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근검절약, 새 며느리도 예외 아니었다
마당에 멍석깔고 보던 14인치 흑백 텔레비전에 담긴 추억
[#풍경 ①] 70년대 중반... 우리마을 TV는 '진뫼마을 TV'
70년대 중반, 고향 진뫼마을에서 가장 부자라고 소문이 났던 정수 형님네 집에서 처음으로 TV를 샀다. 마을에 텔레비전이 있기 전에 깨복쟁이 친구들은 2킬로미터쯤 떨어진 중전마을 구멍가게로 달려가 10원씩 내고 국가대표 축구경기나 권투시합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정수 형님네 집 작은방에 텔레비전이 놓인 후 마을 사람들은 저녁밥을 먹고 나면 그 앞에 모여 연속극이나 밀림의 왕국 타잔, 국가대표 축구경기, 권투시합 등을 자주 봤다. 특히 라디오만 듣고 살던 시골사람들에게는 토요일 밤이면 텔레비전 화면에서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멋지게 불러대고, 화려한 조명 아래 무용수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시청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이렇게 텔레비전이 시골마을까지 파고들어오면서 마을에 사랑방이 없어지고, 밤놀이 문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가족 단위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안방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정수 형님네 비좁은 방에서 어린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마을 어머니들이 연속극을 보러와 "너그들은 허란 놈의 공부 안 허고 맨날 텔레비만 보냐"라고 나무랐다. 일일 연속극을 유난히 즐겨보던 어머니들이 계속 들어와 자리가 비좁아지게 되자 눈치가 보이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름철이면 텔레비전을 아예 마루에다 내놓고 봤다. 마당에 멍석을 서너 개 깔고 마을 사람들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날이 가장 즐거웠다. 장소가 넓어 어르신들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요일 밤에 벌어지는 <MBC 권투>는 진뫼마을 사람들에게 단연 최고의 인기 프로였다. 외국선수와 권투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땀을 쥐며 열심히 응원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큰 펀치를 날려 상대방이 비틀거리거나 혹 다운이라도 되면, 마을 사람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방만 더, 한 방만 더"를 외쳤다. 이내 공이 울리면 "에이, 거그서 딱 한 방이 안 터지네"하며 아쉬워했다.
마지막 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고, 판정승으로 이겼을 때는 마을 사람들은 "외국 놈도 참 잘 허고만. 고 놈은 팔이 긴 게로 뻗기만 해도 우리나라 선수 얼굴에 닿은게 겁나게 많이 맞았어. 우리나라 선수가 포도시 이긴 거여"하며 대문을 나서곤 했다.
[#풍경 ②] 80년대 초반... 당당히 놓인 '우리 집 안방 TV'
80년대 초반, 마을에 대여섯 대가량 텔레비전이 설치되고 있을 무렵 우리 집에도 드디어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이게 되었다. 남원에서 경찰 공무원을 하던 큰형님께서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사다 드린 것이다.
우리 집에도 당당히 은빛 나는 안테나가 지붕 위로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채널을 돌리며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어 나는 너무 좋았다.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흥겨운 국악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면 채널을 고정시켰다. 이때 아버지는 "아따, 그 사람 참말로 소리 잘헌다, 뭔 목소리가 저리도 좋다냐"며 창(唱) 한 대목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빨간색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은 받침대가 스텐인레스로 설치되어 있고,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롤러 베어링이 밑바닥에 달려 아무 곳이나 끌고 다니며 볼 수 있게 돼 있었다. 비좁은 방에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편리하게 볼 수 있어 좋기는 했지만 잘 나오지 않는 화면 때문에 답답했다. 지금도 진뫼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지지지' 끌며 잘 나오지 않아 안테나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잘 나오는 곳에 고정시켜 놓고 본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설치되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텔레비전이 없을 때는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지 않았는데, 텔레비전이 설치되자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날아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편치 않았다.
평소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밴 부모님은 전기를 무척 아껴 썼다. 또 두메산골이라 정부 보조금 혜택이 조금 있어 그런지 1천 원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던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놓이고,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켜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평소 부엌이나 안방에 사람이 없는데, 만약 전깃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봤다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전기사용 근검절약 정신을 전 국민이 똑같이 본받아 실행에 옮긴다면 아마 전력 사용량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아버지의 근검절약 구두쇠 정신은 마을에서 두 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몸에 배인 분이셨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볼 때는 꼽꼽쟁이라 불릴 만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살림에 여러 명의 자식들 줄줄이 학교에 보내니 근검절약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뉴스 외에는 절대로 텔레비전을 켜지 못하게 했다. 연속극이나 기타 프로그램을 보면 "저건 모두 거짓꼴로 허는 짓이고, 뉴스만 진짜"라며 뉴스가 끝나면 곧바로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아버지가 외출하여 맘 편하게 텔레비전을 보다가 누가 마당에 들어서는 인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꺼야 만했다. 만약 텔레비전이 켜 있다가 아버지께 들키는 날이면 긴긴 훈계는 혼을 빼고도 남을 만큼 혹독했다.
"십 원짜리 하나도 못 버는 놈들이 무단시 텔레비를 켜 놓고 전기세만 올리게 허고 있네. 텔레비를 보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허란 놈의 공부는 안 허고 니가 도대체 앞으로 뭐가 될라가디 테레비만 쳐다보며 태평세월이냐. 한 번만 내 눈에 텔레비 켜 놓은 걸 보면 저 놈의 텔레비 콱 마당에 떤져서 바삭바삭 뿌솨 불랑게."
[#풍경 ③] 84년 가을... '전기요금' 새 며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84년 가을, 내 바로 위에 형이 결혼했다. 형은 결혼한 다음 곧바로 형수님을 고향 진뫼마을로 보냈다. 형은 객지에서 둘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면 좋으련만, 워낙 착한 심성을 타고나 부모님께 효도하려 무진 애를 썼다. 형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아내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없으면 서로 정들지 않아 만나도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며 보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가서 농사일 도와주며 서로 정 쌓으라고 보냈던 것이다.
형수님은 낮에는 어머님과 함께 고추를 따거나 추수한 벼를 멍석에 말리기도 했다. 또 매상을 하기 위해 벼 속에 섞여 있는 먼지나 겨, 쭉정이들을 풍구에 돌려 매상 가마니에 담는 등 부모님 농사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해가 뉘엿뉘엿 거리면 나이 드신 어머니들은 마을 공동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먹었다. 샘물이 모자라 늦게 가면 없는데, 셋째 형수님이 와 있는 우리 집은 형수님이 계속해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다 큰 함지박에 부어대는 바람에 항상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마을 어머니들은 "월곡떡은 참 좋겄네. 착허고 예쁜 며느리가 들어와 물도 몽땅 질어다 놓고…" 칭찬이 자자했다.
형수님은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더구나 어려운 시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일 돕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큰형수님이나 둘째 형수님도 농번기철이면 시골에 머물며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생활했었다. 하지만 내 바로 위 형수님은 그래도 신세대 사람인지라 막 결혼해서 보름 동안이나 시부모님 곁에서 생활하는 게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형수님은 시골에서 혼자 지내는 외로움 달래기 위해 밤이면 큰방에 있는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을 작은방으로 옮겨다 놓고 봤다. 그런데 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은 새 며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기요금 타령이 시작된 것이다.
"아야, 피곤 헝게로 어서 자거라."
"예, 아버님 바로 잘께요."
형수님은 형으로부터 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피곤해서 어서 자라"고 한 것은 '전기세 올라가니 어서 텔레비 끄고 자라'고 한 말이었으니 이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막 시집온 형수님은 시골에서 혼자 무료함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 켜 놓고 보고 있는데, 그마저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지금 서울에 사는 셋째 형수님은 올봄, 고향마을에 고사리를 꺾으러 봄나들이 왔었다. 신혼의 단꿈을 접고 보름 동안 시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며 지내던 형수님은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이 놓여 있던 작은방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형수님은 그때 텔레비전이 너무 보고 싶었다며 한바탕 시아버지 흉내를 내는 바람에 형제들 배꼽을 쥐게 하였다.
"아야, 피곤헝게 어서 자거라."
"네, 아버님."
14인치 흑백 텔레비전 놓인 자리에서 떠오른 아버지 얼굴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은 전기요금을 내는 문제 외에도 다달이 내야 하는 시청료가 더 큰 문제였다. 텔레비전을 처음 구매할 때 큰형님은 1년분 시청료를 미리 내고 부모님께 사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청료가 4, 5개월분이나 밀렸습니다."
그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시청료를 받으러 KBS 남원 방송국 시청료 수금원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 수금원의 나이는 30대 초반쯤 보였는데 KBS에서 시청료를 받아내는 용역사 직원이었다.
수금원은 아버지께 시청료 징수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며 "밀린 시청료를 빨리 내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겁을 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들여놓아 그렇잖아도 아버지는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고 있어 고민하고 있는 판국에 생각지도 않는 시청료를 다달이 내야 한다는 수금원 말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 젓고 있었다.
"나한테 시청료가 뭔지 설명할 필요도 없고, 또 밀린 돈 갚을 능력도 없응게 그리 알고 가소. 앞으로 다달이 내야 한다는 그 시청료인가 뭔가 하는 거, 다시는 나한테 받으러 올 생각 말소. 하늘이 두 쪽 나도 나는 그 시청료 못 내니까. 그라니도 요새 전기세가 많이 나와 걱정이 태산이고만 무슨 놈의 종신 골병처럼 그 많은 돈을 달달이 내라고 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강게 빨리 가소. 나는 케이비에쓴가 뭔가 하는 그런 방송은 보지도 않은 게 우리 집에 아예 시청료 받으러 올 생각 말어. 또 받으러 오면 주지도 않을 텅게 일찍 포기하고 가. 자네가 정 그렇게 안가고 나한테 빡빡 우기며 떼쓰면 자네 보는 앞에서 마당에 텔레비 콱 떤져서 뿌솨 불랑게."
KBS 시청료 수금원은 "남원에서 이 먼 시골마을까지 왔다"며 아버지께 시청료를 꼭 받아가려고 수금원 특유의 어감으로 아버지를 이해시키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끈질기게 졸라댔다.
지금이야 전기요금 고지서에 시청료를 합산해 강제로 수납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그때는 시골에 시청료를 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뫼마을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아버지 성질도 모르고 어설피 달려들었던 수금원은 기어이 훌쩍거리며 우리 집을 나섰다. 아버지가 얼토당토아니한 말로 계속 말대꾸 하며 수금원을 답답하게 만들고, 급기야 수금원 자존심까지 건들게 되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수금원은 엉엉 울며 우리 집을 나섰다.
지금 그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이 놓여 있던 안방 뒷문 쪽을 바라보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사방이 온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 빈촌에서 아버지는 일곱 명의 자식들만큼은 지게꾼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마을에서 처음으로 큰아들을 중학교, 고등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큰아들뿐만 아니라 줄줄이 낳은 자식들 모두 교복을 입혀 읍내로 유학을 보냈으니 십 원짜리 하나라도 아껴 써야만 했던 아버지. 당신의 근검절약 정신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를 세워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은 손자들에게도 이어져 우리 집에 불필요한 불이 켜져 있으면 딸내미나 아들 녀석은 "누가 불을 켜놓고 끄지 않았어, 이번 달에 우리 집 전기세 또 많이 나오게 생겼고만" 하며 곧바로 소등을 한다.
TV가 오래되어 새로운 TV를 한 대 샀는데 켜고 끄는 스위치 외에도 '절전용 전원 코드' 스위치가 하나 더 달렸다. 그런데 절전용 전원 스위치 표시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아이들은 여지없이 스위치를 눌러 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들이란 생각 지울 수 없다.
70년대 중반, 고향 진뫼마을에서 가장 부자라고 소문이 났던 정수 형님네 집에서 처음으로 TV를 샀다. 마을에 텔레비전이 있기 전에 깨복쟁이 친구들은 2킬로미터쯤 떨어진 중전마을 구멍가게로 달려가 10원씩 내고 국가대표 축구경기나 권투시합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정수 형님네 집 작은방에 텔레비전이 놓인 후 마을 사람들은 저녁밥을 먹고 나면 그 앞에 모여 연속극이나 밀림의 왕국 타잔, 국가대표 축구경기, 권투시합 등을 자주 봤다. 특히 라디오만 듣고 살던 시골사람들에게는 토요일 밤이면 텔레비전 화면에서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멋지게 불러대고, 화려한 조명 아래 무용수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시청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이렇게 텔레비전이 시골마을까지 파고들어오면서 마을에 사랑방이 없어지고, 밤놀이 문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가족 단위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안방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 정수형님네 집 마당 한켠에 있는 구유와 솥뚜껑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텔레비전을 보던 정수형님네 집. 이제는 빈 터만 남았다. ⓒ 김도수
정수 형님네 비좁은 방에서 어린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마을 어머니들이 연속극을 보러와 "너그들은 허란 놈의 공부 안 허고 맨날 텔레비만 보냐"라고 나무랐다. 일일 연속극을 유난히 즐겨보던 어머니들이 계속 들어와 자리가 비좁아지게 되자 눈치가 보이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름철이면 텔레비전을 아예 마루에다 내놓고 봤다. 마당에 멍석을 서너 개 깔고 마을 사람들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날이 가장 즐거웠다. 장소가 넓어 어르신들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요일 밤에 벌어지는 <MBC 권투>는 진뫼마을 사람들에게 단연 최고의 인기 프로였다. 외국선수와 권투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땀을 쥐며 열심히 응원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큰 펀치를 날려 상대방이 비틀거리거나 혹 다운이라도 되면, 마을 사람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방만 더, 한 방만 더"를 외쳤다. 이내 공이 울리면 "에이, 거그서 딱 한 방이 안 터지네"하며 아쉬워했다.
마지막 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고, 판정승으로 이겼을 때는 마을 사람들은 "외국 놈도 참 잘 허고만. 고 놈은 팔이 긴 게로 뻗기만 해도 우리나라 선수 얼굴에 닿은게 겁나게 많이 맞았어. 우리나라 선수가 포도시 이긴 거여"하며 대문을 나서곤 했다.
[#풍경 ②] 80년대 초반... 당당히 놓인 '우리 집 안방 TV'
80년대 초반, 마을에 대여섯 대가량 텔레비전이 설치되고 있을 무렵 우리 집에도 드디어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이게 되었다. 남원에서 경찰 공무원을 하던 큰형님께서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사다 드린 것이다.
우리 집에도 당당히 은빛 나는 안테나가 지붕 위로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채널을 돌리며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어 나는 너무 좋았다.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흥겨운 국악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면 채널을 고정시켰다. 이때 아버지는 "아따, 그 사람 참말로 소리 잘헌다, 뭔 목소리가 저리도 좋다냐"며 창(唱) 한 대목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 14인치 흑백텔레비전겨울 어느 날, 마을을 한 바퀴 빙 돌다 폐가로 방치된 '순창댁' 할머니 집에 들어가 찍은 14인치 흑백텔레비전. ⓒ 김도수
빨간색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은 받침대가 스텐인레스로 설치되어 있고,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롤러 베어링이 밑바닥에 달려 아무 곳이나 끌고 다니며 볼 수 있게 돼 있었다. 비좁은 방에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편리하게 볼 수 있어 좋기는 했지만 잘 나오지 않는 화면 때문에 답답했다. 지금도 진뫼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지지지' 끌며 잘 나오지 않아 안테나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잘 나오는 곳에 고정시켜 놓고 본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설치되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텔레비전이 없을 때는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지 않았는데, 텔레비전이 설치되자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날아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편치 않았다.
평소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밴 부모님은 전기를 무척 아껴 썼다. 또 두메산골이라 정부 보조금 혜택이 조금 있어 그런지 1천 원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던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놓이고,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켜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평소 부엌이나 안방에 사람이 없는데, 만약 전깃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봤다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전기사용 근검절약 정신을 전 국민이 똑같이 본받아 실행에 옮긴다면 아마 전력 사용량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아버지의 근검절약 구두쇠 정신은 마을에서 두 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몸에 배인 분이셨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볼 때는 꼽꼽쟁이라 불릴 만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살림에 여러 명의 자식들 줄줄이 학교에 보내니 근검절약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뉴스 외에는 절대로 텔레비전을 켜지 못하게 했다. 연속극이나 기타 프로그램을 보면 "저건 모두 거짓꼴로 허는 짓이고, 뉴스만 진짜"라며 뉴스가 끝나면 곧바로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아버지가 외출하여 맘 편하게 텔레비전을 보다가 누가 마당에 들어서는 인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꺼야 만했다. 만약 텔레비전이 켜 있다가 아버지께 들키는 날이면 긴긴 훈계는 혼을 빼고도 남을 만큼 혹독했다.
"십 원짜리 하나도 못 버는 놈들이 무단시 텔레비를 켜 놓고 전기세만 올리게 허고 있네. 텔레비를 보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허란 놈의 공부는 안 허고 니가 도대체 앞으로 뭐가 될라가디 테레비만 쳐다보며 태평세월이냐. 한 번만 내 눈에 텔레비 켜 놓은 걸 보면 저 놈의 텔레비 콱 마당에 떤져서 바삭바삭 뿌솨 불랑게."
▲ 진뫼마을 가을 풍경알알이 영글어 가는 벼들이 섬진강을 따라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 김도수
[#풍경 ③] 84년 가을... '전기요금' 새 며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84년 가을, 내 바로 위에 형이 결혼했다. 형은 결혼한 다음 곧바로 형수님을 고향 진뫼마을로 보냈다. 형은 객지에서 둘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면 좋으련만, 워낙 착한 심성을 타고나 부모님께 효도하려 무진 애를 썼다. 형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아내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없으면 서로 정들지 않아 만나도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며 보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 가서 농사일 도와주며 서로 정 쌓으라고 보냈던 것이다.
형수님은 낮에는 어머님과 함께 고추를 따거나 추수한 벼를 멍석에 말리기도 했다. 또 매상을 하기 위해 벼 속에 섞여 있는 먼지나 겨, 쭉정이들을 풍구에 돌려 매상 가마니에 담는 등 부모님 농사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해가 뉘엿뉘엿 거리면 나이 드신 어머니들은 마을 공동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먹었다. 샘물이 모자라 늦게 가면 없는데, 셋째 형수님이 와 있는 우리 집은 형수님이 계속해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다 큰 함지박에 부어대는 바람에 항상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마을 어머니들은 "월곡떡은 참 좋겄네. 착허고 예쁜 며느리가 들어와 물도 몽땅 질어다 놓고…" 칭찬이 자자했다.
형수님은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더구나 어려운 시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일 돕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큰형수님이나 둘째 형수님도 농번기철이면 시골에 머물며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생활했었다. 하지만 내 바로 위 형수님은 그래도 신세대 사람인지라 막 결혼해서 보름 동안이나 시부모님 곁에서 생활하는 게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형수님은 시골에서 혼자 지내는 외로움 달래기 위해 밤이면 큰방에 있는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을 작은방으로 옮겨다 놓고 봤다. 그런데 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은 새 며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기요금 타령이 시작된 것이다.
"아야, 피곤 헝게로 어서 자거라."
"예, 아버님 바로 잘께요."
형수님은 형으로부터 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피곤해서 어서 자라"고 한 것은 '전기세 올라가니 어서 텔레비 끄고 자라'고 한 말이었으니 이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막 시집온 형수님은 시골에서 혼자 무료함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 켜 놓고 보고 있는데, 그마저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지금 서울에 사는 셋째 형수님은 올봄, 고향마을에 고사리를 꺾으러 봄나들이 왔었다. 신혼의 단꿈을 접고 보름 동안 시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며 지내던 형수님은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이 놓여 있던 작은방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형수님은 그때 텔레비전이 너무 보고 싶었다며 한바탕 시아버지 흉내를 내는 바람에 형제들 배꼽을 쥐게 하였다.
"아야, 피곤헝게 어서 자거라."
"네, 아버님."
14인치 흑백 텔레비전 놓인 자리에서 떠오른 아버지 얼굴
▲ 고향집 전경초가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다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고향집. 가을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다. ⓒ 김도수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은 전기요금을 내는 문제 외에도 다달이 내야 하는 시청료가 더 큰 문제였다. 텔레비전을 처음 구매할 때 큰형님은 1년분 시청료를 미리 내고 부모님께 사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청료가 4, 5개월분이나 밀렸습니다."
그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시청료를 받으러 KBS 남원 방송국 시청료 수금원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 수금원의 나이는 30대 초반쯤 보였는데 KBS에서 시청료를 받아내는 용역사 직원이었다.
수금원은 아버지께 시청료 징수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며 "밀린 시청료를 빨리 내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겁을 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들여놓아 그렇잖아도 아버지는 전기요금이 1천 원을 넘기고 있어 고민하고 있는 판국에 생각지도 않는 시청료를 다달이 내야 한다는 수금원 말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 젓고 있었다.
"나한테 시청료가 뭔지 설명할 필요도 없고, 또 밀린 돈 갚을 능력도 없응게 그리 알고 가소. 앞으로 다달이 내야 한다는 그 시청료인가 뭔가 하는 거, 다시는 나한테 받으러 올 생각 말소. 하늘이 두 쪽 나도 나는 그 시청료 못 내니까. 그라니도 요새 전기세가 많이 나와 걱정이 태산이고만 무슨 놈의 종신 골병처럼 그 많은 돈을 달달이 내라고 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강게 빨리 가소. 나는 케이비에쓴가 뭔가 하는 그런 방송은 보지도 않은 게 우리 집에 아예 시청료 받으러 올 생각 말어. 또 받으러 오면 주지도 않을 텅게 일찍 포기하고 가. 자네가 정 그렇게 안가고 나한테 빡빡 우기며 떼쓰면 자네 보는 앞에서 마당에 텔레비 콱 떤져서 뿌솨 불랑게."
KBS 시청료 수금원은 "남원에서 이 먼 시골마을까지 왔다"며 아버지께 시청료를 꼭 받아가려고 수금원 특유의 어감으로 아버지를 이해시키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끈질기게 졸라댔다.
지금이야 전기요금 고지서에 시청료를 합산해 강제로 수납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그때는 시골에 시청료를 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뫼마을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아버지 성질도 모르고 어설피 달려들었던 수금원은 기어이 훌쩍거리며 우리 집을 나섰다. 아버지가 얼토당토아니한 말로 계속 말대꾸 하며 수금원을 답답하게 만들고, 급기야 수금원 자존심까지 건들게 되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수금원은 엉엉 울며 우리 집을 나섰다.
지금 그 14인치 흑백텔레비전이 놓여 있던 안방 뒷문 쪽을 바라보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사방이 온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 빈촌에서 아버지는 일곱 명의 자식들만큼은 지게꾼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마을에서 처음으로 큰아들을 중학교, 고등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큰아들뿐만 아니라 줄줄이 낳은 자식들 모두 교복을 입혀 읍내로 유학을 보냈으니 십 원짜리 하나라도 아껴 써야만 했던 아버지. 당신의 근검절약 정신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를 세워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은 손자들에게도 이어져 우리 집에 불필요한 불이 켜져 있으면 딸내미나 아들 녀석은 "누가 불을 켜놓고 끄지 않았어, 이번 달에 우리 집 전기세 또 많이 나오게 생겼고만" 하며 곧바로 소등을 한다.
TV가 오래되어 새로운 TV를 한 대 샀는데 켜고 끄는 스위치 외에도 '절전용 전원 코드' 스위치가 하나 더 달렸다. 그런데 절전용 전원 스위치 표시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아이들은 여지없이 스위치를 눌러 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들이란 생각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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