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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공정 재판' 기사는 불공정?

정진경 부장 판사 <조선일보> 상대 명예훼손 소송 일부 승소

등록|2009.09.10 13:36 수정|2009.09.10 13:36
<조선일보>의 '불공정 재판' 보도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낸 현직 판사가 재판에서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재판장 조원철 부장판사)는 9일 정진경 부장판사가 <조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허위 사실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 책임이 인정된다"며 "<조선>과 기사를 작성한 B기자는 각각 5백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재판의 공정성에 대하여 보도할 때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살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작성하여야 함에도 제보 내용에 몰입한 나머지, 사실과 다르게 정 판사가 재판을 불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하였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일부 언론이 재판 관련 기사를 작성하면서 익명을 내세워 사실관계 확인에 대한 노력 없이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관행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가 있다.

<조선>의 보도, 허위 사실 드러나

먼저 문제가 된 <조선>의 기사를 살펴보자.

<조선>은 작년 11월 18일 "법관평가제 부른 어느 판사의 재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은 이 기사에서 "서울 지역의 한 법원에서 빚어진 '불공정' 재판 시비 때문에 변호사 단체들이 법관평가제도를 도입할 전망이다"라고 시작하면서 실명을 공개하지 않은 채 A부장판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기사는 이어 서울변호사협회와 B변호사의 주장 등을 토대로 A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생활 몇 년 했느냐는 등 '막말'을 하고 일방적으로 퇴정하기도 하고 ▲손해배상 감정신청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며 ▲재판부 기피신청을 기각하는 등 불공정 재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은 기사 뒷부분에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했다"는 취지로 A판사의 반론은 짤막하게 다루었다.

기사에 나온 A판사는 정진경 판사(당시 북부지법 근무)였다. 기사가 나오자 정 판사는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나와 법원의 명예를 훼손한 기사"라고 반발했다.

정 판사는 기사를 쓴 B기자에게 유감의 뜻을 전하는 전자우편을 보냈으며, 작년 12월에는 서울변협과 대한변호사협회 등에 진상조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변협 등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올해 2월 정 판사는 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A판사'라고 했어도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명예훼손 성립"

재판부는 우선, 실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명예훼손이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조선>이 '서울지역의 A판사'라고 표시했지만 나이를 공개하고, 사건 진행경과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점, 다른 언론에서 실명을 거론한 점 등을 들어 상당수의 사람들은 A판사가 정 판사를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이어 기사의 보도 내용이 사실인지를 따졌다. 기사 내용 중에서 '정 판사가 감정신청 철회를 요구했다'는 부분과 '법관평가제 도입과 원고의 재판 진행과정이 관련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사실과 부합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기사에서 적시한 대부분의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 판사가 '막말'을 하면서 일방적으로 퇴정하였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판사가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B기자는 제보를 통해 정 판사가 변호사에게 감정신청을 철회하도록 요구한 점을 불공정한 재판의 주요한 근거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하였다"며 그러나 "변호사가 손해액에 대한 감정에만 집착하여 정 판사의 감정신청 철회를 거부하면서도 (상대방이) 손해배상 책임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재판부의) 석명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면 불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사실관계에 있어서는 "B기자가 제보 내용에 몰입한 나머지 사실과 다르게 기술하면서 이를 토대로 원고가 불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하였다"는 입장이다.

한편 언론보도가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서 모두 민형사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이와 관련하여 법원의 일관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언론매체가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도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는 진실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

"<조선>기자, 제보 내용에 몰입하여 사실관계 확인 소홀"

하지만 재판부는 <조선>의 기사가 이러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재판부는 "B기자는 (기사 작성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채 원고(정 판사)가 감정신청의 철회를 요구한 배경이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불공정 재판의 근거로 적시한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며 "문제된 부분의 내용이 진실하다고 믿은 데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결론적으로 "허위의 사실로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기사의 내용, 목적 등을 감안하여 피고들이 원고에게 배상할 위자료를 5백만원으로 정한다"며 <조선>쪽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번 사건은 손해배상 금액을 떠나 현직 판사가 유력 언론을 상대로 벌인 이례적인 소송이라는 점, 법원의 재판 진행과 관련한 언론의 보도도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언론사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정 판사는 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금은 연수중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며 "연수 후에 대응 방안을 생각해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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