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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차 교사가 2년차 교사에게 보낸 편지

불편함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보다는 작은 변화로 희망의 틈새를 찾았으면

등록|2009.09.17 09:57 수정|2009.09.17 09:57
영어과 2년차 새내기 교사로부터 한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습니다. 중개인 역할을 해준 <우리교육> '갈등상황 100문 101답' 담당 기자를 통해 편지를 전해 받고 편지의 내용보다는 '2'라는 숫자에 한참 눈길이 멎어 있었습니다. 뭔가 신선한 곳에 손이 닿은 느낌이었는데 그의(혹은 그녀) 편지는 '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지만 너무 힘이 든다'는 쓸쓸한 어투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교육경력 2년차나 23년차나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심정으로 답장을 썼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애들한테 부끄러워요'

저는 영어과 2년차 (공립)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우리 학교에는 원어민 교사도 있고, 영어만 쓰는 장소('잉글리쉬존'이라고 하지요)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어전용교실도 하나 급히 만들었지요. 교육청에서는 이런 것들을 만들어놓고 계속 업무보고와 진행상황을 얘기하라고 합니다. 원어민 교사랑 아이들이 일대일로 대화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되는데 원어민 교사만 넣어놓고 성과를 내서 보고하라 하고, 영어전용교실 만들었는데 왜 실적이 안 오르냐고 따지는 상황인 거지요.

그런데 우리 학교 아이들은 영어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아이들이 많아요. 구문도 모르고 문법도 모르는 아이들한테 물질적인 것만 지원해준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잖아요. 기자재를 쓰면 잠깐 흥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전용교실을 만들고 영어로 수업한다고 영어가 느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당장 애들한테 더 필요한 건 동기부여고, 지금 잘 못해도 자신감을 지켜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본질적인 건 신경 안 쓰고 당장 외향적인 것, 대외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이렇게 업무에 얽매이는 상황에서 수업도 항상 수박 겉핥기로 하는 것 같아서 찝찝하고요. 무엇보다 교사로서 애들한테 부끄러워요. 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긴 하지만 너무 힘이 드네요.

'동문서답이 희망의 단초가 되기를'

2년차 (공립)고등학교 교사시라고요? 저는 23년차 (사립)고등학교 교사입니다. 2년과 23년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교직의 연륜이 늘어갈수록 '불편함에 대한 내성'이 커가는 것도 하나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을 읽고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새내기 교사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불편함이 너무 빨리 해소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학교생활이 많이 불편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한 때 집에서는 정상적으로 잘 뛰던 맥박이 학교만 오면 부정맥 증상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고 가르치는 일이 퍽 즐거운데도 학교생활이 불편한 것은 지금 선생님이 느끼고 계시는 바로 그런 점들 때문일 것입니다. 교사의 수고가 아이들의 영혼을 살찌우는데 쓰이지 못한다는 것. 이런 전망 부재의 현실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전문계이다 보니 '잉글리쉬존'은커녕 시에서 지원하는 원어민 교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를 방문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작년 2학기부터는 원어민의 수급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탓인지 그마저 끊긴 상황인데도 원어민이 상주할 영어전용교실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와 한 동안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학교 사정은 조금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정규모의 수업공간을 확보하여 일정기간까지 영어전용교실을 만들라는 일방적인 지시에 개조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멀쩡한 어학실과 방송실을 뜯어야만 했지요. 

저는 영어주임교사로서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올해 3월부터 전남교육연수원에서 실시한 6개월 영어직무연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수원 도서관에서 영어도서(주로 영문소설)를 대출해서 읽다가 문득 후회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영어전용교실에는 4백여만 원 상당(약 400권)의 영어도서를 비치하도록 되어 있는데 도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성의를 다하지 않은 것이 새삼 마음에 걸렸던 것이지요. 아직도 성급한 실적주의나 전시행정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부나 교육관청의 행태에 분개하다가 정작 교사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고 만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과오를 들추어내다보니 돌연 화살의 방향이 거꾸로 돌려진 듯하지만 이것이 저만의 오류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외적 조건이 열악할수록 내부를 공고히 하여 손실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의하시겠지만 오늘날 학교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비민주적인 관행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화살의 방향을 그들에게 돌리고 마냥 손을 놓고 않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최종 피해자는 바로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조금 빗나가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저는 '팝송으로 배우는 영어' 방과후 교육활동시간이 참 즐겁습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8교시 방과후 수업은 한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질 만큼 끔찍하기만 했습니다. 수강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이 담임의 강요에 못 이겨 자리를 지키고 않아 잡담을 하거나 아예 도망을 가버리기 일쑤여서 학생들에게 도움도 안 되는 수업을 왜 하고 있는지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6개월 영어 연수를 다녀온 뒤 제게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런 참담한 현실을 개선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아이들에게 정말 흥미 있고 유익한 수업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고백하자면, 연수를 받고 있는 동안 더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원어민 강사들로부터 영감에 가득 찬 놀라운 수업기술을 전수받으면서도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이었지요. 특히 학교로 돌아가면 당장 수능점수에 목을 매야하는 인문고 선생님들은 그 고민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연수에 참여했던 선생님들과 통화해보니 아직도 뾰쪽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망의 틈새를 찾고자하는 모습을 대화의 행간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학교로 복귀하자마자 원어민을 지원하는 관청 부서를 찾아갔습니다. 영어전용교실까지 갖추어 놓았는데 왜 원어민을 지원해주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원어민도 없는데 왜 영어전용교실을 만들어야하냐고 따질 때보다는 제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영어소설 읽기 동아리를 하나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전문계 학교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저에게는 너무도 소중합니다.

꿈보다는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지요. 아무래도 동문서답이 될 것만 같은 이 부족한 답변이 선생님의 훌륭한 해몽에 힘입어 작은 희망의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교육잡지 <우리교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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