출생신고서'를 보면 '출생'이라는 낱말에서만 골치가 아프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적는 자리에서도 골치가 아픕니다. '이름'을 쓰라는 자리는 없이 '성명(姓名)'만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아빠)'와 '어머니(엄마)'는 없이 '부(父)'와 '모(母)'만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집'이라는 낱말은 없고 '자택(自宅)'만 있으며, "혼인신고시 자녀의 성ㆍ본을 모의 성ㆍ본으로 하는 협의서를 제출하였습니까"처럼 적어 놓을 뿐입니다. "혼인신고할 때 아이 성ㆍ본을 어머니 성ㆍ본으로 하는 협의서를 냈습니까"처럼 적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골을 때린다 할 만한 말투가 출생신고서 서류에 나와 있습니다.

 ┌ 출생자의 부에 관한 사항 → 아기 아버지가 적을 것
 └ 출생자의 모에 관한 사항 → 아기 어머니가 적을 것

 아기를 받는 병원부터 '아기'라는 말을 잘 안 씁니다. 우리 말은 어엿하게 '아기'임에도 하나같이 '신생아(新生兒)'라고 말합니다. '아기'이든 '갓난아기'이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집식구나 이웃이나 동무는 모두 '아기'요 '갓난아기'라 말하지만, 병원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서 공무원은 한결같이 '신생아'만을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출생신고서에는 '신생아 체중'을 적도록 되어 있고, '갓난아기 무게'나 '아기 무게'를 적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출생자의 부에 관한 사항"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왜 우리는 아기 엄마와 아빠를 엄마나 아빠라고, 또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하게 할까요. 이렇게 마련한 서류가 참으로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서류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할 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도 되고, 오로지 부와 모라고만 해야 서로 말귀를 알아듣는 셈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지난 2008년 8월 17일,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쓰면서 한참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미리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서류를 쓰는 내내 이런 서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도록 하고, 공무원 스스로 이러한 서식에 적힌 말투를 한 군데라도 쉽고 단출하고 알맞고 올바르게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가인구정책에 쓰는 자료'라 하면서 '최종졸업학교'를 반드시 적도록 해 놓고 있습니다.

 적든 안 적든 아기 엄마와 아빠 마음일 테고, 이러한 자료(어버이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를 어떻게 쓰려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우리는 왜 아기 엄마 아빠 가방끈을 알아야 하고, 알려 하며, 따져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물어 보려 한다면, 아이한테 아픈 데가 없는지라든지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도움을 받을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더욱이, '최종졸업학교' 자리를 거짓으로 적는다 했을 때 알아차릴 길이 없습니다. 이런 자료를 통계로 모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데에서 잘 찾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출생신고서에 이런 항목을 적을 까닭이란 없는 가운데, 출생신고서를 누구한테나 좀더 쉽고 바르고 알맞게 가다듬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모의 총출산아 수 → 어머니가 낳은 아이 숫자
 ├ 이 아이까지 총 ○○명 출산 → 이 아이까지 모두 ○○ 낳음
 └ (○○명 생존, ○○명 사망) → (○○ 살아 있고, ○○ 죽음)

 출생신고서를 다 쓰고 나서, 아기를 보듬으며 누워 있던 옆지기한테 돌아가서 출생신고서를 보여주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한 장을 따로 가져와서 이렇게 적도록 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옆지기가 물끄러미 살펴보더니, 도무지 무얼 적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차근차근 풀이해 주었습니다. '단태아'니 '쌍태아'니 '삼태아'니 '다태아'니를 비롯해, "모의 총출산아 수"처럼 알아차리기 힘든 말을 낱낱이 풀어내어 읽어 주면서, 이런 말마디가 왜 적혀 있는지 아리송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서류를 처음 만들었는지 아리송했고, 이런 서류를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손질하거나 고쳐 놓지 않은 까닭 또한 궁금하며 아리송했습니다.

 2009년이 되어도 달라질 낌새가 없고, 2010년이 아니라 2020년까지도 이런 출생신고서 서류가 고스란히 이어질 우리 나라인가 하고 헤아리면서 까마득하다는 느낌이 짙습니다. 우리는 우리한테 새롭게 찾아온 고운 목숨을 기쁨과 웃음과 눈물로 부둥켜안으면서 함께 좋아할 수 없는가 싶어 슬픕니다. 말이든 생각이든 삶이든, 서류이든 공무원이든 병원이든, 아기 엄마이든 아기 아빠이든 지식인이든, 우리는 '갓난아기' 앞에서, 또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날 '아이' 앞에서, 어떠한 말을 쓰고 어떠한 글을 쓰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떠한 말과 글로 세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야 할까요.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