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남자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느냐?"

왜군 3만에 맞서 행주치마로 지킨 행주산성

등록|2009.09.12 15:56 수정|2009.09.12 15:56
파란 가을 아침 한강을 무사히 건너 행주대교 아랫길로 내려와 행주나루터 주변의 즐비한 음식점을 지나 행주외동으로 쭉 나아가면,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지 중 하나인 행주산성이 나옵니다.

행주대교와 방화대교, 자유로에 둘러싸인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으로 성의 남서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은 창릉천이 해자 역할을 하는 천연요새입니다. 한강과 인근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성이 처음 축조되었으며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행주대첩 때입니다.

▲ 자전거로 행주대교를 건너 행주산성으로 향했다. ⓒ 이장연




▲ 자전거를 이용해 행주산성까지 갈 수 있다. ⓒ 이장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순찰사였던 권율 장군은 선조26년(1593) 2월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정병 2300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합니다. 이 때 한성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후퇴한 왜군 3만이 집결해 있었고, 왜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를 격파한 직후여서 사기가 올라있었습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왜장 우끼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 왜군은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7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친 맹공격을 가해 왔으나, 모두 패하여 적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고 조선군은 창검 727점을 노획했다 합니다.

▲ 아침에도 행주산성을 찾은 사람들이 보였다. ⓒ 이장연




▲ 사적 제56호인 행주산성 ⓒ 이장연




토성에 목책을 세우고 적은 병력으로 관군, 승병 그리고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석전 등에서 공을 세우며 대승을 이룬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후 선조35년(1602)에 그 날의 승전을 기념하며 덕양산 정상에 세운 대첩비에 그 과정과 의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헌종8년(1842)에는 행주나루터에 기공사를 창건해 권율 도원수를 제향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된 후 1963년 산성 정상에 새로 행주대첩비를 건립했다 합니다. 행주산성에는 대첩비 외에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덕양정, 대첩비각, 대첩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92년에는 토성의 일부를 복원해 놓았고, 관람로에는 당시 사용했던 화차, 승전고, 승자총통, 투석기 등의 무기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 권율도원수 동상 ⓒ 이장연




▲ 행주산성 대첩문 ⓒ 이장연




매년 1월 1일에는 행주산성에서 신년 해맞이 행사가 열리고, 매년 3월 14일에는 행주대첩제가 열립니다. 사적 제56호인 행주산성을 관람하려면 하절기에는 적어도 오후 5시 전에는 대첩문에 드는게 좋습니다.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가기 좋은, 행주산성을 둘러보는데 한시간 가량 걸리기 때문입니다.

아참 권율장군이 1593년 행주대첩에 임하면서 장수와 군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男兒는 感意氣요. 功名은 誰復論하랴! 남아는 오직 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이 땅을 피흘려 지켜온 조상들은 공명을 잊고 싸웠다는데, 지금의 정치꾼들은 부귀와 명예만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3만 왜군을 격퇴한 권율장군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무섭지도 않은지??

▲ 행주산성 관람시간은 오후6시까지다. ⓒ 이장연




▲ 행주산성으로 오르는 길, 멀리 행주대교가 보인다. ⓒ 이장연




▲ 부귀와 명예를 따지지 않고 지켜온 조상과는 너무나 다른 요즘 정치인들 씁쓸하다. ⓒ 이장연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