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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마지막 사랑이었습니다!"

[리뷰] 김병락·정행심의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등록|2009.09.15 20:26 수정|2009.09.15 20:26

늙은 부부 이야기이점순: 그 개버릇 아직도 못 버렸수. 그때도 이년 저년 데려와서 수작 부리고 잘난 척 하더니.. 박동만: 이년 저년이라니 다 노인대학교 친구요. 걸프렌드. ⓒ 송유미


작품의 황홀경에 빠져 연기를 잊는... 환상의 콤비, 김병락 정행심 배우   연극을 좋아하면 영화는 시시한 생각이 든다. 그만큼 연극은 관객에게 매력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연극을 보고 있으면, 무대 위의 연극이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 인생이 연극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연극의 역사만큼, 연극은 우리 네 삶과 가장 밀접한 예술이다. 공연이 일회적이란 점도 우리네 인생과 같다. 그래서 일까. 누군가 인생은 연습이 없는 연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 놓은 듯 해서 관객들에게 이웃집 늙은 부부 모습을 훔쳐 보고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늙은 부부 이야기>는 위성신과 오영민의 합동 극본으로, 극단 '오늘' 창단 10주년 기념 레퍼토리 공연작품. 국내 유명 탈렌트 이순재씨, 사미자씨 등이 출연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지난 9월 8-12일, 부산 사하구 연극협회 창단 기념 공연(연출 허영길, 제작 최인호(극단 61. 사하연극협의회 회장))으로, 동주대학 소극장에서 막이 올랐다.    부산 공연 <늙은 부부 이야기>의 주인공 박동만 역 맡은 이는 김병락 연극배우(교사극단 한새벌, 현재 승학초등학교 재직)이다. 이점순 역은 맡은 이는, 부산에서 '천의 얼굴'로 알려진 중견 연극배우 정행심(부산시립극단 단원)이다. 두 연극 배우들은 무대에 살고 무대에 죽는, 일단 무대 위에 오르면, 작품의 '황홀경'에 빠지는 열혈연기파들로 알려져 있다.   이미 2004년부터 여러차례 국내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이라, 두 사람은 약간 부담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연극이야말로 무대에 올려질 때마다 배우의 능력에 의해서, 매회 같은 작품이지만 관객에게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게 묘미라고 설명키도 한다.  

늙은 부부 이야기처럼소외된 노인들의 소재로 많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천의 얼굴, 정행심 배우 ⓒ 송유미

  이점순 여사 역의 연극배우 '정행심' 씨는 "정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하는 연기처럼 <늙은 부부 이야기>에 몰입해서 3-4개월 연습했습니다. 극중 인물 이점순 여사의 생애가 나의 미래의 모습 같아 절실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가난한 노인들의 가슴 뭉클한 사랑에 동화되어 연기를 한다는 사실까지 잊었습니다. 앞으로도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노인층의 인물을 소화하는 역할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런 그는 <사생결단> 영화에서 조연, 마약상 아줌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장르에 구애 없이 시낭송가, 음악 등 여타 장르에도 많은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점순 : 네. 그러고 보니까 영감이랑 같이 살면서 이 동네 한바퀴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했네요. 뭐가 그렇게 창피했을까. 죽으면 다 그만인데. 왜 그렇게 피해만 다녔을까요.   박동만: 임자는 말이여 죽어도 내 곁에 있는 거여. 요 맘 속에 영원히 같이 있는 거다 이 말이여.   이점순: 네. 죽어서도 영감 곁에서 말동무 해드리고 맛 있는 밥도 지어드리고 제가 그렇게 할 거예요.   박동만: 죽은 마누라도 안한 말을 다 하고 앉았네.  

늙은부부 이야기박동만 : 짐 ? 짐아라봤자 이 잘생긴 얼굴...잘빠진 몸매...그라고 강력한 요놈 하나뿐이지라잉.. 이점순: 아고...국밥집 할 때도 맨날 보는 게 징그럽더니 이젠 더 징글징글하게 생겼네.아이고 올 봄엔 일이 왜 이렇게 꼬인 다냐...돈은 벌어 좋지만... ⓒ 송유미

  외롭게 살아가다 만난 인생의 마지막 사랑은 정말 순수해   <늙은 부부 이야기>의 대략 줄거리는 이렇다. 30년 전 남편이 죽은 후, 혼자서 세 딸을 출가시키고 홀로 살아가는 이점순 여사집에, 어느날 국밥집을 운영하던 시절에 약간의 친분이 있던 '박동만'이라는 노신사가 불쑥 찾아온다. 셋방을 구하러 온 '박동만'이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점순 여사의 집에 방을 구하게 된다.   두 아들을 둔 박동만은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아들들의 무관심속에 외롭게 살아가다 같은 처지의 이점순 여사를 사랑케 된다. 한 지붕 밑의 애틋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결국 함께 여생을 살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도 잠시다. 이점순 여사는 박동만 노신사를 홀로 두고 병으로 죽게 된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시 찾아온, 애틋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박동만은 뒤늦게 운전면허증을 따서 신혼여행을 가자던 소박한 꿈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부인을 하늘로 보낸, 박동만 노신사의 넋두리가 관객의 가슴 저편을 아프게 울린다.   박동만 : 눈이나 펑펑 쏟아졌으면 좋겄네……  

늙은 부부 이야기박동만: 통 모르는 소리하시네...백지장도 둘이 맞들면 낫고 도둑질도 커플로 하면 나은 법인디잉...한놈은 망보고 한 놈은 털고 말이여. 이점순: 시방 도둑질 해 ? 이 망할 놈이 영감탱이가 말본 새하구는...꼭 촐랑대는 망둥이 같애... ⓒ 송유미

사랑의 미완성에서 더욱 관객에게 찡한 울림을 주다   <늙은 부부 이야기>는 얼핏 영화 <죽어도 좋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죽어도 좋아>가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면, <늙은 부부 이야기>는 가슴 저린 마지막 사랑 이야기다. 인생의 황혼에 찾아온 사랑은 미완성이라, 더 아름답다게 승화되고 있다 하겠다.    유구한 인생의 역사에,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가 많지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미완성에서 완성된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마지막 사랑이, 첫 사랑보다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렇다. 사랑에는 나이나 국경은 초월한다. 죽음 문턱에 선 생애 마지막 사랑이, 어찌 아무 철 모르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비유될 수 있을까.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한다.

연극 속의 이점순 여사는 우리 삶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이점순 여사는 억척스럽게 세 딸을 키웠다. 그는 과부라서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할까 봐 일부러 욕을 쓰는 욕쟁이 할머니… 이 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살아온 그 앞에, 나타난 동두천 신사 박동만의 행동은 코믹하고 해학적이다. 아내와 사별하고,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워 늦게 독립하여 집을 나온 그의 '독립기념일'은 이점순 여사에게 이사 온 날이다. 이들은 정말 오래 세월 외로웠던 만큼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 그들의 표현만큼 거칠고 힘들다.

그러나 함께 얼굴을 마주대며 살아가면서 점점 두꺼운 마음의 옷을 벗고 새로운 사랑의 힘으로 삶이 변화된다. 욕 대신 부드럽고 정이 넘치는 말씨를 쓰는 이점순 여사처럼 박동만노신사 역시 평생 취득하지 못한 어려운 운전면허 시험을 시도하는 듬직함을 보여준다.  

늙은 부부 이야기이점순: 바삐 사느랴 외로운 것도 모르고 살았소 박동만: 자식놈들 그놈들 생각하면 더 외로워지는 거라. 늘 지에미의 그림자를 걸치고 사는 놈들...그래서 욕도 많이 하고 때리기도 많이 때렸당게... ⓒ 송유미


  드라마틱한 장면은 없으나, 잔잔한 일상 속에서 행동하는 듯 연기하는 두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역설적 어법이, 관객에게 많은 웃음을 선물한다. 그러나 이 웃음의 선물은 후반부에 갈수록 눈물을 짜아내는 원천이 된다.    두 늙은이의 진솔한 사랑은, 청춘남녀의 사랑처럼 순수한 구석도 많다. 그러나 그 사랑의 표현들이 감상적이지 않고, 노련한 연륜에 의해, 비유와 은유적이라 관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생명이 경각에 매달린 암환자 이점순 여사나, 쾌활한 박동만 노신사, 그들은 연극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한다는 대사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슴 뭉클하게 깨닫게 한다. 우리네 인생과 사랑이 미완성이라서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이점순 : 여보, 내가 가는 저곳은 어떤 곳일까요? 당신은 천천히 와요. 내가 먼저 가서
당신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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