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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 마지막 일기>를 선물 받고

등록|2009.09.15 13:41 수정|2009.09.15 13:41
조문객을 위해 급하게 만든 팸플릿

이 글의 제목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고인이 되신 15대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일기를 책자로 엮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장례식 때 조문객들을 위해 급하게 만든 40쪽 짜리 책을 지금 나는 한 권 가지고 있다. 책이라기보다 팸플릿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얇은 팸플릿 안에 개인과 가정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 나아가 국가와 세계에 대한 DJ의 사랑과 염려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앞으로 이 제목을 가지고 온전한 책이 발간된다면 더 많은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경북 김천 사람으로 DJ에게 헌신

김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나는 다리 수술을 받고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빈소를 방문해서 조의를 표했을 텐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럴 즈음 가깝게 지내는 한 분이 병문안을 왔다. 그  분이 멀리 병원까지 위로 차 문안을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보다 20여 년이나 연상인 그 분은 나를 아우라고 즐겨 부른다. 한참 아래 후배의 수술이 염려되어 한 달음에 달려온 것에서 그 분의 평소 성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의리의 사나이'로 부르고 싶다. 무슨 20세기 중반에나 어울릴 '의리'와 '사나이'를 들먹이느냐고 신소리 할 사람이 없잖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좋다. 그는 어떻든 '의리의 사나이'로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김천 사람이다. 김천은 경상도 중에서도 좀 억센 동네(?)에 속하는 곳이다. 이런 토양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70평생을 살아왔다. 그 중 단연 압권(壓卷)은 정치인 김대중을 변함없이 따르고 도왔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으로 호남 출신의 정치 지도자를 위해 몸 바쳐 헌신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눈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DJ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70 중반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장정 두 사람의 식사는 기본이다. 활동하고 허기를 느낄 때는 5명분의 밥도 쉽게 해치운다고 한다. 그는 한 때, 젊었을 때 출중한 힘을 무기로 주먹패들을 거느린 때도 있었다. 가끔 정치 집회 때 DJ를 위해 주먹들을 동원해서 선생의 세 불리를 보완해주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무용담(武勇談)이다. DJ도 그를 몹시 아꼈다고 한다. 그는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20인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될 정도로 그 분의 신임을 톡톡히 받아왔다.

DJ가 대통령이 된 뒤, 평생을 고생하며 자신을 도운 공(功)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한 지자체 관급 공사 책임을 그에게 맡겼지만 주위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다. 평생 세속적 출세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온 사람으로 또 사람을 쉽게 믿는 의리의 사나이 기질의 소유자로 어쩌면 이런 사기는 예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허허실실(虛虛實實) 뒤 끝이 없다. 그 사람이 오죽했으면 나같은 사람에게 사기를 쳤겠느냐는 것이다.

주먹계를 주름잡던 이가 정성껏 정서해 보내준 책자

지난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 장례위원 중 그의 이름도 있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국장에 장례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며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김 대통령 서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조문을 다녀온 그가 장례위원이어서 영결식에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나에게 했다. 조문객들에게 김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를 책자로 만들어 나누어주고 있는데 호응이 좋아 한 권씩만 가져가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병원 TV를 통해 들었다.

"형님, 장례식에 참석하면 그 책 한 권만 구해다 주세요. 조문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내용도 괜찮을 것 같으니…."

그 며칠 후 병원으로 팸플릿형 책자가 배달되었다. 김천에서 그분이 보내 준 것이다. 지나간 달력으로 손수 포장을 해서, 보내는 사람의 주소 받는 사람의 주소를 정성껏 정서(正書) 발송한 그 책자에서 나는 한 사람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때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적이 있는 70대 중반의 노신사에게서 받은 우편물이라 더 마음이 뭉클했다. 우람한 체구에 우락부락한 주먹을 가진 의리의 사나이에게서 이런 섬세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책 제목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 대통령이 쓴 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김 대통령의 삶과 사유를 한 줄로 정리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큼한 문장이다. 이 말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 말은 지금까지 내가 김천에 사는 70대 중반의 '그 분'으로 언급한 김경만 선생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의 지나온 삶을 회억(回憶)할 때 분명 인생은 아름답다. 부유해서가 아니다. 많이 배워서가 아니다. 더욱이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는 삶을 살아서도 아니다.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시종일관(始終一貫) 행동해온 그의 삶이 아름답다. 또 역사는 발전한다. 몇몇 영웅들에 의해 역사가 발전할 수도 있지만 김경만 선생과 같은 이름 없는 분들의 생각과 행동이 모여 역사 발전의 한 바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다수를 위해 발전하는 참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삶을 살아온 김경만 선생에게 찬의(贊意)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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